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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성배 Jan 30. 2023

음악으로 그림으로, 박준과 이슬아로 살고 싶다.

음악으로, 그림으로 살고 싶다. 나와 생을 나란히 하는 글은 말할 것도 없다. 나지막한 곳에서 흐르는, 취향을 타지 않는 유려한 곡선의 선율처럼 잔잔히 사랑받으며 살고 싶다. 선홍색, 황색, 청색, 보라색, 감청색 등등 헤아릴 수 없는 무수의 색들이 점차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노을 그림처럼 살고 싶다. 누구든 순식간에 매료시켜 걸음을 멈추게 하고, 그게 무엇이든 모조리 물들이지만 그것마저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이런 음악과 그림으로 산다는 건 절대적인 사랑의 대상으로 사는 삶일 것이다. 박준 시인의 짧지만 아주 긴 의미를 지닌 문장처럼, 대화는 짧지만 사유는 긴 사람으로 살고 싶다. 이슬아 작가 특유의 섬세하며 강단 있는 그러면서도 여전히 사랑스러운 문장을 닮아, 독자가 몹시 기다리는 작가로 살고 싶다. 두 작가의 문장처럼 산다는 건 음악과 그림에 이어 또 한 번 다수의 사랑의 대상으로 사는 삶일 것이다. 참고로 이슬아 작가의 문장으로 산다는 건 여기에 더해 나조차도 나를 사랑의 대상으로 삼는 삶일 것이다.


열거한 창작 분야만큼 작품들도 각양각색으로 말했지만, 결국 나는 사랑받는 삶을 표방한다. 가까운 친구라고 해 봐야 두세 명 정도고, 사랑하는 여인까지 포함해도 한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의 작은 인간관계를 가진 나는 이 삶을 자의로 이뤄냈다. 다수와 쌓는 인간관계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실상은 어려움을 핑계로 게으름을 숨기는 거지만. 그래, 이제 와 무엇을 숨기랴.


인간을 향한 나의 게으름은 언제 시작되었을까. 종종 자문한다. 고교 시절과 풋내가 가시지 않은 이십 대 초중반, 애와 어른의 경계를 모호하게 밟는 이십 대 후반과 이제는 어른이어야 할 삼십 대 초반의 지금까지. 나는 내내 게을렀고, 그러는 동안에도 글은 나와 동행하고 있었다. 글과 게으름은 나조차도 효시를 알 수 없는 것인 것이다. 다만 짐작건대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던 시기가 인간관계가 나빠졌던 시기와 맞물리지 않을까 싶다. 그 시절에 나는 사람을 만나길 꺼려 했다. 글은 쓸수록 는다는 누군가의 말을 맹신했기 때문이다. 과일 장사는 하루 열세 시간 이상의 강도 높은 노동이라 이를 영위하며 글쓰기를 늘리려면 반드시 무언가를 표기해야만 했고, 당시 나는 인간관계를 선택했다. 누군가를 만나지 않는다면 시간은 물론이고 감정까지 아낄 수 있을 터, 그 시간과 감정으로 더 많은 글을 쓸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런 만큼 손에도 굳은살이 배겨, 아주 오래 골몰해야 겨우 쓸 수 있던 미숙함도 무르익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삶은 지독히도 외로워졌다. 가장 큰 걸 포기하면서까지 썼던 글은 시간이 지나도 정체를 면치 못했다.


게을렀기에. 한편으론 사람과 글쓰기를 저울질하는 무례한 짓을 범하고, 글쓰기에서는 독서를 간과했기 때문이다. 쓰는 사람이라면 응당 읽을 줄도 알아야 하건만 그저 쓰기만 했으니 배움 없는 글이 나아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무례한 짓을 하는 이를 지인으로, 친구로 두는 인간은 어디에도 없으니 외로움은 당연했다. 그리하여 나는 글을 쓸 줄 모르는 작가이며 두세 명의 친구와 사랑하는 여인을 두고도 외로운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내가 진정 걱정하는 것은 외로운 사람만큼은 영영 면치 못할 것 같다는 사실이다.


나의 글쓰기를 자신한다기보다는 세상의 이치가 그렇다. 정녕 내가 배움 없이 글을 쓰긴 했지만, 글을 쓰는 법은 아는 사람이지 않던가. 학생으로 말하면 적어도 공부는 할 줄 아는 놈은 되었다. 배움만 있다면 그 배움에 성실히 임하기만 한다면 글쓰기 또한 공부와 진배없어 기어이 늘 것이다. 박준 시인과 이슬아 작가처럼 긴 사유를 남기거나 사랑스러움을 보여주지는 못할지언정 나만의 모습으로 어떤 독자에겐 사랑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 글로는.


글로는 사랑받을 수 있겠으나 나 자체는 사랑받을 수 없을 것 같다. 종종 나는 여인에게 감히 이런 말을 한다. 나는 너를 만나서도 외롭다. 이 외로움은 본능적인 듯하다. 그것은 새로운 이와의 사랑이나 섹스를 갈망하는 것이 아니다. 그야말로 너에게 있는 친구가 없어 외롭다. 사실 나의 친구들 또한 결국 네가 있어 만날 수 있는 인연이지 않던가. 나는 정말 아무도 없다. 너를 더 잘 사랑하고 싶어 의논할 친구가 없고, 너에게 말할 수 없는 말을 나눌 친구가 없고, 그러면 안 되나 만에 하나 네가 내게서 없어진다면, 이 슬픔을 나눌 친구가 없다.


게으름을 버리고 이제는 사람과 만나고자 했으나 시간이 너무 늦어버린 것 같다. “중학교, 고등학교 친구야말로 평생 가는 친구다.”라는 말이 있다. “사회 친구는 결국 경쟁 속에서 만났기에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에 만난 친구만큼 가까워지기는 어렵다.”라는 말이 앞 문장에 힘을 보태며 공존하는 중이다. 나는 이 말이 몹시 두렵다. 진정 사실일까 봐. 이제는 진짜 늦어버린 걸까 봐. 이 삶을 자초한 내가 몹시 밉다. 그저 제 좋은 거만 하려다 나를 지켜줄 수 있는 이 하나 두지 못한 것이 밉다.


음악으로 그림으로 살고 싶다. 가능하다면 역시 박준 시인과 이슬아 작가의 문장으로 살고 싶다. 두 사람의 문장에는 늘 내가 그토록 부러워하는 친구가 몇 있기에. 아직 늦지 않았다고, 어린 시절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는 말에도 예외는 있다고 누군가 말해주면 좋겠다. 외로움을 면할 수 있다고 말해주면 좋겠다. 나는 사랑받고 싶다.



전성배가 만난 농부의 이야기

[땅과 붙어사는 말]

※ 아래 링크에서 농부님들의 인터뷰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litt.ly/aq137ok




전성배田性培 : 1991년 여름에 태어났다. 지은 책으로는 『계절을 팔고 있습니다』 『너와 나의 야자 시간』 이  있다. 생生이 격동하는 시기에 태어나 그런지 몰라도 땅과 붙어사는 농부와 농산물에 지대한 사랑을 갖고 있다. 농부와 농산물을 주로 이야기하고, 삶에 산재한 상념을 가끔 이야기한다. 생生의 목표는 손가락이 움직이는 한 계속해서 농가를 위해 농부와 대화하고 그들의 농산물을 알리는 것이다. 그 글은 주로 밤이 비유하는 죽음의 위에서 쓰일 것이다. 조금 더 바라도 된다면 농부가 아닌 사람의 이야기도 쓰고 싶다. 당신일 수도 나일 수도 있는.


aq137ok@naver.com

https://litt.ly/aq137ok :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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