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인 머스켓 / 잊힐 포도와 희망이 된 포도

새로운 건 과거를 그립게 만든다.

by 전성배

대체된다는 건 조금 슬픈 일이다. 사랑하고 의지하던 이를 져버리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거나 다른 이에게 기대는 건, 홀로 남겨진 사랑받던 자에겐 가혹하기 그지없다. 시간이라는 이름 아래 쇠약해져 잊힌다는 건 더 슬픈 일이고. 수 십 년 동안 <포도>라는 통칭으로 우리에게 사랑받았던 품종 <캠벨얼리>가 바로 이 슬픔의 주인공이다. 옅어진 사랑의 색으로 점차 자리를 내어주고 있는 캠벨얼리. 그것을 대체하려는 <샤인 머스켓> 그리고, 둘의 간극에서 샤인 머스켓이 가진 희망은 아이러니하다.

와카레미치

2002년 10월 25일 한국과 칠레가 FTA(자유무역협정)를 맺은 이후로 매년 많은 양의 포도가 저렴한 값에 한국에 들어오고 있다. 우리가 아는 크림슨(씨 없는 포도), 청포도(톰슨 시들러스), 거봉(레드 글로브)이 바로 그것인데, 불과 15년여 만에 국산 포도의 새콤달콤한 맛과 달리, 산미는 적고 높은 당도와 씨까지 없는 수입 포도의 강점은 급속도로 우리의 입맛을 바꿔 놓았고, 서서히 캠벨얼리의 수요를 감소시켰다. 사실, 협정 이후 이러한 변화를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기에 한국도 국산 포도가 집중적으로 출하되는 시기에는 수입 포도에 <계절 관세>를 붙여 가격의 균형을 유지해, 국내산 포도의 소비 위축을 막으려 노력했고 이는 성공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거기에도 빈틈은 있었다.


국내 수입상들이 낮은 관세가 적용되는 마지막 달에 평소보다 몇 배에 달하는 양을 대량으로 수입해 창고에 저장한 다음, 계절관세가 적용되는 시점에 수입을 줄이고 저장했던 물량을 풀어내는 방법을 취한 것이다. 실제로 2016년 통계만 보아도 상반기에 수입된 양 중 60% 달하는 물량이 4월에 수입되었다. 결국, 수입포도는 계속해서 국내산 포도에 비해 더 저렴한 값으로 시장에 풀리게 됐고, 피해는 고스란히 국내산 포도에게 돌아갔다. (2016년도 기준 수입 포도와 비교해 국산 켐벨얼리의 가격은 25%, 국산 거봉은 47% 더 비쌌다.)


70여 년 가까이 이어져 온 국내산 포도. 그중에서 가장 친숙했던 캠벨얼리는 이처럼 기울어져 가고 있는 중이다. 오랜 재배 탓에 땅도 나무도 나이가 들어가다 보니, 보다 맛있는 맛에 포도를 얻기란 과거에 비해 많이 어려워진 것이 사실이다. 새로운 묘목을 심거나 더 좋은 영양을 주고 날씨의 영향을 최대한 덜 받도록 애지 중지 키운다 한들, 또 그만큼 값이 수입 포도에 비해 높아질 수밖에 없어 소비자에게 예전만큼 사랑받지 못하고 있는 신세다. 거기에는 작은 과립과 약간의 산미, 단단한 씨가 있어 먹기 불편하다는 점도 포함된다.


그리고 그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샤인 머스켓>이다. 희망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도입되어, 실제로 포도 농가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보물 같은 작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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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일본 과수 시험장에서 육성한 대립계(알이 큰 포도)포도인 샤인 머스켓은 2006년에 정식으로 품종 등록이 완료되었고, 2014년 무렵 우리나라에 도입되면서 본격적으로 생산하여 유통하기 시작했다. 물론, 샤인 머스켓을 수입하기 이전에도 우리나라는 나름의 돌파구를 찾기 위해 노력했었다. 수입 포도에 점차 자리를 잃어가는 켐벨 포도에 위기를 극복하고자 <포도 연구 센터>까지 설립하여 신품종 개발에 매진했고, 실제로 몇 개의 품종을 선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소비 트렌드가 이미 수입 포도로 많이 기울어 있었고, 농가 측에서도 기존 켐벨 포도 재배 시스템을 활용하여 생산할 수 있는 신품종만 고집하다 보니 새로운 포도를 시장에 안착시키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새롭게 도입된 샤인 머스켓은 경상북도 상주를 시작으로 첫 재배가 이뤄지기 시작함과 동시에, 출시된 지 얼마 안 된 신품종임에도 경상북도 기술원에서 이미 재배 매뉴얼까지 정립되어 있어 빠른 성장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미 완성된 재배 매뉴얼과 독보적인 외형 그리고 맛에서 가능성을 엿본 포도 농가들이 상주의 사례를 본보기로 너도 나도 재배에 뛰어든 것이다. 현재는 김천, 경산, 영천 등의 지역에서도 재배되고 있고, 농업계는 계속해서 재배지역이 확대될 거라 예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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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포도 특유의 머스캣 향을 가득 품은 샤인 머스켓은 타 수입포도와 마찬가지로 씨가 거의 없고, 껍질째 먹을 수 있다는 장점과 큰 과립 덕에 한 알만 깨물어도 풍부한 과즙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특징으로 내세우며, 시장에서 빠르게 영역을 넓혀가는 중이다. 상대적으로 비싼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소비가 활발한 이유는 아마도 기존 수입 포도와 같은 편리함과 더불어, 수입 포도를 능가하는 높은 당도와 과립 크기, 청포도를 닮아 예쁜 자태를 뽐내는 외형도 한몫 한 것이라 생각된다. 이미 소비자들 사이에서는 샤인 머스켓에 <망고 포도>라는 별칭을 붙여 부를 정도로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한 알을 입에 머금고 깨물면 과즙과 함께 터지는 머스캣 향이 날 숨을 통해 빠져나오며 특유의 망고 향을 낸다고 하여 붙여진 고개가 끄덕여지는 별명. 수입되어 들어오는 포도의 약점인 싱싱하지 못하다는 빈틈을 파고들어 싱싱하다는 강점까지 지니고 있는 샤인 머스켓은 이미 수출 분야까지 영역을 넓히고 있다.


포도 농가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샤인 머스켓은 현재 농민의 희망이라 말할만하다. 도입된 지 불과 몇 년 만에 많은 소비자가 샤인 머스켓을 궁금해하고 관심을 쏟고 있으니, 올해 하반기 인기 과일의 명예는 샤인 머스켓의 차지가 될 것 같다. 그러나, 조금 서글픈 것도 사실이다. 변해가는 이와 돌아선 이들에 의한 포도의 변화는 아이러니를 낳는다.

와카레미치

켐벨포도는 변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사랑하며,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영속적인 이를 닮았다. 그리고 켐벨포도 중에는 여전히 과거의 위상과 맛을 품고 태어나는 것도 아직 무수히 많다.


멈춰 진득이 있는 이들은 작든 크든 다 같다. 사람도 감정도 멈춰있는 이가 변하는 것은 없었다. 늘 그가 아닌 우리가 그 자리 그 모습이 지겹고 무색해져, 새로운 자극이나 감정을 찾아 떠나버리곤 한다. 그래서 조금은 서글프다. 새로운 것을 찾아 떠나고 남은 여운 같은 과거에 그저 미안한 마음이다.


핑계일지는 모르겠으나, 그럼에도 불가항력의 힘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음을 알아주길. 그리고 돌아선 뒤 새로운 희망을 엿보았음을 인정해주길. 떠난 이의 행복을 빌며 그 자리에 있는 너는 분명, 그리움을 만들어 내는 이가 될 것이다. 그럼 그리움이 그리워져 너에게 돌아가는 이들도 생길 것이다.


과거는 새로운 게 필요하고, 새로운 건 과거를 그립게 만드는 법이니까. 추억을 회상하며 아날로그를 찾고 레트로에 호응하며, 복고에 웃는 것도 그런 이유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