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을 보냈던 할머니의 집 한 켠에는 소 두 마리가 우는 작은 외양간과 그 옆을 문지기처럼 지키는 감나무가 있었다. 할머니는 계절이 가을에 접어들면 나무에서 떨어지는 감을 소쿠리에 담아 며칠을 선선한 바람에 말려 감말랭이를 만들곤 하셨는데, 하루는 할머니가 말랭이를 만들기 위해 잘라 두었던 감 조각을 호기심에 하나 집어 들어 입에 넣었었다. 그리고 곧 울음을 뱉고 말았다. 작은 입안에 퍼지는 생전 느껴보지 못한 떫은맛에, 감정이 전부였던 어린 나는 맛을 이기지 못하고 울어버린 것이다.
할머니는 그런 나를 보며 한참을 웃으셨고, 나는 떫은맛이 가신 후에도 분한 마음을 떨쳐낼 수 없었다. 억울한 나를 타이르며 결백한 감조각을 꾸짖어 주시기를 바랐었는데, 할머니는 의외로 다정한 말을 잘해주시지 않는 분이셨다. 그러나 얼마의 시간이 지나 읍내에 다녀오신 할머니는 말없이 미소를 띠며, 검정 봉지에서 감 하나를 꺼내 나에게 건네며 말씀하셨다.
우리 강아지 이건 먹어도 된 단다.
좀 전에 먹었던 감과 다를 바 없는 모양에 선뜻 손을 내밀 수 없었지만, 할머니의 말에는 의심할 수 없는 진심이 느껴졌다. 나는 말없이 입을 소심하게 벌리며 한입을 깨물었고, 곧 할머니의 미소를 따라지을 수 있었다. 그 감은 좀 전까지 나를 눈물 나게 했던 떫은맛이 아닌, 사각 거리는 소리와 함께 단맛만을 가지고 있었다.
할머니는 그것을 단감이라고 하셨다.
일본에서 건너온 단감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감이라 하면 대부분 단감을 떠올릴 만큼, 단감은 '감'의 부류 중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는 품종으로 차례 상에도 빠지지 않고 올라가는 3대 과일 중 하나이다. 그러나 우리의 전통과 입맛에 깊이 뿌리내린 단감은 사실 우리나라의 토종감이 아닌, 일본에서 건너온 외래종에 속하는 품종이다.
우리나라의 감 재배 역사는 꽤나 오래되어 정확한 재배 시점은 알 수 없으나, 고려 명종(1138) 때 감에 대한 기록을 시작으로 차례차례 감에 관한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다. 특히, 1600년~1700년대 기록에는 곶감과 홍시, 감식초 등을 만드는 법에 대해서도 상세히 실려 있는데, 이것을 미루어 보아 토종감 특유의 떫은맛을 해소하기 위해 이미 오래전부터 가공을 통해 소비하는 것이 일반적인었던 걸로 생각된다.
그렇게 1800년대까지 단맛이 나는 생감을 접하기 어려웠고, 1900년대에 접어 들어서야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에 유입된 것이 단감의 시작인 것으로 짐작해본다. 토종감과 같은 모양새지만 떫지 않았던 일본의 감은 우리나라에서 '단감'이라는 명칭을 달고 급격하게 퍼져나가 생으로 먹을 수 있는 감으로 보편화되었고, '떫은 감'이라 불리던 우리나라 토종감은 곶감을 비롯해 감말랭이, 연시 등 한 차례 가공을 통해 소비하는 형태로 나뉘게 되었다.
변화를 꾀하다
우리나라의 단감 생산량은 지난해에만 20여 만 톤을 찍으면서 세계 1위라는 기록을 세웠지만, 앞서 말했듯이 단감의 품종은 모두 일본 종에 의존한 것이니 반쪽 짜리 영광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농촌진흥청은 2017년에 외래종에 의지했던 단감 품종을 대체하기 위한 신품종을 개발·선발해 농가 보급에 나섰다며, 5가지 품종을 소개했다.
이것들은 각각 '조완, 원추, 로망, 연수, 감풍'이라 불렸고, 외래종과 비교해 품질과 맛 면에서 모두 뛰어나, 각 품종의 수확 시기를 달리함으로써 홍수 출하를 예방하고 노동력을 분산할 수 있어 기대를 갖고 있다고 전했다.
하지만 사실상, 일부 농가에서만 시작하는 작은 걸음인 만큼 당장 일본 품종을 대체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 년이고 이 년이고 차츰차츰 시간이 쌓이면, 대한민국 '토종 단감'이라는 이름을 달고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을까? 새로운 이름과 더 좋은 맛으로. 해를 거듭하며 가까워질 그날을 기다리는 것도 설레는 일일 것이다.
단감을 맛보다
퇴근하던 이른 저녁, 잠깐 시장에 들렀다. 그곳은 노란색 백열구가 직선으로 나있는 길을 따라 줄줄이 늘어선 동네의 시장이었고, 장을 보는 사람과 퇴근하는 사람으로 북적거렸다. 나는 한참을 사람들 사이를 헤쳐서야 자주 가는 과일가게에 도착했고, 늦었지만 올해의 첫 단감을 먹기 위해서 피곤한 몸을 이끌로 온 것이니 지체 없이 서너 알을 4천 원에 구입해 손에 들었다. 그리고 집으로 향하는 길은 시장과 다른 한산한 길을 택해 걷기로 했다.
하늘은 밤이 되어감에 점점 어두워져 갔고, 이내 한적한 골목길에 접어들었다. 다세대 주택이 즐비해 있는 골목길에는 감나무 몇 그루가 꽤나 많은 감을 단 채 서있었는데 그것을 보니 문득, 손에 든 감을 바로 먹고 싶어 졌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봉지에서 단감 한 알을 꺼내 옷에 몇 차례 문 댄 후 한 입을 크게 베어 물었다.
사각 거리는 식감이 제일 먼저 입안을 채워 나갔다. 잘게 부서지는 살점까지도 사각 거리는 소리를 끊임없이 뱉을 정도로 단단해 과즙이라곤 일절 찾기 어려웠다. 하지만 설명하기 힘든 은은한 단맛이 입안을 맴돌았다. 사과처럼 깨무는 순간 과즙이 느껴지는 것도, 복숭아처럼 부드러운 과육이 부서지며 단맛을 입안에 묻히는 것도 아니었는데, 뭔지 모를 달콤함이 한 입 두 입 베어 물수록 입안에 차곡히 쌓여갔다. 과감하지는 않지만, 은은히 매력을 풍기는 누군가처럼.
가을이 되니 노을이 지며 하늘이 불타는 광경을 자주 목격한다. 오늘만 해도 하늘을 등에 업은 산의 등줄기가 붉게 불타고 있었다. 구름은 구경 나온 관중의 얼굴색처럼 주황빛에 물든 채, 산의 등줄기를 따라 천천히 유영했다. 그렇다고 매일 오늘 같지는 않았다. 어떤 날은 구경꾼 하나 없이 산만 홀로 불타기도 했다. 불길을 나눌 구름 하나 없이. 그런 날은 노을이 질 때면 주황빛이 여과 없이 하늘의 끝에서 끝으로 멀리 퍼져나갔다.
소란한 하늘이 매일 이어지는 가을에는 지상에도 노을이 진다. 사람들에게도, 지붕 없는 길가에 소리 없이 가지를 흔드는 감나무에도 노을이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