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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성배 Apr 16. 2023

꽃의 쓸모를 모르던 날

최근 꽃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과일, 채소 같은 농산물과 꽃은 분명 같으면서도 쓰임새는 극단적으로 다르죠. 땅에 뿌리를 박고 농부의 손에서 자란다는 점에서는 농산물과 하등 다를 게 없지만, 쓸모에 있어서는 기실 꽃은 농산물에 비할 수 없습니다. 그 자라는 방식에 의해 농산물이라는 총칭으로 묶여는 있지만, 먹을 수 없으므로 우리에게 꽃은 간절해질 수 없죠. 일생을 쓸모에 대해 계속해서 질문받아야 하는 게 꽃의 처지입니다. 물론 식용 꽃도 있지만 그마저도 사실 관상용과 크게 다를 바 없을뿐더러 여기서는 논외이니 차치해 두겠습니다.


과일과 채소, 곡식 등을 묶어 말하는 농산물은 동시에 ‘먹거리’라는 말로 바꿔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을 먹으며 생을 얼마간 연장하고 다시 이들, 농산물을 기르는데요. 모두가 농산물을 기를 수 없으니 정확히는 보통의 우리가 농부에게 그 역할을 위임하고 있습니다. 이 순환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습니다. 유랑하던 인류를 정착할 수 있게 한 농업 시대부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상 인류는 탄생과 동시에 이 순환을 시작했어요. 단지 농업을 본격화했을 때처럼 우리가 직접 기른 걸 먹지 않았을 뿐. 그야말로 땅이 다 길러낸 것들을 발견해 먹으며 순환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꽃은 이때도 무용했어요.


이 아득한 시간까지 거슬러 올라가도 꽃은 달리 쓸모를 찾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감사와 위안, 사랑의 표시 혹은 장식을 위해 꽃을 쓰는 문화가 어쩌면 꽃의 역사 중 가장 뚜렷한 목적을 띠고 쓰이는 시기일지도 모릅니다. 이토록 꽃을 나누는 일이 당연한 역사는 또 없을 거예요. 하지만 그 쓰임새 또한 간절해지는 영역은 아닙니다. 그건 생존의 영역이니까요. 먹거리로 불릴 수 있는 농산물이 간절해질 수 있는 건 다시 말하지만 우리를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건 결코 꽃이 닿을 수 없는. 요행으로만 겨우 우리를 만나는 꽃은 감히 꿈꿔 볼 수 없는 영역입니다.


잔인한 말이지만 그렇기에 저의 글에서 꽃은 단 한 번도 전제될 수 없었습니다. 물가 상승, 기후 변화, 자연 재해 등등 다양한 일들로 고통하는 농업계의 이야기를 대변할 때도, 농부들의 이야기를 할 때도 제 안중에 꽃은 문장이 될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저 덧없이 아름다운 것. 사는 일에 그다지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는 ‘기분’ 정도나 겨우 만족시키는 무용한 것이라고 취급했습니다. 먹거리 농산물을 기르는 농부들처럼 사력을 다해 꽃을 기르는 화훼 농부들의 얼굴을 알면서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압니다. 그 ‘기분’이란 게 얼마나 중요한지. 그걸 만족시키는 꽃은 얼마나 위대한지. 이제는 기분을 내기 위해 꽃을 사고 건넵니다. 고작 꽃 몇 송이가, 주는 이와 받는 이 둘을 한번에 기쁘게 하는 일이 이제는 기적처럼 느껴집니다.


그 이야기를 아래에서 들려 드릴게요. 이 글은 꽃을 향한, 꽃을 기르는 농가를 향한 속죄 같은 글입니다. 이렇게 말하니 꼭 대단히 거창한 글처럼 보이지만 내실은 시시한 글입니다. “오늘날 꽃의 쓰임새는 평범한 듯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라는 진실의 방증으로 삼아 주십시오.


꽃 피는 봄입니다. 속죄하기에 좋은 날입니다.



"한순간의 기쁨을 끝으로 폐기되는 꽃들을 보면 그녀가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https://naver.me/GPFo5FYR


전성배田性培 : 1991년 여름에 태어났다. 지은 책으로는 『계절을 팔고 있습니다』 『너와 나의 야자 시간』 이  있다. 생生이 격동하는 시기에 태어나 그런지 땅과 붙어사는 농부와 농산물에 지대한 사랑을 갖고 있다.


aq137ok@naver.com

https://litt.ly/aq137ok :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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