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쓰는 날에는 비가 내렸으면 했다. 그냥 비도 아니고 어는점에 가까운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길 바랐다. 기온이 너무 낮아 비가 중간에 눈으로 바뀌어 땅이 질척질척해지는 날이길 바랐고, 딱 그런 날에 그날따라 손님이 없는 카페에서 조용히 이 글을 써내리고 싶었다. 그리고 이 바람은 대부분 이뤄졌다. 11월의 마지막 날인 오늘 비가 내리고 있고, 다행스럽게도 바람이 불지 않아 작은 우산으로도 몸을 충분히 가리며 단골 카페로 올 수 있었다. 역시나 맑은 날에 비해 사람은 현저히 적었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기온이 영상 10도 가까이 올라 비를 얼리기에는 턱없다는 것뿐. 그 외 모든 조건은 완벽하게 충족되었다. 나는 이제 가만히 강경호 씨와 나눈 대화를 상기한다. 삶의 많은 부분을 제 손으로 직접 가꾸는 그와 삶의 어느 한 부분도 제 손을 다 쓰지 않는 나 사이에서 오간 대화는 지금 이 순간, 명확한 소리가 되어 내 귓가에 들려오고 있다. 비 내리는 날에는 소리의 크기가 더 커지는 특성이 지난 우리의 대화에까지 영향을 미쳐 기억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나는 그와 두 눈을 마주하고 있다. 우리의 대화를 활자로 새길 준비가 모두 끝났다.
전성배 안녕하세요. 농부님. 이제 조생귤 수확 시기라서 많이 바쁘실 텐데도 불구하고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울러 그런 시기에 무리하게 인터뷰 요청을 드려 죄송합니다.
강경호 아닙니다. 하루 종일 밭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요 뭐. 무엇보다 사전에 시간을 정해 인터뷰를 진행하는 것이니, 진득하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아 기대됩니다.
전성배 (웃으며) 오늘 인터뷰는 편안하게 대화를 나눈다고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전에 질문을 몇 개 드리기는 했지만, 정해진 질의응답만 나눠서는 농부님을 다 알 수 없을 것 같거든요. 사전에 드린 질문들 자체도 저희가 편하게 대화를 나눠야 보다 구체적이고 좋은 답이 나올 수 있게끔 만들어지기도 했고요. 자 그럼 제가 먼저 운을 떼겠습니다. 농부님의 '새가먹은감귤'이라는 브랜드명이 꽤나 재미있는데요. 애써 기른 감귤을 새가 쪼아먹었다고 하면 가슴이 쓰릴 것 같은데, 그것을 마케팅으로 풀어내신 게 인상적입니다.
강경호 지금 저희 귤밭을 바라보면서 작가님의 질문을 받고 있는데, 이 와중에도 귤나무 한 그루에 새가 열다섯 마리 정도 날아와서 귤을 쪼아먹고 있습니다.
전성배 한두 그루라면 모를까, 그런 나무가 수십 그루라면 손해가 꽤 클 것 같은데요?
강경호 아니라고 말하기는 어렵죠. 귤농사의 어려운 점 중 하나가 조수 피해이기도 하니까요. 그런데 그거 아시나요? 새들은 아무 귤이나 쪼아먹지 않아요. 새들이 쪼아 먹은 귤을 먹어보면 하나같이 당도가 높죠. 즉 맛있는 귤이기에 쪼아먹는 것입니다. "벌레 먹은 과일이 더 맛있다."라는 말도 있듯 새들도 아는 거죠. 그렇기에 우리 귤이 맛있는 걸 저 새들도 알고 날아와 먹는 거라 생각하면 마냥 쓰리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전성배 농부님 나이가 올해 서른아홉이라고 들었습니다. 생각보다 젊으신 나이에 놀랐는데요. 처음부터 농사를 지으셨던 걸까요?
강경호 아니요. 원래는 다른 일을 하다가 어머니의 귤농사를 물려받았습니다. 이걸 승계농이라고 하죠.
전성배 그렇다면 원래 직업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요.
강경호 원래 직업은 사회복지사였습니다. 5~6년간 그 직업을 유지해오다 그만두고는 목수로 또 수년간 일했죠.
전성배 복지사에서 목수라.. 두 직업은 조금의 연관성 없는 것 같은데, 어떻게 목수가 되신 걸까요?
강경호 한 가지 목표 때문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면 좀 길어지는데... (웃음)
전성배 저는 괜찮습니다.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강경호 목수 생활은 하나의 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로이드 칸의 '행복한 집구경'이라는 책인데요. 그 책을 보면서 저도 언젠간 제 집을 직접 짓고 살고 싶다고 생각했죠. 그때는 아내와 연애를 하던 시절이었는데, 아내에게 이 꿈을 이야기했더니 아내도 기꺼이 긍정해 주더군요. 그때부터는 둘의 꿈이 되었습니다. 집을 짓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우리가 자급자족할 수 있는 거는 자급자족하며 살자는 꿈도 그때 함께 꾸었습니다. 목수 일은 그 꿈으로 가기 위한 첫 번째 단계로써 시작한 거죠.
전성배 직접 집을 지어 살고 싶다는 바람은 저를 포함해 많은 분들이 한 번쯤은 가져보는 흔한 꿈인데요. 그것은 흔한 만큼 우리가 꾸는 숱한 꿈들 중에 가장 먼저 꿈으로 끝나버리는 환상에 가까운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농부님은 그 꿈을 직접 행동으로 옮기셨다니 대단합니다. 그럼 지금 살고 계시는 집이 혹시?
강경호 네. 지난 2018년에 아내와 저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완성한 집입니다.
전성배 역시나.. 부러운 것도 부러운 거지만, 그 용기와 추진력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 귤농사는 집을 지으면서 시작하게 되신 건가요?
강경호 맞습니다. 어차피 지을 집이라면 빨리 짓고 살자는 아내의 의견에 따라 2018년에 집을 짓기로 마음먹었고, 집터는 저의 고향인 제주도 성산읍 온평리로 결정했습니다. 저의 고향이면서 동시에 저희 어머니와 아버지의 고향이기도 한 곳인데요. 귤농부로 사는 것도 그때 함께 결정했습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운명처럼 보이기도 하네요. 부모님이 수십 년간 귤농사를 지었던 곳에서, 그것을 먹으며 커왔던 제가 다시 그 길을 걷는다는 게. 그리고 이제는 제 아이들이 저의 어릴 적 모습을 따라 이 귤밭을 누비고 있다는 게. 누대의 추억이 이 귵밭에 켜켜이 쌓여가고 있는 거죠. 운명이라는 말이 조금 낯간지럽지만, 이 말도 안 되는 시간을 표현하는 데 운명만큼 좋은 말도 없는 것 같습니다.
전성배 집을 짓고, 귤을 짓고, 아이를 짓는 농부님. 삶의 굵직굵직한 부분들은 하나같이 제 손으로 직접 가꾸고 계시네요. 그나저나 본격적인 농장 경영은 2018년부터 시작했다고 하셔서 처음에는 보통의 초보 농부이실 거라 생각했지만, 어릴 적부터 아버지와 어머니를 통해 어떠한 형태로든 귤과 함께하셨다면, 그 경험은 이미 초보 농부란 호칭을 아득히 뛰어넘을 것 같습니다. 초보 농부임에도 그 어렵고 불편한 무농약 농법으로 귤을 지으실 수 있었던 건 이유가 있었군요.
강경호 꾸준히 공부도 했고, 오랫동안 귤을 봐왔던 경험도 있으니 가능했습니다. 그보다 앞서 제 아이들이 귵밭에서 마음껏 뛰놀며 귤을 따먹었으면 하는 바람이 원동력이 되기도 했고요. 지금은 제주도 친환경 감귤 연구회에 소속되어, 다른 친환경 농가들과 함께 지속적으로 친환경 농법 발전을 위해 더 많이 공부하고, 실험하고 있습니다.
전성배 구체적으로 어떤 공부를 하고 계시나요?
강경호 친환경 무농약 농법으로 하는 귤농사는 농약을 쓰는 일반적인 '관행농'에 비해 수세 관리와 당산 관리가 어렵습니다. 아무래도 농약은 일체 사용하지 않고, 화학비료조차도 최소한만 사용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친환경 농가가 함께 모여 고민하고 공부합니다. 어떻게 하면 수세 관리를 더 잘할 수 있는지, 당도와 산도 모두 적절하게 갖춘 귤을 동시에 적당한 사이즈의 귤을 어떻게 더 많이 생산할 수 있을지, 판로는 또 어떻게 확보할지 등등을.
전성배 그 어려운 길을 땅과 아이들을 위해 기꺼이 가시는군요. 그래도 부모님 때부터 지금의 농법을 유지해오신 거라면 노하우도 많이 쌓였을 것 같습니다.
강경호 사실 부모님 때까지는 관행농이었습니다. 제가 귤농사를 이어받으면서 무농약 농법으로 전면 수정한 거죠. 깊은 고민 끝에 결정한 일인 만큼 후폭풍도 만만치 않았답니다.
전성배 (놀라며) 예를 들면요?
강경호 무농약 농법으로 전환하면서 기존에 거래하던 소비자분들 대부분을 잃었거든요. 가장 큰 이유는 이전과 크게 달라진 가격 때문에 기존 소비자분들의 반감을 산 거죠. 무농약 농법을 하면서 저희 귤밭은 깨끗한 곳에서만 서식한다는 멸종 위기 야생 동물 2급 맹꽁이를 비롯해, 각종 새들과 무당벌레, 개미귀신 등등이 찾아와 보금자리를 꾸리는 작은 생태계가 되었습니다. 이는 자연 친화적으로 농사를 짓고 있다는 방증이지만, 동시에 상품화할 수 있는 귤의 수량은 적고, 농사를 짓는데 필요한 일손과 비용은 많이 든다는 것을 의미하죠. 당연히 부모님 때의 관행농에 비해 귤 가격이 높을 수밖에 없었답니다. 하지만 그렇게 1년 2년 열심히 농사를 짓다 보니, 이제는 이 귤맛과 이 노력을 알아보시는 소비자분들을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다행이죠.
전성배 지금의 소비자분들은 이런 농부님의 철학을 응원하고 함께하시는 분들이겠군요.
강경호 그렇죠. 가끔씩 농사일이 버거워 푸념 아닌 푸념을 뱉을 땐 힘이 되어주시기도 합니다. 가장 기억에 남은 힘은 이거였어요. "농부님. 이 정도 맛이면 충분히 자부심을 가지셔도 돼요." 기존 관행농을 엎고 친환경 농법으로 바꾼 뒤 언젠가 스스로를 의심하고 있을 때 이 문장을 받았습니다. "맛있다" "괜찮다"라는 말도 물론 큰 힘이 되지만, 그 문장은 제게 유독 더 큰 힘을 주었답니다.
전성배 이렇게 들으니 농부님의 귤맛이 더욱 궁금해지는데요. 저도 빨리 농부님의 귤을 먹어봐야겠습니다. 그럼 끝으로 하나만 더 질문드리겠습니다. 농부님의 귤맛은 농법 그 하나에 기인하는 걸까요?
강경호 물론 아닙니다. 부모님 때부터 이어져온 저희 귤밭 자체의 특질도 귤맛에 큰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저희 귤밭은 '빌레'라고 하는 돌이 넓고 평평하게 들판처럼 펼쳐진 곳에 있습니다. 이곳에 심어진 귤나무는 돌밭이다 보니 뿌리를 내리기가 녹록지 않은데요. 그럼에도 귤나무는 어떻게든 뿌리를 내려 양분과 수분을 찾아야 하기에 다른 땅에 심어진 귤나무보다 더 깊게, 힘있게 뿌리를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에 성산은 비가 많이 내려서 수분 관리를 잘못하면 귤의 당도가 쉽게 떨어지는데, 돌밭이라 비가 많이 내려도 물이 잘 고이지 않으니 당도 높은 귤이 더 잘 출현할 수밖에요.
저희 귤맛은 이런 자연적 조건과 저의 소신의 합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음 날 그에게 주문한 귤이 도착했다. 박스를 열었을 때 갓딴 햇귤만이 가진 특유의 싱그러움이 물씬 풍겨 나와 나는 귤을 소쿠리에 옮기는 것도 잊고 얼마간 만지작거렸다. 올해의 첫 번째 조생귤이라는 버프도 모자라 강경호의 귤이라고 하니 귤을 정리하는 시간이 조금 더 뒤로 미뤄졌다. 그러다 문득 강경호 씨와의 대화를 다시 한번 떠올렸고, 그러고 있으니 꼭 박스에 귤만 담겨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의 지난했던 3년이, 그가 땅과 아이에게 말하는 사랑이, 앞으로 아내와 함께할 지난한 세월의 예고편이 함께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예고편에서도 그는 역시나 지난 삶처럼 어렵고 고된 길을 걸어가고 있다. 묵묵하게 걸어가는 날이 있는가 하면 푸념하며 잠시 걸음을 멈추는 날도 보인다. 이윽고 수십 년의 세월을 꾹꾹 눌러 담은 것도 모자라 앞으로의 수십 년도 꾹꾹 눌러 담아낼 귵밭과 그곳에 날아든 새와 그곳을 뛰노는 아이들을 보며, 몇 번이고 다시 어깨를 펴고 미소를 짓는 그가 보인다. 푸념하는 '그'보다 그렇게 미소 짓는 그가 예고편 분량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나는 앞으로도 그가 이 삶을 꾸준히 이어가길 바란다. 그에게 조금 가혹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이 귤의 맛을 보니 조금 가혹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좋은 귤맛을 매년 사람들에게 선보이려면 그의 고생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예고편 속 웃고 있는 그도 이 고생을 기뻐하는 듯 보인다. 나는 우리는 그저 그 귤맛을 양껏 즐기기만 하면 될 것 같다. 안심하면서. 사랑스러워하면서.
2021 . 11 . 30
전성배田性培 : 1991년에 태어났다. [격간隔刊 전성배 산문]의 발행인이며, 농산물을 이야기하고 농부를 인터뷰한다. 농업계 이슈에 관심이 많고, 여러 주제로 글을 쓰지만 대부분 삶의 테두리 안에 머문다. 지은 책으로 <계절을 팔고 있습니다>가 있다. 계속해서 우리나라 농부에게 도움이 될 글을 쓰는 것과 더불어 문학적으로 완성도 있는 글을 쓰는 것이 목표이다.
aq137ok@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