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색의 철쭉이 질서 없이 펴 있는 곳. 사람 한 명이 꾸준히 드나들어 풀이 그 자리에 그대로 누워버린. 길을 따라 들어가면 있는 작은 봉분 하나. 우뚠 선 버드 나무의 가지가 만든 빈틈 많은 그늘의 그림자로 얼룬 진 무덤. 나는 그곳에 묻혔다.
살아생전 젊은 시절에는 시장에서 요란스레 살았다. 사계절을 내내 밖에 서서 온갖 과일의 이름을 외치며 오늘 떼온 과일을 모두 팔기 위해 안간힘이었다. 모든 과일이 그렇지는 않았으나 어찌 됐든 생물이므로 그날 떼온 과일은 모두 그날 털어야했기에. 그야말로 하루살이. 나는 매일 하루만큼의 생을 그날 들어온 과일과 함께한 것이다. 매일 새로 태어나 죽기를 반복하는 사이, 생을 거슬러 이어졌던 건 ‘인연’이었다. 골드키위를 더 좋아하지만 매번 비싸다며 그린키위를 사서 소화제 삼아 먹던 할머니, 한국에 일하러 와 본국으로 돌아가는 게 꿈이었으나 결국 한국 남자를 만나 이 땅에 정착한 여자, 나이 어린 남편에서 얼마 가지 않아 아빠가 된 남자까지. 몇 년을 한 자리에서 장사를 하는 동안 꾸준히 가게를 찾아와 준 사람들의 생은 내가 과일과 매일 죽는 사이에도 계속되었다.
시간이 지나 이제 나는 사람들에게서 숨기로 한다. 컴퓨터 화면의 뒷편으로. 그맘때 나의 글쓰기에 대한 집념은 결국 집착으로 승화한다. 글을 써서 먹고산다는 원대한 계획보다는 그저 글을 계속 쓰고 싶다는, 어린 아이의 맹목적인 그것과 같은 것을 갖고 동시에 인터넷 과일 판매에 뛰어든다. 글만 쓰고 싶었지만 먹고사는 건 현실이니까. 장사에 어울리지 않는 줄글을 과일과 함께 내걸고 팔았다. 신선도와 맛이 구매의 전부였던 시장에서 글과 과일의 조합은 안 봐도 비디오. 장사에 방해가 되면 되었지 도움은 되지 못했던 듯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에 단 몇 만원이라도 벌어내는 요행 덕분에 나의 집착은 계속될 수 있었다.
때가 되면 각지를 내려가 농가를 찾고, 농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일은 인터넷 과일 장사의 숙명이었고, 그건 이 일을 하는 동안 내가 가장 행복해 던 작업이었다. 대부분의 장사꾼이 과일의 품질과 가격 협상을 목적으로 농부를 만나는 사이, 나는 농부의 목소리와 얼굴을 더 많이 보았다. 장사꾼이라면 터무니없는 일. 어쩌면 나는 과일을 핑계로 일면식 하나 없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이 일을 하는 진짜 이유인 양. 앉은 자리에서만 몇 시간이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건 할머니의 이야기가 세상에 전부였던 아이의 마음처럼 설레였고, 집으로 돌아가 영원히 글로 남길 생각에 또 설레였다.
지금 생각해도 타인의 역사를 눈앞에서 듣는다는 건 유튜브나 책으로 접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그야말로 ‘생생한’ 이야기다. 생이 아주 생생하다 못해 거대한 벽을 이루다 내게로 기울어지는 듯함 경외감. 그러나 이내 스러져 흩어지는 가루로, 물방울로 변하여 피부에 스미는 감각이었다. 그런 작업을 적어도 굶지는 않고 할 수 있었음에, 그리하여 오래할 수 있었음에 나는 행복했던 것이다.
서른 중반에는 서울의 작은 인쇄 회사에서 일을 한다. 인쇄 회사에 들어간 이유는 내 이름의 책을 내 출판사로 내고 싶어서였다. 글을 쓰며 과일을 파는 동안 운이 좋게 큰 출판사에서 출간 제의를 받았다. 내가 사랑한 작가들의 시작이 그렇듯 나도 자리에서 묵묵히 글을 쓰던 어느 날 파주에 있는 한 대형 출판사의 편집자의 눈에 든 것이다. 연락이 닿은 동시에 만남은 순식간에 성사되었다. 생이 가장 활발하던 여름, 서울 합정역 앞 할리스에서 편집자와 나는 서로 다른 목적을 갖고 만난다. 그녀는 나를 세상에 꺼내기 위해. 나는 무산될 것을 각오하고 솔직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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