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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성배 Jan 27. 2023

독자를 기만하는 작가

글을 쓴 지 좀 됐습니다. 일도 이만큼 하면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라도 결국 몸에 배기 마련인데, 운동도 자꾸 하면 늘기 마련인데, 제 글은 도무지 눈에 띄게 느는 법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답보 상태는 또 아니니, 지금은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걸음이 그저 다행이라고 자위하며 살고 있습니다. 글솜씨는 내내 시야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편 기똥차게 느는 것도 있기는 합니다. 이번에는 그것에 관해 말하려고 합니다. 바로 거짓말과 허영심입니다. 저의 글은 자주 없는 얘길 더하고 이따금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로 쓰이기도 합니다. 허영은 또 어떻고요. 주제넘는 문장을 떠올려 무례한 결말을 도출하는 거만을 자주 부립니다. 그야말로 기만이겠지요.


불과 며칠 전에도 저는 또 거짓말을 했고,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이번에는 기만을 당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비공개 매체에 조용히 쓰인 글이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한 번 이실직고해 봅니다. 거기서 저는 한 사람이 영위하는 공간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 공간은 집일 수도 있고, 그 안의 작은 방 하나일 수도 있고, 카페와 식당, 사무실 같은 공공장소일 수도 있지만, 여기서 제가 말하는 공간은 명확한 주인을 두고, 내내 주인과 동고동락하는 곳을 말합니다. 그런 공간이야말로 주인을 닮을 수 있고, 누군가에게 대신해 설명할 수도 있죠.


글에는 한 여자가 나왔습니다. 이십 대 초반의 어린 여성으로, 오랫동안 자취를 했습니다. 그런 여자를 어떤 남자가 만났고, 남자와 여자의 사랑은 주로 여자의 자취방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여자를 만나는 동안 남자는 자신의 집보다 여자의 집에서 자는 날이 더 많았고, 그만큼 여자의 취향과 버릇 등을 눈으로 오래 보았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방법은 본인의 설명도, 타인의 귀띔도 아닌 직접 보는 것인데요. 그런 의미로 남자는 여자를 사랑하는 동안 여자를 누구보다 잘 알 수 있는 기회가 무수히 많았습니다. 그러나 남자는 몰랐습니다. 잘 알 수 있는 기회 앞에 섹스와 편함과 익숙함에 눈이 돌아 막연하게 시간을 보낼 뿐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결말은 결국 남자의 무심함과 여자의 서운함으로 남자가 차이며 끝이 났습니다. 여기까지 저의 이야기였고, 진실입니다. 이어질 내용도 아직 진실에 가까우니 조금 더 들어 주세요.


헤어진 시간을 만난 시간만큼 보낼 무렵이었습니다. 일 년을 넘게 만났으니 헤어진 시간도 꽤 되었지요. 어느 날 우연히 두 사람은 만났습니다. 정확히는 남자가 걸음을 돌렸기에 가능했던 우연이었습니다. 여자의 자취방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고, 사실 남자의 본가도 거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습니다. 동네의 인식을 조금만 확장하면 두 사람은 만나서도 헤어져서도 한동네 사람이나 다름없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일 년이 넘게 두 사람이 마주치지 않았던 건 남자가 굳이 먼 길을 돌았기 때문입니다. 차인 남자는 미련이 아주 오래 남는 법이지 않습니까. 그 미련은 주체가 되는 이를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속을 메스껍게 하고 눈물을 핑 돌게 하니, 남자는 최대한 여자를 피하며 살았습니다. 재주 좋게 그사이에 어떤 여인을 새로 만나기도 했지만, 그 인연은 그리 길게 가지 못했다는 여담입니다. 다시 혼자가 되고 수개월을 보냈을 때쯤에 남자는 미련이 잠잠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제는 그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건강은 한지, 내내 평안했는지 안부를 알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죠. 쪼그라든 미련을 들고 남자는 이제 더 이상 돌아 걷지 않기로 했습니다. “우연히 마주치면 인사라도 할 수 있기를.” 그 마음으로 일상을 살아갔고, 어느 날 그렇게 두 사람은 마주친 것입니다. 마음에 준비를 해 두었음에도 남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반면 여인의 표정은 반가워 보이는 듯했습니다. 잘 지내냐고. 종종 너를 떠올렸으나 소식을 묻고 싶을 만큼 간절하지는 않았다고. 그런데 이렇게 보니 간절하지 않았던 게 아닌 것 같다고. 여자는 말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두 사람은 며칠 뒤 저녁에 사랑할 당시 자주 가던 이자카야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습니다.


약속의 날, 두 사람은 말쑥한 모습으로 만났습니다. 동네 술집에서 만난 것치고는 결코 가볍지 않은 차림. 두 사람은 서로 말은 안했지만 이날을 꽤나 고대했던 모양입니다. 맥주 두 병과 소주 한 병을 비우는 내내 그간 쌓인 이야기가 오고 갔고, 두 번째 소주를 시켜서 마실 땐 조금씩 말수가 줄더니 반 병을 남겼을 땐 침묵만이 맴돌았습니다. 남자가 여자의 술잔과 자신의 술잔을 차례로 채우고 나면, 둘은 가만히 술잔을 응시하다가 여자가 먼저 마시면 남자가 뒤따라 마시는. 그걸 두어 번 반복하니 남은 술은 더 이상 없었습니다.


“이제 그만 일어나자.” 남자가 먼저 침묵을 깨며 짧게 말했고,

“응” 여자가 대답습니다. 그리고 다시 침묵.


가게에서 여자의 집까지 고작 몇 분이면 가는 거리를 몇 배로 늘리며 두 사람은 걸었습니다. 집 앞에 도착해 여자가 먼저 용기를 내는 동안에도 침묵은 끝날 줄 몰랐습니다. 그저 여자가 뒤를 돌며 남자의 오른 손목을 잡아 이끄는 모습에 남자가 행여 여자가 혼자만 용기를 냈다고 착각할까, 서둘러 손바닥을 뒤집어 여자의 손을 잡고 함께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여기까지가 진실이었습니다. 이다음에 이어지는 글에서는 이렇게 하룻밤을 보낸 남자가 오랜만에 여자의 집에서 눈을 떴을 때, 그제야 눈에 들어오는 여자의 버릇과 취향들을 보며 통감한다고 말했지만 그건 거짓이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재회에 성공. 얼마간 다시 사랑을 하다가 이번에는 미련 없이 헤어졌다고 말했지만, 이 또한 거짓이었습니다. 집 곳곳에 있던 여자의 모습들을 상기한 것은 맞지만 그뿐. 사실 여자에게는 다른 남자가 있었거든요.


남자는 그날 아침, 그 방이 내내 여자를 설명해 주고 있었다는 걸 깨달으며 여자에게 다시 기회를 달라고 말했지만, 여자는 거절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미 늦었다고. 우리 어젯밤은 조용히 묻자고. 다만 후회하지 않는다고도 말했습니다. 술기운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기에. 이미 자신은 너를 만나기 전부터 마지막으로 한 번은 너와 밤을 함께 보내고 싶었다고.


두 사람은 그날 아침을 마지막으로 다시 한참을 모르고 지내다가, 몇 번 마추진 걸 끝으로 완전히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저는 독자를 기만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아니 내내 거짓과 허영으로 거만하게 글을 썼으니 명백한 독자 기만을 자주 저지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죄송하게도 저는 계속해서 독자를 기만해야겠습니다. 진실에 거짓을 더하거나 때론 거짓으로만 쓰는 한이 있더라도. 그래야만 어떤 문장을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글이란 그게 소설이든 시든 수필이든 논평이든 결국 하나의 문장을 전하기 위한 수단이지 않습니까. 작가는 자신이 끝없이 사유한 끝에 도출한 하나의 문장을 독자에게 전하기 위해 픽션과 논픽션을 오가며 글을 쓰는 존재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진실과 거짓이 섞이더라도. 때로는 모든 글이 거짓으로 쓰이더라도. 이 모두가 반드시 전해야 할 문장을 위한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위에 쓰인 글에서 전하고 싶었던 문장은 “그 사람의 공간만큼 그 사람을 잘 설명할 수 있는 건 없다. 따라서 한 사람의 공간에 초대받는다는 건, “이 사람이 내게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자신을 알려 주려는 거구나”라며, 성실히 그의 공간을 보고 듣고 알아내야 한다.”였습니다.



전성배가 만난 농부의 이야기

[땅과 붙어사는 말]

※ 아래 링크에서 농부님들의 인터뷰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litt.ly/aq137ok




전성배田性培 : 1991년 여름에 태어났다. 지은 책으로는 『계절을 팔고 있습니다』 『너와 나의 야자 시간』 이  있다. 생生이 격동하는 시기에 태어나 그런지 몰라도 땅과 붙어사는 농부와 농산물에 지대한 사랑을 갖고 있다. 농부와 농산물을 주로 이야기하고, 삶에 산재한 상념을 가끔 이야기한다. 생生의 목표는 손가락이 움직이는 한 계속해서 농가를 위해 농부와 대화하고 그들의 농산물을 알리는 것이다. 그 글은 주로 밤이 비유하는 죽음의 위에서 쓰일 것이다. 조금 더 바라도 된다면 농부가 아닌 사람의 이야기도 쓰고 싶다. 당신일 수도 나일 수도 있는.


aq137ok@naver.com

https://litt.ly/aq137ok :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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