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는 그 봄의 꽃을 사랑했다.
#마흔여덟 번째 글
겨울과 여름은 주연, 봄과 가을은 조연
봄은 말했다. "나를 언제까지고 그리워해 주길 바라네" 그는 말없이 그 봄을 가만히 담아두었다.
"우리나라의 강점은 사계절의 구분이 뚜렷하다는 거예요" 10년 전까지만 해도 책 속에 등장했던 말이다. (졸업한 이후로 교과서를 본 적이 없으니..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젠 그 장점은 무색해진지 오랜 듯하다. 계절의 구분은 모호해지고, 편차가 극심해졌다. 이미 계절은 겨울과 여름이 주가 되어 가을과 봄을 들러리로 쓰고 있는 중이다.
아쉽기 그지없다. 하늘은 높고 노을이 유혹하던 가을에는 그리 활기찬 학교의 운동장에도 쓸쓸함을 내렸다. 봄은 슬픈 이를 단 하나도 그냥 두지 않으려는 듯, 매일매일 새로운 꽃을 피웠고, 피운 꽃을 힘차게 흩뿌렸다. 쓸쓸해 말라는 위로와 함께.
그중 봄을 좋아했다. 정확히는 그 봄의 꽃을 사랑했다.
꽃이 아름다우니 열매마저 보드랍구나
봄은 그 계절이 짧은 만큼 가장 찰나에 찬란하다. 사계절을 통틀어 가장 화려한 색으로 겨울에 잠든 세상을 넌지시 깨운다. 그중에서도 벚꽃과 매화, 살구꽃은 비슷한 생김새로 가장 아득한 자태를 뽐내는데, 지고 나서도 열매로 자신을 남겨둔다. 그 모습이 어찌나 보기 좋은지.
벚꽃은 버찌를, 매화는 매실, 살구꽃은 4월에 피고 져 살구를 맺는다. 이 모두가 최대한 오래, 봄을 그리워하라는 듯 아득히 피고 진다.
세 개의 꽃 중 가장 가녀린 열매를 맺는 것은 살구꽃이다. 핵과(核果)인 황색의 살구에는 융모(絨毛)라 하여 작고 가는 털이 자라 있는데, 이것이 마치 살구를 작디작은 아이의 볼을 만지듯 부드럽게 만든다. 반으로 쪼개면 행인(杏仁)이라 불리는 씨와 살이 쉽게 분리되며, 보드라운 표면과 살은 자두와 매실과 달리 고집이 없어 '가녀리다'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린다.
빛 좋은 개살구
의외로 살구와 개살구가 같은 열매라 생각하는 이가 많다. 하지만 둘은 생김새만 비슷할 뿐 다른 맛을 내는데, 일각에서는 이 부분에서 '빛 좋은 개살구'라는 말이 태어났다고 한다. 과거 사람들은 비슷한 생김새를 가졌으니 개살구도 살구처럼 좋은 맛을 내리라 기대하며 먹었지만, 실제로는 신맛과 떫은맛이 강해 쉽게 먹을 수 없었고, 당시 사람들은 그 경험을 살려 보기에만 좋지 속은 그렇지 않다 뜻으로 "빛 좋은 개살구다"라 말했다고 한다.
수입산이 더 맛있다?
중국이 원산지인 살구는 이미 오래전에 우리나라에 들어왔지만, 과수원 재배가 본격화된 것은 1970년대 초부터 이다. 본격적인 상품화를 위한 재배 시기는 짧지만, 근 50년을 재배하고 있다. 그렇기에 수입 못지 않은 맛을 내리라 기대하지만, 우리나라의 살구는 유기산이 많아 신맛이 강한 단점을 갖고 있다. 그와 달리 세계 주요 생산국인 터키와 몰타, 이란, 아르메니아의 살구는 유기산이 적어 신맛이 덜하고 단맛이 좋다. 또한 큰 크기와 더 많은 향을 지녔다.
살구는 개를 죽인다?
살구(殺狗)를 한자로 풀어내면 '개를 죽이다'라는 뜻으로, 살구씨에는 매실처럼 독이 있기 때문에 예로부터 "개가 먹으면 죽는다"라는 말이 있어 殺狗라 이름 지어졌다 한다.
살구를 맛보다
삼청동 길가를 걸었다. 하늘이 꾸물 꾸물 구름만 짓궂게 펼쳐 놓은 터라 온통 하얗기만 했다. 바람은 여름을 실은 탓에 안 부느니만 못한 오후, 우연히 작은 과일가게 하나를 발견했다.
온통 개성 있는 디자인으로 무장한 상가들 사이에서 자신을 발견해달라는 듯,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모습이 귀여운 곳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살구가 한 바구니 수북이 쌓여 있었다.
살구는 전체적으로 황색을 띠며 부끄럽다는 듯 붉은 끼를 은근슬쩍 흘리고 있었다. 날씨가 더운 탓일까? 좀 익은 듯했다. 게다가 따뜻한 느낌의 촉감까지 가지고 있으니, "여름이 아닌 겨울에 열렸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불현듯 떠올리게 했다.
날이 후덥해 썩 기분은 좋지 않았으나, 살구는 융모에 쌓여 더 더울 것이기에 위로하는 마음으로 한 봉지를 샀다. 그리고 걸으며 한알을 꺼내 양손으로 반을 쪼개었다.
씨와 살이 어려움 없이 나뉘었다. 마치 단단한 천도복숭아를 반으로 쪼갰을 때처럼, 씨와 살이 깔끔했다. 크기가 그리 크지 않았기에 어려움 없이 씨를 발라 한입에 다 넣어 씹을 수 있었다. 조금은 덜 부드러운 바나나를 씹는 듯한 식감.
'던던'하다고 해야할까? 적당히 부드러운 단단함
오랜만에 먹는 살구는 의외로 신맛이 덜했다. 물론 당도는 반비례했다. 후덥한 날 탓에 짜증 났던 속내가 조금은 풀리는 듯한 적당한 신맛이 어금니와 가까운 양쪽 볼에 느긋하게 자리했다. 그리고 이내, 짜증 났던 속내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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