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취
인천에 위치한 <을왕리>에 다녀왔습니다. 어제 오후 4시쯤, 연인과 친구들과 미리 예약해뒀던 펜션에 가서 짧고 굵은 하룻밤을 보낸 뒤, 오늘 오후에 동네에 돌아왔습니다. 어제와 오늘은 햇볕이 뜨거울 정도로 구름 하나 없는 맑은 날씨였는데요. 그러다 보니, 어젯밤은 달도 밝았고, 깨끗하게 어두운 밤하늘은 숱하게 터지는 불량스러운 불꽃들에게 숨을 불어 넣기까지 했습니다. 그 밤에 닿기 전은 또 어떤지..
테라스에 있는 자그마한 바비큐 통에 숯불을 넣고 고기를 굽고 술잔을 기울이며, 함께 바라봤던 노을은 내내 아름다웠습니다. 눈을 깜빡이는 횟수만큼 무한히 변모하는 하늘은 세상에 있는 색깔의 반절은 모두 쏟아져 물드는 듯했죠. 완벽한 저녁과 밤이었으며, 이야기와 키스였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런 하루를 한 번에 계획할 수는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을왕리로 모든 의견이 모인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죠. 각자의 말이 각각의 날개를 달고 사방으로 흩어지기 일 쑤 였고, 엄밀히 따지자면 을왕리는 그 날갯짓을 하는 것조차 역부족이었습니다. "익숙한 곳을 가기보단 가지 못한 새로운 곳을 가는 것이 더 낫지 않냐"라는 의견 때문이었는데요. 당연히 어떤 누구든 시간을 들여 떠나는 것이라면, 더 좋은 곳 혹은 눈에 담지 못한 곳을 가고자 할 것입니다.
하나, 오랫동안 가지 못한 곳의 정취를 느끼고 싶었고, 짧은 휴일 동안 그 감정을 느끼기 위해서는 <을왕리>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을왕리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에겐 각자 그 수만 다를 뿐이지, 한 시기 동안 수 없이 찾아갔던 곳이 있을 것입니다. 장소만이 아닌 음식과 음악을 통틀어서 말이죠.
수차례 그곳을 찾았다는 건, 최소한 그때만큼은 그곳에 온전히 나를 기댔다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얼마의 시간 동안 나를 사로잡았고, 그로 인해 위안이나 힘을 낼 수 있게 했던 그곳. 기쁘고 행복했던 순간도 있을 것이며, 아련하고 미련스러운 감정을 들게 하기도 했을 그곳.
그럼에도 마치 원치 않는 병으로 생의 종주를 억지로 선고받아야만 했던 누군가의 사정처럼, 그곳에 멋대로 사랑을 쏟아붓더니 익숙해 짐에 따라, 식상해 짐에 따라 우리 손으로 죽여 버렸습니다.
을왕리는 스무 살 언저리쯤, 툭하면 친구들과 무거운 텐트를 가지고 가서 두 시간을 넘도록 설치하고, 번개 탄에 불판을 올려 고기를 구워 먹던 아지트 같은 곳이었습니다. 우리는 매번 기록하듯 사진을 남겼고, 그날의 일들을 오랫동안 술안주로 쓰기도 했었죠.
그렇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곧 익숙해졌고, 이내 식상해져 흐릿해지고 말았습니다. 더 이상 그곳에 갈 일은 없어졌고, 나이가 들어가며 책임감과 삶의 무게에 온몸이 짓눌려 지워버리기까지 했습니다. 우리는 멋대로 사랑하고 죽여버린 것이죠.
그렇기에 우리는 한번 더 그곳을 가야만 했습니다. 오래된 기억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기 위해서. 익숙했다 멀어진 것이 가져다주는 낯설면서도 편안한 정취를 느끼기 위해서.
새로운 곳과 새로운 것을 느끼는 것만큼 설레고 두근거리는 일은 없으니, 당연히 익숙한 곳보다 더 반짝거리고 아름다울 수는 있겠지만, 그럼에도 새로운 것이 익숙한 것을 이길 수 없는 건, 익숙함이 가진 절대적인 정취가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그것은 사람과 사랑에 있어서도 접목시킬 수 있는 통합된 이론도 될 것입니다.
우린 어젯밤, 선명히 그것을 온몸으로 느끼며 진한 안도를 깊게 새길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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