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 간다>(2001), 허진호 & <500일의 썸머>, 마크 웹
모든 사랑 영화는 성장 영화의 모습과 닮았다. 그건 <펀치 드렁크 러브>의 배리(애덤 샌들러)가 레나(에밀리 왓슨)를 만나면서 온통 파란색이었던 그의 세상에 붉은 빛이 섞여 의상 색(으로 대변되는 인물의 태도)이 변화하는 것처럼 서로의 손을 잡고 이끌어 주며 함께 나아가는 성장이라기보다는, <이터널 선샤인>의 조엘(짐 캐리)과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이 그랬던 것처럼 그 사랑의 끝을 목도했을 때 비로소 시작되는 종류의 성장일 것이다.
그 관계의 끝에서 인물은 종종 자신도 모르는 새 변화하곤 한다. 사랑과 꿈 사이의 양자택일에서 끊임없이 망설이던 <라라랜드>의 커플이 마지막 순간에 교환한 서로의 눈빛은 과거의 선택을 되새김질하며 보아낸 지난날의 후회라기보단 서로의 앞날에 축복을 빌어주는 것에 가까웠다. 사랑의 권태를 이기지 못하고 그 기억을 지워버리고 만 <이터널 선샤인>의 커플이 옛 사랑의 흔적을 하나둘씩 보아내고 나서 내린 결론은 '그래도 다시 한 번'이라는 외침이었다. 그리고 여기, <500일의 썸머>와 <봄날은 간다>의 커플은 자신이 서있는 계절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 채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서 있다.
<500일의 썸머>의 원제는 '[500] Days of Summer'이다. 'Summer'가 '여름'이라는 뜻을 가지는 동시에 주인공 썸머(주이 디샤넬)의 이름이라는 것과 괄호 안의 글씨가 생략 가능하다는 점을 미루어 보면 원제의 의미는 '썸머와의 나날들' 혹은 '여름날'이 된다. <봄날은 간다>의 경우엔 아예 제목에서부터 직설적으로 '봄날은 간다'라고 서술함으로서 그것이 일종의 제언 또는 법칙인 것처럼 느껴지도록 하였다.
그런데 왜 사랑은 하필 허구한 날 계절에 비유되는 것일까. 그건 계절은 결국 영원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흘러가버릴 수 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흘러가버린 계절은 언젠가 다시 돌아온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톰(조셉 고든 래빗)과 상우(유지태)는 각각 여름과 봄의 한가운데에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별이 다가오기 전 그 신호을 알아챌 수 있는 기회는 충분히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충분한 여지가 있었음에도 좀처럼 그 신호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니, 그들은 오히려 그 신호에 무관심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렇게 행동했던 까닭은 그들이 그 사랑에 진심이 아니어서가 아니다. 그저 몰랐기 때문이다. 사랑에 마침표를 찍게 되는 결정적 이유는 모두 무지에서 비롯된다. (<500일의 썸머> 중 나레이션에 따르면, 톰은 썸머와 함께 본 영화 <졸업>을 평생동안 오해하며 살아왔다. 때문에 톰은 썸머가 <졸업>을 보고 눈물을 흘릴 때조차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다시 말하자면 그는 그때까지도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상우는 헤어지자는 은수(이영애)의 말을 들었을 때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맞받아치는데, 그건 사랑에 가변적 성격이 있음을 알지 못했던 상우의 마음이 투영된 말이다. 그러나 사랑도 변한다. 하물며 그들이 즐겨 먹던 라면의 맛도 이젠 달라졌는 걸.)
순수하다면 순수하고 찌질하다면 찌질한 무지의 사랑에서, 어쩌면 그들은 썸머와 은수를 사랑하는 그들 모습 자체를 사랑한 것일지도 모른다. <봄날은 간다>에서 은수와 크게 싸운 상우는 비 오는 날 창가에 앉아 남진의 '미워도 다시 한번'을 부른다. 그런데 빗속에서 노래부르는 상우의 모습이 이어지다 보면 빗속을 채우던 낭만은 찌질함으로 바뀐다. 불안하게 흐르는 음정 위로 악보집을 힐끗힐끗 보는 상우의 모습이 비춰지기 때문이다. 결국 상우는 '이 생명 다 바쳐서 죽도록 사랑했고 순정을 다 바쳐서 믿고 또 믿었건만'이라는 절절한 노래 가사마저 악보집이 없으면 제대로 부르지 못하는 사람인 것이다. <500일의 썸머>에서 톰은 단 한 번 폭발하게 되는데, 이는 썸머와 자신과의 관계가 일그러지거나 썸머가 모욕을 당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폭발하게 된 것은 "저런 놈이 남자친구라니 믿기지 않는구만"이라며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을 욕보이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카드 문구 회사에서 일하는 톰이 썸머를 보며 만든 문장이 'I love you(널 사랑해)'가 아닌 'I love us(우릴 사랑해)'라는 점은 그가 진정 사랑하는 것이 '그녀'가 아니라 '그녀와 나의 관계'라는 점을 드러내는 단서가 된다.)
그러니 그 사랑이 깨어졌을 때 성장이 시작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성장은 자신의 모습을 뒤돌아보았을 때 비로소 시작되고, 그러기 위해선 관계의 끝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건이 종결되었을 때 그것은 과거의 일이 되어버리니 따로 손 대어 수정할 수 없고 변명할 수 없다.) 지속되는 관계 속에선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볼 수 없다. 여름이 지나야 가을에 닿을 수 있다. 사랑이 깨져야 성장할 수 있다. 톰이 지나치게 이기적인 이유로 썸머와 싸우고도 미처 자신을 뒤돌아보지 못한 까닭은 그녀가 바로 그날 밤 먼저 사과하러 찾아와서였으리라.
<500일의 썸머>에서 흥미로운 점은 제목에서의 '500일'이 곧이곧대로 썸머와 함께한 시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애초에 영화의 첫 장면은 이미 톰과 썸머의 관계가 모두 종결되고 난 뒤인 488일째의 모습이고, 영화의 시간 흐름상으로는 절반의 지점에 놓인 290일째가 됐을 때만 해도 이미 썸머는 톰에게 이별을 고한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왜 '290일의 썸머'가 아니라 '500일의 썸머'인 것일까.
그건 썸머와 헤어지고 난 뒤의 210일 동안의 일 또한 앞선 290일동안 일어났던 사건의 자장 속에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톰이 썸머와 지낸 날들을 떠올리며 성장하는 그 과정 또한 '여름이라는 계절의 일부'로서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랑과 성장은 따로 떼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서로 함께 보아야 비로소 전체 퍼즐을 이루게 되는 불가분의 무엇인 셈이다.
<500일의 썸머>는 본격적으로 이야기에 들어가기에 앞서 몇 가지 전제를 한다.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남자와 여자. 이것은 남자가 여자를 만나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이건 톰이 썸머를 만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저 한 남자가 다른 한 여자를 만나는 이야기인 것이다. 주인공의 이름과 성격을 괄호친 채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별의 차이만을 남겨두고 이야기에 다가가게 하는 <500일의 썸머>의 접근법은 관객으로하여금 둘 사이에 일어난 모든 일의 원인을 톰과 썸머라는 개인의 외모나 성격 등의 특징에 있는 것으로 보는 시선을 거부한다. 대신 영화는 이 모든 이야기가 둘 사이에서 벌어진 단발적 사건이 아니라 모든 연인이 겪는 보편적 일화로서 읽히도록 품을 넓힌다. 그러니 두 작품의 얼개가 서로 닮아있는 것처럼, 그 '한 남자'엔 당연히 상우가 포함되고 '한 여자'엔 은수 또한 속한다.
<봄날은 간다>에서 은수는 이미 이혼까지 경험한 적 있는 '사랑에 능숙한 자'이지만, 상우는 내내 버벅이고 잘못 생각하는 '사랑에 미숙한 자'이다. 가만 생각해 보면, 그렇기 때문에 상우는 관계 속에서 늘 소극적이거나 지나치게 적극적이었다. 운전 연습 중 은수가 좀 더 밟아보라고 말했을 땐 악셀을 밟지 않았고, 크게 다툰 후엔 은수가 하기 전까진 먼저 연락조차 하지 않았다. 반면 좀 떨어져 지내자는 그녀의 제안에도 기어코 강릉까지 찾아온 자신의 행동이 과하다는 것은 헤어지자는 그 말을 듣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다.
톰 역시 그랬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톰은 썸머에게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 어필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좋아하는 마음을 어찌저찌 드러내긴 했지만 어쨌든 그것은 자신이 의도한 것이 아니었으니 적극적 시도라고 볼 수 없기도 하다. 하다못해 썸머와 처음 대화하게 된 계기인 영국밴드 스미스의 음악조차도 그녀가 먼저 "저도 스미스 좋아해요."라며 서로의 공통분모를 이야기한 까닭에 있지 않았나. 비틀즈의 음악 중 'Octopus's garden'을 최고로 뽑으며 네 명의 멤버 중 링고 스타를 가장 좋아하는 썸머의 취향을 존중하지 않는 것도 그였으니 이 관계가 유지되는 것은 온전히 그녀 덕분일 것이다.
이때 '능숙한 자'가 '미숙한 자'보다 늘 더 많이 아는 이유는 그들은 이미 경험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혼을 경험한 적 있다는 은수의 캐릭터 설정에서 드러나는 것은 그녀가 이전에 경험했던 사랑이 실패로 규정되었다는 것이다. 실패로 규정되었다는 것은 곧 그 사랑이 깨어졌다는 의미이고, 사랑이 깨어질 땐 필연적으로 상처가 동반된다. 그러니 은수와 썸머의 이름을 다시 말한다면 '능숙한 자' 대신 '상처받은 자'라고 부르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상처받은 자는 생채기가 난 그 자리를 알고 있기 때문에 어디에 반창고를 덧대야 하는지 알고 있다. 어떻게 관계를 유지해야 그 반창고를 땠을 때 흉터가 남지 않을지 알고 있다. 사랑에서 규칙을 만들고 룰을 정하는 것은 언제나 그런 사람의 몫이다.
두 작품 속에서 여자는 분명히 규칙을 정하고 선을 긋지만, 남자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잘못 알아듣는다. 썸머는 "진지한 관계는 싫다"며 처음 톰과 만났을 때부터 분명히 관계를 정립했지만 톰은 끝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우린 커플이라고!") 상우는 "이 일 끝나면 뭐 할 거야?"라는 은수의 말이 관계의 끝을 암시하는 것으로 오해했고, 한 달만 떨어져 지내자는 말을 곧 헤어지자는 통보로 오독했다. (서로가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해 소통에서 자꾸만 미끄러지고 마는 상우와 은수의 모든 소통 장면은 두 작품을 통틀어 가장 안타까운 장면 중 하나일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들에선 이별 장면이 두 번 나온다. 첫 번째 이별이 남자가 일방적으로 관계의 규칙이니 정의를 어겼기 때문에 일어난, 오직 분노와 상실만을 안기는 어린 이별이라면 두 번째는 마음과 마음 사이에서 웃는 얼굴로 매듭지어지는 성숙한 이별이다. 첫 번째 이별에선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 거듭 자리에서 물러섰다가 도망쳤다면 두 번째엔 그 상황이 얼마나 아프고 벗어날 수 없는지 알면서도 그대로 서서 그 의미를 곱씹었다.
그럴 때 카메라는 자리를 떠나지 않고 그 광경을 응시한다. <봄날은 간다>는 특히 롱테이크로 짜여진 아름다운 장면이 많은 영화다. 동 트기 직전 택시를 타고 강릉에 도착해 서로 포옹하는 장면과 벚꽃 핀 거리에서 상우와 은수가 이별을 하는 장면은 모든 사랑 영화를 통틀어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허진호 감독은 그 장면을 편집이나 그래픽을 이용하여 극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그저 상대의 옷깃을 여미고 화분을 다시 받은 채 유유히 떠나는 그녀의 모습이 블러처리되어 희미하게 사라져가는 모습을 잡아낼 뿐이다. 영화 속 모든 사건의 이해가 전적으로 상우에 기대어 보여진다는 것은 곧 이 영화의 카메라가 곧 상우의 시선을 대변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왜 카메라는 희미해져가는 그녀에게 초점을 맞추지 않는 걸까. 왜 상우는 그때 그녀를 잡지 않았던 걸까. 은수와 상우는 한때 서로 그토록 사랑했던 연인이 아니었나.
<봄날은 간다>는 <비포> 시리즈에서 감독과 두 주연배우가 그랬듯 서로가 의견을 나누며 내놓은 아이디어들로 조직된 영화다. 허진호 감독은 상우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이 영화의 특성 탓에 유독 유지태 배우와 많은 의견을 주고받았는데, 그 중 마지막 이별 장면에서 꼭 당부한 것이 하나 있었다. "절대 뒤돌아보지 마라." 그렇지만 그는 (허진호 감독에 의하면) 빼는 게 더 좋았을 그 대사("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를 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던 것 처럼 이번에도 그 말을 어겼다. 상우는 한 번 뒤돌아본다. 하지만 위에서 말했듯 여기서 카메라는 사실상 상우의 시선이기에, 희미해지는 실루엣을 그 자체로 남겨놓는 것과 같이 그는 그녀를 보았을지언정 마음에 잡아두진 않았다. 그리스 로마 신화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상우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치히로가 그랬듯 먼 옛날 오르페우스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 모든 이별은 뒤돌아보지 않음으로 인해 완전해진다.
"떠나간 여자는 잡지 않도록" 상우에게 깨달음을 준 것은 할머니였다. <봄날은 간다>의 서브 플롯이라고 할 수 있는 상우의 할머니(백성희) 이야기는 메인 플롯이라고 할 수 있는 은수와의 사랑이야기에 시종 비유되는데, 그 중 눈길을 끄는 점은 상우가 할아버지가 아닌 할머니에 겹쳐 보인다는 점이다. (보통 이런 경우엔 캐릭터의 성별에 맞추는 것이 일반적이다.) 할머니는 먼저 세상을 떠난 할아버지를 회상하며 매일 기차역에 나가 기다리는데, 이는 은수를 잊지 못해 몇 번이고 강릉에 내려가는 상우의 모습과 비슷하다. 할아버지의 과거는 할머니를 놔두고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운 것으로 짤막하게 서술되는데 그건 은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상우와 할머니가 상대의 내연녀 혹은 내연남과 마주쳤을 때 애써 자리를 피하거나 무시하는 그 모습마저 같지 않은가. 따라서 상우가 할머니에게 깨달음을 얻었다면 그건 은수와의 관계 밖 제 3자에게 얻은 조언이 아니다. 그건 상우가 그 스스로 도출해낸 결론이자 성장인 것이다. 다시 한번, 성장은 제 자신의 과거를 들여다보았을 때 가능하다.
<500일의 썸머>와 <봄날은 간다>는 그 사랑의 시작과 끝이 수미상관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대나무밭의 소리와 훔쳐보는 시선을 담아내며 사랑의 시작을 알렸던 영화는 홀로 선 갈대밭에서 마무리되고, 여름(썸머)를 맞이하며 포문을 열었던 다른 영화는 이제 가을(어텀)과 인사함으로 인해 계절의 순환을 깨달으며 끝난다. 그리고 두 남자는 마지막 장면에서 카메라를 응시하며 웃어줌으로서 관객이 아직 보아내지 못한 영화의 뒷모습이 결코 새드엔딩으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넌지시 암시한다.
동시에 두 작품은 관객이 오독하기 쉽다는 점에서 같기도 하다. 예컨데 '작가의 노트: 본 영화의 이야기는 허구이므로 극중 등장하는 모든 것은 우연의 일치입니다. 특히 너 말야, 제니 백맨. 나쁜 년.'이라는 자막으로 시작하는 <500일의 썸머>의 오프닝이 바탕에 깔고 있는 것은 작가조차 썸머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상우와 톰을 나쁜 놈으로 바라볼 것인가. 썸머와 은수를 나쁜 년으로 바라볼 것인가. 두 영화 속에서 주인공의 모습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당신은 저마다의 사랑을 대하는 태도를 엿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