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크리트 유토피아>(2023), 엄태화
잘 알려진 것처럼 엄태화 감독의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대한민국에 거대한 지진이 불어닥친 상황을 그린 재난극이다. 그런데 여기엔 조금 특이한 점이 있다. 그건 바로 이 영화가 재난이 벌어지는 상황보다 재난이 일어난 후를 집중적으로 다룬다는 사실이다. (연출 자체도 재난 당시를 그려내는 일반적인 장르 영화의 화법에서 멀어져 있다.) 결국 재난이 일어나는 상황을 개개인의 플래시백으로만 회상되게끔 구조화시킨 연출이 드러내는 지향점은 결국 '재난이 만들어낸 지옥'이 아닌 '살아남은 사람들의 지옥'을 다루겠다는 다짐이었던 셈이다. (이때 제목이 '콘크리트 유토피아'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해 보인다. 영단어 'Concrete'는 '콘크리트' 대신 '구체적인'이라는 다른 뜻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엄태화 감독이 그려내고자 했던 세계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전대미문의 대지진으로 서울 한복판이 전부 쑥대밭이 된 상태에서 오로지 우뚝 솟은 것은 웬 아파트 한 채였다. 그건 낡은 복도식 아파트였지만 모든 것이 파괴된 세계에서 최후의 요새와도 같은 것이다. 더군다나 그 주위로 높은 벽을 쌓은 채 그 아파트의 이름이 '황궁'으로 명명될 때, 이 영화는 아파트를 하나의 성처럼 다룬다. (외부의 침입자들을 상대할 때 그들이 저항하는 방식이 돌을 던지는 것이라는 점은 마치 중세 시대의 공성전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중세의 모티브만큼 성경의 모티브를 적극 끌어오기도 한다. 영탁의 본래 이름이 '김영탁'이 아니라 '모세범'이라는 점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나듯이 이 영화는 개중에서도 모세 이야기를 재난물에 접목시킨 결과물이다. 영탁이 처음 집어 드는 무기가 지팡이(성경에서 모세는 그 지팡이로 홍해를 가르고 바위를 물로 바꿨다.)라는 점을 비롯, 언 땅에서 물이 터져 나온다거나 양의 피(여기선 추측컨대 사람)의 피를 칠하여 자신의 사람과 그렇지 않은 자를 구분하는 방법까지, 유명한 이야기들이 곳곳에서 비틀어 재현되기도 한다.
그 자장 속에 있는 것은 비단 영탁과 민성 같은 인물만이 아니어서, 재난 상황에 속해있는 그 세계 자체가 그렇게 보이기도 한다. 예컨대 아파트에 들어온 외부 침입자에게 물건을 던지며 응수하는 장면은 물론 중세 공성전을 떠올리게도 하지만, 동시에 성경의 모티브가 좀 더 강해 보인다. 아파트 밖 '그들'에게 거리낌 없이 물건(돌)을 던질 수 있는 까닭은 말하자면, 그들은 스스로 죄가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죄 없는 자만이 돌을 던져라'!).
눈길을 끄는 여러 요소들 사이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 아쉬움이 없다고 말할 순 없을 것 같다. 적극 길어온 종교적 모티브는 그 자체로 흥미롭지만 영화의 톤과 잘 어울린다는 인상은 덜하고, 종종 그 자체로 두드려져 따로 보이기도 한다. 플래시백 등의 연출적 사용도 썩 긍정적이라고 볼 수 없고, 바퀴벌레와 같은 상징은 상대적으로 기시감이 강하다. 장르 영화의 클리셰를 또박또박 밟아 가는 몇몇 전개도 아쉬움을 남긴다.
캐릭터 사용에서도 마냥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부녀회장 금애(김선영)나 간호사 명화(박보영), 선량한 주민 도균(김도윤) 같은 인물은 인간군상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캐릭터의 모습으로, 배우들 자체의 역량에도 생동감이 꺾여있어 납작하게 짓눌린 모양새다. 아파트 안의 '우리'와 아파트 밖의 '그들'의 대비 가운데 선 채 등장했던 혜원(박지후)은 극에서 다양한 화두를 제시하지 못하고 그저 '있어야 해서 있는' 캐릭터로 손쉽게 소비된다. 관객들의 시점을 대변하며 제 목소리를 알렸던 민성(박서준) 역시 종반부가 되면 존재가 희미해진다.
그럼에도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마지막엔 제법 인상적인 엔딩이 있다. 모든 게 완전히 폐허가 된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에서 다시 생각하고 나아가게 만드는 이 영화의 엔딩은 그 자체로 하고자 하는 말을 또렷이 한다.
말하자면 이건 봉준호의 <설국열차> 식 엔딩인 셈이다. <설국열차>에서 남궁민수(송강호)가 열차의 문을 열며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대신 시선을 돌려 열차라는 수평적 계급사회 자체를 탈피했던 것처럼,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서울 한복판 우뚝 선 황궁 아파트로 시작해 폐허가 된 채 눕혀진 이름 모를 아파트에서 끝난다. 그리고 여기엔 특별한 악인이 없다. <설국열차>에서 윌포드(애드 해리스)가 한 행동이 윤리적으로 옳지 않긴 해도 '기차'라는 세계를 지키려는 행동의 결과였으니 무턱대고 비난하기엔 무리가 있었던 것처럼, 영탁 역시 '아파트'라는 세계를 지키기 위한 행동을 한 것이고, 실제로 어느 정도 성공하기도 했으니 마찬가지일 테다.
그러니 여기에 악역이 있다면 그건 시스템 자체일 것이다. 애초에 모세범이 얼떨결에 진짜 김영탁의 흉내를 내며 살아가게 된 것도 대한민국의 주거 문화와 밀접히 연관을 맺고 있는 부동산 사기 때문이었다. 영화의 대부분을 이루는 인위적 재난 군상극과 달리, 이 영화가 대한민국의 아파트 역사를 요약하는 다큐멘터리적인 연출로 시작했다는 점은 아파트라는 공간 자체가 가지는 상징성을 드러낸다. 아파트는 곧 삶이고 공동체면서 가족이고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다.
그럴 때 재난 후 지진을 피해 찾아온 드림 팰리스 주민을 유독 냉철하게 거부하는 것은 지진이 일어나기 전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거기가 평소에 우리 얼마나 무시했어요?"라면서 그들을 아예 "드림 팰리스 인간들"로 지칭하는 데서 알 수 있듯, 드림 팰리스는 평소 황궁 아파트를 하대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선악 구분에 근거한 재난 상황에서의 인과응보로 쉽게 구분 짓긴 어렵다. 그들 또한 육교 밑 삼영 빌라 사람들에 대해 마치 드림 팰리스가 황궁 아파트에 그랬듯 무시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삼영 빌라가 어디야?") 그러니 이건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받게 되는 인과응보적 이야기라기보다는, 현대 사회의 질서나 위계의 부조리가 꼬리를 물고 순환하는 비극적 이야기인 것이다.
그러니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면 이제 대한민국 사회 구조 자체를 바꾸어야 할 것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엔딩에서 아파트는 무너지고 경계는 희미해지며 약자들은 서로 어깨를 겯는다. 또 어느새 차디찬 겨울은 지나가고 있다. 이 영화가 보아내는 유토피아는 바로 그런 곳에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