찰나가 남긴 깊은 것들
모호한 색이다. 어느 것으로 이름을 지어 불러야 하고, 어떤 단어를 입에 올려 너의 색을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노란색으로 할까? 그렇게 칭하기에는 빛이 꽤 바래져 있다. 연한 노란색으로 할까? 그렇게 칭하기에는 연노랑이 가진 풋풋함과 연약함과는 이질적인 투박함을 가졌다.
그럼 어떠한 색으로 너를 표현하면 좋을까?
문득 눈을 하늘에 올려다 놓았다. 햇빛이 가을을 입은 탓에 그 색에 붉은 끼가 서려 있었다. 만선의 꿈을 이룬 배 수백 척이 파란 바다를 빼곡히 항해 하는 듯한 밀도 높은 구름이 파란 하늘에 퍼져 있었고, 빛이 지나는 길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빛이 눈치를 보듯 구름에 남몰래 걸쳐져 내리는 저녁녘. 구름의 뭉뚱한 모서리에 붉은 끼가 서린 빛이 스쳤다. 빛이 만드는 저 노란색이 꽤 매력적이다. 그래, 저 빛을 닮았다. 넌 저 빛 이었다.
배 그리고 화산배
가을이 되어 가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높아지는 하늘과 아침 저녁으로 얼음을 뒤에 두고 돌려 놓는 선풍기 마냥 선선해 지는 바람이 첫 번째다. 점차 힘을 잃어가는 낮의 지배력과 색을 바꾸는 나뭇잎이 두 번째 세 번째 겠다. 그리고 마지막. 갈 길이 좁은 빛이 어렵게 길을 나서다 구름의 모서리를 스치는 저녁녘의 색을 닮은 '배'가 있다.
바로 가을과 함께 새것이 되어 깨어 나는 배. 그 중에서도 오늘 '화산배'를 말하려 한다.
보통 우리들이 아는 배는 '신고배'가 대부분이며, 좀 더 관심을 갖는 다면 '원황' 이라는 품종 정도 일 것이다. 하지만 배도 타 과일 처럼 많은 품종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왜, 고작 이 두 가지 정도만 알려져 있을까?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신빙성 있는 사연은 '햇배'와 '저장배'라는 점에 있다. 여기서 저장배는 과일을 잘 먹지 않는 이들에게는 생소한 단어 일 텐데, 품종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닌 말 그대로 저장된 배를 말한다.
가을은 단감과 연시, 사과와 배 같은 과일이 익어 새롭게 출하 되는 시기이다. 물론 사과 같은 경우에는 가을을 제외한 시기에도'여름 사과'라는 별칭으로 '아오리'와 '홍옥'이 열리지만, 대중성을 갖는 사과는 가을에만 열린다. (부사 사과) 그렇담 여기서 모순이 생긴다. 사과와 배는 알다시피 가을의 범주를 벗어나 사계절 내내 접 할 수 있지 않은가. 어떻게 된 걸까?
의문은 앞서 말한 배를 기준으로 '원황배'와 '신고배'를 예로 설명할 수 있다. (사과는 부사) 가을이 되면 원황이 찰나에 타오르는 불꽃처럼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고 뒤를 이어 신고가 등장하는데, 이 배가 바로 다음 해 가을에 배의 시작을 알리는 '햇배' 원황이 나오기 전까지 우리가 계속해서 먹을 수 있는 품종이다.
저장성이 높은 신고배는 상온에서도 두 달 남짓을 버틸 수 있을 만큼 내구성이 우수하다. 또한 온도에 변화 없이 저온을 유지하면 수 개월도 거뜬히 버틸 수 있기에 가을에 재배를 시작하면 출하하는 양보다 저장하는 양이 더 많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많은 양이 재배가 된다. (저장하여 수확 시기가 지난 후에 차등 출하하면 좀 더 높은 몸값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특징이 배 품종의 다양성을 지양하는 이유가 되었다. 아무래도 맛과 저장성이 우수한 신고배는 자연스레 안정적인 수입을 가져다 주기에 농민들이 키우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결국, 장십량, 풍수, 금촌추, 만삼길 그리고 '화산'이라 불리는 품종도 재배가 이루어는 지나, 수도권까지 미칠 만한 양을 확보할 수 없게 만들었다.
숨은 보석 화산배
여기서 가장 아쉬운 것이 바로 '화산배'이다. 화산이라는 픔종은 배를 좋아한다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최고'라 정평이 나있을 정도로 그 맛이 매우 좋으며, 신고배와 달리 좀 더 밝은 색을 띠고 배 껍질에 보이는 동글동글한 점들의 크기가 타 품종에 비해 대체로 작고 부드러운 촉감의 품종이다.
1981년 원예 시험장에서 '풍수' 품종에 '만삼길'을 교배하여 개발한 품종으로 1992년 최종 선발 되어 1993년에 '화산'이라는 정식 명칭을 얻었다. 과실의 크기는 큰 반면, 과심은 작아 먹을 수 있는 부위가 많고 당도 또한 우수하여 많은 농민이 재배에 뛰어들면 금세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가리라 여겼으나, 저장성이 30일 남짓밖에 되지 않아 신고배의 압도적인 내구성 앞에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던 화산배.
하나, 맛이 좋은 과일은 반드시 팬층이 생기기 않던가. 많지는 않지만 9월 중순부터 10월 초까지 수도권에도 어느 정도 입하가 되니, 집 근처 과일가게에 문의를 한다면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된다.
화산배를 맛보다
처음 맛 본 것은 2년 전쯤이었다. 그때까지 알던 품종이라고는 원황배와 신고배가 전부였기에 처음 '화산'이라는 이름이 박혀 있는 배 박스를 보고 의아함을 숨길 수 없었다. 맛이 궁금했으나, "그래 봤자 배이니 맛도 거기서 거기 겠지"라는 우매한 생각을 가졌다.
그러나 큼지막하게 잘라 입에 넣은 화산배 한 조각이, 같잖은 생각들을 날려 버렸다. 지금도 꾸준히 이 맘 때가 되면 찾아 먹게 만들었다. 하나, 그날 처음 입에 넣었던 화산배의 감상 같은 '첫 맛'은 지금과 비견도 되지 않을 만큼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있다.
밝은 빛깔의 노란색 껍질을 날카로운 과도로 신중하게 깎아 내렸다. 나무에서 따내자 마자 올라 왔을 녀석이기에 살에서 껍질을 깎아 내는 소리에는 경쾌함마저 묻어 났다. 손끝을 타고 흐르는 과즙에도 가을의 선선함이 배어 있었다. 달콤한 배의 향이 풍겨 왔다. 의도적으로 달게 만든 '탱크 보이'보다 더 깊은 단내가 풍겨 왔다.
하얀 속살을 다 내보이자 곧장 4등분을 냈다. 입이 크니 이만한 크기여도 한입에 가득 넣고 씹을 수 있는 자신이 있었다. 회심의 미소로 큰 조각 하나를 입에 전부 넣었다. 그리고 씹기 시작했다.
과즙이라 하기엔 묽은 물이, 물리라 하기엔 너무도 달콤한 꿀 같은 단맛이 입에 가득 퍼졌다. 과육보다 먼저 단물이 말랐던 목을 축여 주었다. 곧 입에 남은 건 살점이 전부였다. 남은 살점은 신고배처럼 석세포(과육을 씹었을 때 오돌 도돌 입에 씹히는 것들)가 씹혀 입에 거슬릴 것 같았으나, 예상은 의외로 들어 맞지 않았다. 유연하게 과육이 씹혔다. 이질적인 걸림돌 없이 부드럽고 달콤하게 씹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살점 마저 목 뒤로 넘어갔다. 개운함을 마지막으로.
2년 전 그 날 먹은 화산배는 나에게 이런 선명한 기억을 남겼다. 예상을 뒤엎었고, 설명 못할 어려운 난제를 내려 풀어 보라 강요했고, 다소 단호했던 자신의 모습이 미안했다는 듯 꿀 보다 더 달콤한 맛을 남겼다.
※ 사진 출처 : unsplash (사진은 부득이하게 화산배와 관련 없는 품종의 배 이미지를 사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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