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劫'이란 세상이 태어나고 멸망하여 공무空無가 되는 하나하나의 시기를 말한다. 즉, 1겁은 세상이 태어나고 멸망하기를 한 번 반복한 것을 뜻하며, 우리는 흔히 인연을 전생에 산정할 수 없는 무한의 시간을 몇 겁이나 보내야만 맺어지는 절특한 것이라 여긴다. 불교에서는 친구나 연인, 가족은 물론 심지어 옷깃만 스친 사람과도 전생에서 보낸 수많은 겁이 점철된 결과라며 인연 자체를 고결한 가치로써 말한다.
그러나 인연이라는 각별한 것을 쉽게 입에 올려 휘두르는 현재의 우리에게는 어쩌면 어처구니없는 이야기 혹은 터무니없이 맹신하는 미신일지도 모른다. 인연을 맺는 붉은 끈이 요즘은 지천에 산란해 있기 때문이다. 뼈대만 처량하게 남은 지붕에 넝쿨이 엉켜 머리칼을 느러뜨리 듯, 적승赤繩이 만연히 퍼져있다. '인연'이란 연결이 이제는 흔전만전한 가치로 전락한 것은 아닐까 의심이 생길 정도다. 하나의 인연이 사랑이 되고 부모가 되어 늙어 부서지는 일은 예로부터 당연시 되었지만 절대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생의 순항이었다. 누구나 그런 삶에 몸을 싣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고, 그 안에서 희비를 온몸으로 받아치며 자식과 아내와 늙는 것은 고결한 의식이었다. 그리고 인연이 부모와 자식을 잇고, 타인과 나를 친구로 잇는 일은 연인의 그것만큼 빛나는 것이었다. 현재에 접어들기 전까지.
이제 우리는 너무도 쉽게 누군가를 만난다. 세상은 '연관성'이라는 일말에 실오라기를 희대의 키워드로 앞세워 마치 대단한 것인 양, 무한에 가까운 사람들을 연결하여 짜집는다.
페이스북, 카카오톡, 트위터, 인스타그램, 각종 연애 앱까지. '헨젤과 그레텔'이라는 오래된 동화의 주인공들처럼 우리가 웹과 모바일에 흘려 놓은 빵부스러기는 알고리즘이라는 이름이 되어 우리의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귀띔도 없이 나와 관련 있는 것들을 쉼 없이 나열하며 그곳에서 인연이라 부를 만한 것들을 찾아내라는 듯 강요한다. 아니 정확히는 강요보다는 권유고, 끝없는 제시로 인해 우리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인 양 받아들이게 되었다. 세상은 인연이라는 것을 끝없이 제시하는 장이 되어버렸다. 돌고 돌아 우연을 가장한 필연은 희미해지고, 온갖 경우의 수로 계산된 인연만이 만연하다.
사실 계산된 인연들이 아무리 우리 앞을 배회하며 흔해 빠진 가치로 전락했다고 한들, 우리의 마음에 동요가 일지 않는 한 흘러가는 물이며, 사라질 기우다. 되려 이 변화가 반가우면 반가웠지 부정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많아진 기회만큼 더 좋은 인연이 우리에게 닿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하지만 끝없이 깨어지고 떨어져 나간 인연을 쓸어 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런 과정을 자연스럽게 행하며 인연을 잇고 끊기를 반복한다.
적승赤繩이라 불리는 인연의 끈이 매번 인연과 함께 태어나는 순도 높은 것은 아닐 것이다. 뿌리에서 줄기를 키워 가지로 뻗어 나가는 나무의 성장을 닮았을 뿐이다. 그렇기에 뿌리에서 함께 커왔을 과거의 인연들은 하나하나가 단단하고 선명한 붉은 빛을 발했고 반면, 현대에 들어서며 점차 가지가 뻗어 나가기 시작한 인연의 끈은, 무수히 많아진 만큼 가늘어지고 쉽게 꺾이는 것이 되어 색이 바래고 말았다.
지나간 인연을 한恨처럼 속에 담고 생을 보내는 일만큼 무모한 것은 없으니 현대만의 인연에 대한 처우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차라리 나는 흔전만전하게 인연을 잇고 끊는 일을 반복하기보단 한번 한번의 인연을 극난하게 만나, 비극이 된다면 한恨으로 끌어안아 살고 싶다.
인연을 거꾸로 말하면 연인이 된다. 오래전부터 사랑을 약조한 남과 여를 하나로 묶어 전생에 수 십에 겁을 쌓아야만 이룰 수 있는 인연이라며, 생이 돌고 도는 시발점이 사랑에서 비롯된 인연임을 인정하는 의미로 오래전부터 사랑하는 연인에게 그 이름을 그대로 붙인 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는 여전히 사랑하는 사이에서 만큼은 몰랐던 유래를 자연스레 몸에 받아들이며 연인이라 자칭한다. 수많은 겁을 쌓아야만 연결되는 인연으로 사랑을 했다면 잊어서는 안되는 뜻임이 분명하다.
범접할 수 없는 것이라 숭배하듯 멀리 여기는 것도 안되지만, 예로부터 지키고자 마음먹지 않은 것들은 사라지기 일 쑤였다. 인연이란 가치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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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카레미치입니다. 삶과 사람의 틈새에 산란해 있는 사정을 추려 글을 쓰고 윤색潤色합니다. 땅에서 시작된 작은 생명이 수십억 인간의 삶이 되는 것에 경외심을 느껴 농산물을 소재로 글을 쓰기 시작했고, 수필 연재와 만났던 농민의 작물을 독자에게 연결해 전달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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