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무색한 아침 추위에 몸을 웅크리던 날이 엊그제였고, 그날을 지나 찾아온 오늘의 주말은 햇빛이 뜨거울 만큼 청명한 하늘과 함께, 높은 기온을 기록하고 있다. 11월은 일 년이 저물어 가는 언덕배기에 걸린 달이니, 우리는 또 자연스레 ‘올해’라는 말을 입에 올리며 올 한 해의 끝을 헤아린다. 올해는 유난히도 날씨가 변덕스러웠다. 최소한 내가 기억하는 시간 동안 이렇듯 날씨가 요란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겨울 추위는 봄이 도착한 후에도 끝날 생각 없이 세상에 매달려 질질 시간을 끌었고, 여름의 더위는 7월 중순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리곤 태풍처럼 더위는 한 달을 꼬박 휘몰아치더니 금세 물러가며, 가을에게 자리를 내어줬다. 그 사이 비는 축제처럼 이름 붙은 장마와 평일을 구별하지 않고, 세 개의 계절을 활보하며 땅을 적셨다. 예고도 없이, 맑은 하늘을 예외도 없이.
계절과 상관없이, 때론 눈이 내리는 겨울에도 비가 내린다. 비만큼 계절의 특성에 구애받지 않고 동일한 행보를 누비는 것이 또 있을까. 햇빛은 계절에 따라 뜨겁고 따뜻하기를 번복하고, 바람도 함께 뜨겁고 차갑기를 반복한다. 그와 달리 비는 어느 계절에 내리건, 언제나 피부에 닿을 때면 약간의 서늘함을 안긴다. 늘 같은 온도를 유지하는 우리의 체온에 닿는 물방울 하나는, 오늘의 기온이 몇 도를 기록하건 변함없이 우리를 서늘하게 한다.
그리고 삶을 쪼개 계절에 비유하며 사는 우리는 각자, 예나 지금이나 계절을 넘나들며 내리는 비처럼, 우리 삶에 깊숙히 퍼진 무언가를 하나씩 갖고 살아간다. 우리를 살게 하는 것들. 그것은 하나의 문장이 될 수도 한 명의 존재가 될 수도, 한 시절의 기억이 될 수도 있다. 나의 경우엔 시간에 비례해 두꺼워진 인연들이 비처럼 삶을 관통하고 있다.
올해를 곱씹던 얼마 전, 흐릿한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내 곁을 지켜주는 인연들을 떠올리며 휴대폰을 뒤적거렸을 때, 난 마음의 큰 동요를 느꼈다. 아홉수를 목전에 둔 나이는 마음이 어딘가에 사로잡힌 것처럼 내 것 같지가 않았다. 19살 때는 마음의 대부분을 설렘에 지배당했었다. 성인이 된다는 기대감과 학교를 벗어나 사회로 나간다는 설렘, 10대라는 이유로 막혔던 삶의 대부분이 환기된다는 희열감은 기다림과 설렘, 감동이라는 감정들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로부터 거의 십 년을 채워낸 지금의 나는 극도의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그날의 설렘이라는 감정은 조금도 발견할 수 없는 온전한 불안감, 두려움에 휩싸여 버렸다. 늙어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았고, 못내 이루지 못한 것들에 따른 회의감과 후회들로 마음은 끝없이 내려앉고 있었다.
나는 그런 혼잡한 마음을 부여잡고 계속해서 휴대폰을 뒤적였다. 십 대의 전부와 이십 대의 일부가 남아있는 싸이월드를 뒤졌고, 지금까지도 간간히 기록되고 있는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계속해서 써나가고 있는 글을 훑었다. 그리고 불현 듯 하나를 깨달았다. 지난 시간들에서 지나지 않고 계속해서 남아 있는 사람들을.
그 안에는 몇몇 동일한 인물들이 골고루 퍼져있었다. 어린 시절 유행처럼 번진 싸이월드의 사진과 글에도, 흐르는 유행에 몸을 맡기듯 넘어간 페이스북의 사진과 글에도, 점차 시詩와 글로 도배를 해 나갔던 근 1~2년의 시간까지 몇몇의 인물들은 변함없이 퍼져있었다. 계절을 넘나드는 비처럼, 나의 모든 것을 소리 소문 없이 넘나들고 있었다.
문득, 카카오톡의 대화창을 열었다. 예외 없이 그들이 묻어 있다. 어린 시절과 다름없는 말투와 시시콜콜한 대화 주제가 우리들 사이에 오가고 있었다. 무언가를 과시하는 이 한 명 없이 그저 오늘의 밥이나 주말의 놀거리, 취미, 사건 등을 주제로 떠들고 있었다. 그리곤 조만간 만나자는 약속. 아마도 나는 그들을 만나면 또 그들과의 대화에서 새로운 글을 캐낼 것이다. 변함없이.
사계절을 관통하는 비처럼, 나의 삶을 관통하는 대상들. 나를 동요하게 만드는 불안감과 두려움도 무색하게 하는 순박함으로 어른이 된 사람들. 내년이 되는 것이 두려워 고개를 숙였을 때 알 수 있었다. 변함없는 인연들은 나를 뒤흔드는 불안감에서도 나를 지탱하고 있다는 걸.
와카레미치입니다. 삶과 사람의 틈새에 산란해 있는 사정을 추려 글을 쓰고 윤색潤色합니다. 땅에서 시작된 작은 생명이 수십억 인간의 삶이 되는 것에 경외심을 느껴 농산물을 소재로 글을 쓰기 시작했고, 수필 연재와 만났던 농민의 작물을 독자에게 연결해 전달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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