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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성배 Aug 06. 2021

입추立秋를 앞두고

절기가 남긴 지도를 따라

징그럽게도 더운 여름이었습니다. 웬만해서는 잘 나지 않던 땀이 올여름에는 가만히 있는데도 나더군요. 그런 와중에 소식은 있었지만, 좀처럼 구경하기 힘들었던 비는 여름을 더욱 덥게 만들었습니다. 남부 지방은 소식 때마다 비가 잘 내렸다고 하던데, 어째 제가 사는 인천에 들리는 소식은 매번 빗나가기만 하는지.. 매일매일이 쨍쨍한 햇볕과 더운 바람에 허덕이는 나날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래도 좋았던 것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었는데요. 옷차림에 있어서만큼은 이보다 더 편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이번 여름에는 상의와 하의가 한 세트로 나온 옷을 총 네 세트 사서 그걸 번갈아가며 입었거든요. 하얀색 두 벌과 검은색, 회색 각각 한 벌씩입니다. 패턴은 이랬습니다. 삼일을 번갈아가며 입다가 마지막 한 벌이 남았을 때, 삼 일째 되는 날 저녁에 세 벌 모두 손빨래를 한 뒤 건조대에 널어두고, 다음 날에 마지막으로 남은 한 벌을 입는 식이었습니다. 그날 저녁에 집에 돌아오면 전날 빨아둔 세 벌의 옷은 바짝 말라있고요. 그럼 다시 반복입니다. 올여름은 그렇게 몸을 가리고 다녔답니다.


여기까지 말하고 보니 꼭 여름이 다 끝난 듯 보이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오늘도 서울을 기준으로 낮 최고 기온이 34도에 달하고, 당분간은 이 같은 불볕더위가 계속될 거라는걸요. 그럼에도 제가 여름을 과거형으로 말하는 건, 아시다시피 내일은 '입추'이기 때문입니다. 입춘 입하 입추 입동 등은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절기인데요. 어느 계절에서 어느 계절이 된다는 명료한 '알림'같아서입니다. 그래서 매번 그런 절기가 가까워질수록 설렘 같은 것이 가슴 어딘가에 간수로 서서히 응고되는 두부처럼 끼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과거와는 사뭇 다른 기후를 보며 이제는 '입'자로 시작하는 절기의 날짜를 다시 손봐야 하는 거 아니냐고도 말하지만, 역시 저는 지금의 날짜를 유지하고 싶습니다. 가능한 한 스물네 개의 절기도 모두 그대로 두고 싶습니다. 2월 3일 입춘, 5월 5일 입하, 8월 7일 입추, 11월 7일 입동 등등 각 날짜의 새겨진 절기는 오래전부터 이날은 응당 그런 온도와 그런 날씨, 그런 낮의 길이와 밤의 길이가 있다는 오랜 기억이니까요. 그 기억을 잃고 싶지 않습니다. 또 잃지 않아야 우리가 살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요.


오래 아주 오래 기억하면서, 자연을 죽이다가 되레 자신을 죽이고 있는 우리가 다시 되돌려 놓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날에 있던 온도와 날씨, 계절을. 절기가 남긴 지도를 따라 언젠간 다시 돌아갈 수 있도록 우리는 절기를 그대로 두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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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배 田性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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