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력한 위로

<세계의 주인>(2025), 윤가은

by Yul

좋은 예술은 어떤 방식으로든 세상에 말을 건다. 영화가 끝난 후 올라가는 엔딩크레디트에서 제시되는 상투적인 문구(‘본 영화 속 모든 등장인물과 배경은 허구로 창작된 것이며, 만약 실제와 같은 경우가 있다면 이는 우연에 의한 것입니다.’)가 불쑥 가깝게 느껴지고 우연이 우연 같지 않다고 여겨질 때, 우리는 영화가 걸어온 질문에 삶을 내걸고서 통째로 답하는 셈이다.

아마 윤가은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가장 깊고도 정확하게 그려낼 줄 아는 감독 중 하나일 것이다. 인간이라는 말 자체가 사람을 뜻하는 한자(사람 인 人)에 사이를 뜻하는 한자(사이 간 間)가 합쳐진 합성어라는 사실은 곧 인간이 그 사이의 관계로서 존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전작 <우리들>과 <우리집>으로 아이들에 대한 탐구를 지속해 왔던 윤가은의 작품세계가 이번엔 <세계의 주인>이라는 이름을 내걸고서 시작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그건 ‘우리’라는 말로 대변되는 총체적인 관계의 무엇이 아니라, 그 관계를 이루는 구성물로써의 ‘세계’를 다루고자 하는 다짐이 아니었을까. <세계의 주인>은 그 작고 연약한 세계에 말을 걸어오는 영화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스포일러를 극도로 경계하는 이 영화의 홍보 방식은 고스란히 그 지향점을 나타낸다. 말하자면 이건 주인공의 가려져 있던 심리적 진실이 그것을 인식하는 방식으로 관객에게 영향을 미칠 때 치명적인 영화인 것이다. 하지만 세간의 어떤 의심과는 달리 이건 단지 주제의식을 전달하기 위한 얄팍한 충격요법이나 미스터리의 장르적 재미를 위시한 깜짝쇼를 위한 선택이 아니다. 다시 한번, 이건 세계에 질문을 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이때 주인(서수빈)이 반복해서 받는 세 번의 편지는 고스란히 관객이 가지게 되는 세 가지 의문과 겹쳐진다. 주인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는 도덕적인 공박으로 시작해서 ‘뭐가 진짜 너야?’라는 정체성에 대한 질문으로 끝나는 세 번의 편지를 받는다. 물론 이는 영화를 보는 동안 관객이 가지는 의문을 극 중 요소로 형식화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엔 한 가지가 더 있다. 그건 바로 주인의 남자친구 찬우(김예창)와의 키스 장면이다. 편지와 함께 극 중 세 차례 반복되며 일종의 영화적 리듬을 만드는 이 장면들은 그 존재가 괄호 쳐진 발신자와의 관계를 바느질한다는 점에서 예사롭지 않다.

아무도 없는 도장에서 사랑을 나누던 중 보다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며 다가서려 하는 찬우를 주인이 완고하게 뿌리치며 거부할 때, 찬우는 그를 떠나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너를 잘 모르겠어.” 이때 이 슬프고 안타까운 이별의 선언은 곧 주인에게 전달됐던 세 통의 편지와 궤를 같이하는 셈이다. 나는 타인인 너를 모르기 때문에 끊임없이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고 끝내 같이 할 수 없다는 것. 결국 관계란 상대방에 대한 이해가 먼저 선행되어야 간신히 이어갈 수 있는 유약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세계의 주인> 속 거미줄을 이루는 무수히 많은 관계들은 모두 상대방에 대한 온전한 이해에 다다르지 못해 위기를 맞는다. 주인의 아빠 기동(김석훈)은 문자로나마 연락을 이어가고 싶은 가족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해 산속에 혼자 틀어박힌 채 수인처럼 산다. 가장 가까워 보이는 엄마 태선(장혜진)마저 주인이 과거에 끔찍한 일을 당했을 때 곧바로 올바른 대처를 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야기를 전해 들은 바깥세상은 기어코 웅성거린다. 주인의 친구들은 ‘피해자란 모름지기 ~해야 한다’라는 편견이 만들어낸 머릿속 프로토콜로 무장한 채 주인을 대한다. (그들이 영화 초반 주인을 험담하는 남자아이들 무리와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인원 수로 그러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건 이 영화에서 배려라는 이름을 명목으로 행해지는 부주의한 행동들이 곧 폭력과 다르지 않게 다뤄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주인과 가장 큰 마찰을 빚는 상대가 수호(김정식)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해 보인다. 수호는 자신이 가진 편견으로 남을 재단하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인이 수호가 제시한 아동 성폭력범의 출소를 반대하는 서명 운동에 동의하지 않은 이유는 성명문 속 편견으로 기울어진 문장이 있었고, 그 문장이 결코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게 사실이 아닐 수 있는 건 그걸 주인이 자신의 삶에 입각하여 판단하고 있어서다. 주인은 성폭력 피해자로서 그 어떤 사회적 짓눌림도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 (실제로 영화가 주인을 그리는 방식은 으레 이런 인물을 대하는 관습적인 태도와 떨어져 있다. 그건 이 영화에 어떤 낙관적인 프레임을 덧씌우기 위함이 아니라, 그냥 그 인물이 그렇게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주인의 주장에서 앞서는 것은 ‘성폭력 피해자’가 아닌 ‘삶의 주인’으로서의 주체성이다.

내 삶은 나의 것이다. 수호는 남에게 그 기준을 적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틀렸다. ‘성폭력 피해자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채 고통스럽게 살아간다.’라는 문장이 내포하고 있는 것은 곧 ‘성폭력 피해자는 으레 ~해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으로 잔뜩 일그러진 폭력이다.

그러나 주인은 그렇지 않다. 그는 (말 그대로) 삶의 주인으로서 늘 당당하다. 성폭력 피해자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중반부에 이르기 전까지 관객으로서는 이 인물에 대해 그저 추측밖에 할 수 없다는 사실은 그대로 이 인물이 남과 다르지 않게 그려지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미도(고민시)가 주인에게 힘든 것이 있냐고 물어볼 때 미도는 “용서”라고 하지만 주인은 “사랑”이라고 답한다.) 오히려 상처를 입히고 실컷 뒤흔드는 것은 바깥 세계에서의 반응이다. 이 인물이 앓는 것은 본진이 아니라 여진이다.

윤가은의 작품세계에서 진정 슬픈 것은, 그 속엔 악인이 따로 없다는 사실이다. 서슬 퍼렇게 악담을 쏟아붓는 자와 그것을 통째로 앓는 자의 관계로서 상처를 주고받는 것처럼 보였던 <우리들> 속 아이들의 관계는 곧 지아(설혜인) 역시 선(최수인)과 다르지 않게 학교 폭력의 피해자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처연해진다. 상대방을 상처주기 위해 사용하는 모든 언어들이 고스란히 그들이 받았던 말이었다는 사실은 결국 이 세계가 피해자들의 가해로 꼬리를 문다는 슬픈 역설을 드러낸다. 그러니까, 이건 특별하게 나쁜 본성을 가진 누군가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모두가 선한 의도를 갖고 움직이는데, 의도치 않게 미끄러지면서 벌어지는 비극일 것이다.

또한 <우리들> 속 지아와 선이 그랬듯 <세계의 주인> 속 인물들은 그 캐릭터성을 이름에 고스란히 투영시킨 것으로 보인다. 우선 주인. 이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주인’은 말 그대로 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중적으로 ‘삶의 주체로서의 나’를 뜻하기 위한 작명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수호. 수호가 수호인 까닭은 그가 그의 여동생을 지키기(수호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수호가 아동 성범죄자의 출소에 대한 반대 서명 운동을 진행하는 이유는 한낱 학교 생활기록부의 분량이나 채우기 위함이 아니라, 그에게 어린 여동생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다시 한번, 여기에 악한 의도를 가지고 움직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물론 이야기 속에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을 뿐이지, 여기엔 분명한 악인이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이야기의 저류에는 어린 시절 주인을 성폭행한 범인이 있고, 미도의 재판 과정에서 잘못된 시선으로 옳지 않은 판결을 내리는 판사가 있다. 애초에 가장 결정적인 사건으로 다루어지는 수호의 서명 운동은 아동 성범죄자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극 중에서 아예 호명되지 않거나 언급만 될 뿐 카메라 앞에 정면으로 서지 않거나 애써 포커스아웃되며 그대로 이야기 바깥으로 타자화된다.

그러니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미 벌어진 사건이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사후적인 태도일 것이다. 내질러버린 한 마디에 주인에 대한 소문이 퍼진 후 그를 대하는 친구들의 태도가 바뀌는 것은 물론 끔찍한 피해를 입은 친구를 보듬어주려는 배려심 넘치는 행동이지만, 그 속엔 ‘성폭력 피해자’라는 고착화된 프레임을 씌우는 시선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연민이나 동정은 때때로 큰 힘이 되기도 하지만 함부로 그 주체와 대상을 명확히 가른다는 측면에서 또 다른 종류의 폭력이 되기도 한다. (주인의 시점에서 수호의 행동을 비판적으로 바라봤던 관객들은 이제 주위의 세계로 시선을 돌려 자기 자신까지 되돌아보게 될 것이다.)

생채기가 난 자리를 함부로 헤집거나 판단하지 아니하려는 윤가은의 사려 깊은 카메라는 갈등 상황의 두 인물을 프레임의 양쪽 측면에 둔 채 그 사이의 공간을 괄호 쳐 투명하게 그릴 때 가장 강력했다. <우리들> 속 아이들은 더 이상 회복될 수 없어 보이는 관계 위에서 손톱 끝에 맺힌 봉숭아 물을 바라보며 위태롭게 서 있었다. <우리 집>에서의 하나(김나연) 역시 흔들리는 가족 관계 사이 불안에 떤 채로 그렇게 있었다. 그리고 <세계의 주인>에 이르러 그 광경(태선과 주인의 세차장 장면)을 다시 보게 된 관객들은 골똘히 생각에 잠기게 될 것이다. 이제 관객들은 그 상황을 어떤 시각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제각각 숙고해야 한다.

혹시 그건 어떤 노력으로도 매울 수 없는 관계의 구멍이 아닐까. 지아와 선의 관계가 끝내 개선되지 않고, 유미(김시아)네 가족이 결국 다시 이사를 가게 되며 찍는 이야기의 구두점은 어쩌면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움찔거리지조차 않는 세상의 비관을 보여주는 것일까. 그러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그 순간 선은 손톱 끝에 희미하게 남은 봉숭아 물을 바라보며 우정의 추억을 되새겼고, 하나와 유미는 서로 자매 사이를 이루며 새로운 가족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 상황은 분명 절망적이지만, 그럼에도 그 순간 인물들은 모두 실낱같은 희망의 불씨를 살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상황에서 주인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듣고 있는 태선은 어떤 식으로든 대응해야 할 것이다. 섣부른 연민이나 동정은 부주의한 폭력으로 다가설 수 있지만, 그렇다고 침묵하는 것 역시 정답이 아니다. 그 모든 감정을 과장하거나 강조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연출에는 어떤 진실이 있다. 그 장면이 끝나기 직전 태선은 손수건과 물을 건네며 이렇게 말한다. “한 번 더 돌까?” 그러자 자동차는 출구에서 입구로 방향을 튼다.

주인의 말에 덧붙이거나 간섭하지 않고 모두 받아낸 후 조심스럽게 의사를 구하는 이 질문에는 두 가지가 전제되는 셈이다. 내가 네 곁에 서 무슨 말이든 들어주겠다는 것. 그럼에도 나는 너의 상처를 어찌할 수 없다는 것. 이다지도 무력한 위로.

그때 주인의 동생 해인(이재희)이 몰두하고 있는 게 다름 아닌 마술이라는 사실은 상처를 다루는 이 영화의 태도를 짐작하게 한다. 그의 마술에서 핵심은 사라지게 하는 것인데, 그 과정에서 해인은 항상 사과를 닮은 빨간색 구체를 가지고 연습을 한다. (이 영화에서 청송이라는 지명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생각해 보라.) 학예회 무대에서 ‘사라지게 하기 위해’ 모은 갖가지 근심과 걱정 쪽지를 이용해 선보인 마술은 결국 실패로 돌아간다. 그때 주인에게 네 번째 편지가 온다. 그러나 네 번째 편지는 앞선 세 차례의 그것과 다르다.

우선, 그 편지는 분량이나 길이 측면에서부터 차이를 드러낸다. 이전의 편지들은 쪽지 형식으로 일방적인 통보를 전했다면 이번엔 기승전결이 또렷한 편지 형식으로 소통을 잇는다. 그전까지의 편지들이 주인을 힐난하듯 쏘아붙이는 말을 담았다면 이번엔 ‘미안하다’라는 말로 운을 떼며 사과한다. 그 내용은 강요하듯이 제시됐던 일전의 편지들과 달리 주인의 입을 통해 또렷하게 발화되기도 한다.

<세계의 주인>은 도입부와 종반부가 모두 비슷한 장면들의 연속을 다룬다는 면에서 수미상관을 이루는 영화다. 주인은 교무실에서 학업 상담을 받은 뒤 교실로 돌아와 자리에 앉는다. 곧이어 누군가가 건넨 말(글)에 골똘히 생각에 잠기기 시작하고, 이윽고 주위의 세상은 잔뜩 웅크린 채 생각에 잠긴 그 작은 세계를 흔들어 깨운다. 전반과 종반을 이루는 일련의 장면들은 모두 세 차례의 신(scene)에 담겨 있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앞과 뒤를 맞물리며 수미상관을 이루는 작법은 곧 아무것도 근본적으로 달라진 게 없음을 선언하며 구두점을 찍는 셈이다. 상처는 흉터를 또렷이 남겼고 세계는 아직 여진에 떤다. 마술조차 어쩔 수 있는 일이 없으며 할 수 있는 말이라곤 무력감에 가득 찬 위로뿐일 때, 그 작은 세계는 이제 어떻게 버텨야 하는 걸까.

그때 그 편지는 발신자와 수신인을 수많은 익명의 시선으로 돌리며 천천히 품을 넓힌다. 편지의 내용이 주인을 입을 통해 발화되는 그 순간, 카메라는 학급 급우들의 모습을 담는다. 그때 그 편지는 주인의 단짝 친구 유라(강채윤)나 남자친구 찬우, 혹은 그전까지 대립했던 수호가 보내온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영화가 그들 모두에게 가능성을 남기고 있지만, 동시에 누구에게도 확신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 편지는 화면 밖의 당신으로부터 발신된 것일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그 순간 <세계의 주인>은 수많은 익명의 존재들과 함께 연대한다. (2023년 한국영화의 가장 빛나는 순간이 <너와 나>의 엔딩에 있었다면 2025년의 한국영화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제 관객들은 그 끝에서 영화가 걸어온 말에 나도 그렇다고 읊조리며 조용히 동참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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