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락처에서 정리될 관계-
지난주에 중요한 이메일을 본사에 보내기로 하여서 오전 내내 작성 후.
다시 재차 읽어보고 또 몇 번의 편집을 거쳐서 마침내 최종본을 완성하였다.
보내기 바로 직전에 혹시 몰라 같은 업종의 일을 하는 친한 친구에게 다시 한번
내용과 계약사항 등의 검토를 부탁하려 이메일을 보낸다는 게, 비슷한 이름의
오래전 같은 직장에서 일했던 동료에게 보내버리는 어이없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순간 그 안에 어떤 내용이었지, 기밀사항은 없었는지 등이
스캔하듯이 뇌리를 스치며 온 신경이 몰리면서 온 등줄기에 식은땀이 났다.
나한텐 중요한 이메일이었지만 다행히 그 내용에는 어떤 기밀이나
다른 사람이 읽었을 때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없었기에, 한시름 놓았었지만,
그게 아니었다면 어땠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한 순간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왜 내가 오래전 나와 같이 일했던 곳을 그만두어
거의 5-6년 이상이나 본 적도 없는, 그 여직원의 연락처를 아직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져서, 내 핸드폰의 모든 연락처를 한번 정리해 보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그 연락처 목록은 거의 10여 년을 거슬러 올라가서, 그 당시 알던 사람들,
그리고 몇 년 전에 가르쳤었던 약국의 테크니션 학생들 그리고
이곳에서 공부를 마치고 본인들의 나라로 귀국하여 더 이상 저장되어 있던
뉴질랜드 번호가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까지 있었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내려 해도, 누구인지 기억도 잘 안나는 이들조차도
내 핸드폰의 연락처에 다 저장해 놓아 놓고 다녔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다가 문득 다시 지금과는 많이 달랐었던 예전의
나의 사람관계와 그 당시의 생활들도 불현듯 떠올랐다.
27년 전 이곳 뉴질랜드에 처음 왔을 때는, 외로움과 쓸쓸함 그리고 허전함,
또 가족을 떠나 혼자서 여기서 이제는 어른으로 살아남아야 되는 두려움과
낯선 곳의 삭막함 등등 말로 표현하기 힘든 여러 가지의 복잡한 감정들로부터
도피하려는 수단으로 삼으려 했던 것이었는지......
20대 끝자락의 나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사귀기 위해 부단히도 애써왔었고,
또한 외국에 사는 한국인들이 거의 다 모인다는 큰 한인 교회에도 나가면서
많은 한국 교민들에게 얼굴 도장 그리고 이름도장 등을 톡톡히 찍고 다녔었던 것 같다.
나의 속으론 한없이 소심하지만 밖으론 가식적인 밝고 쾌활한 캐릭터도
한몫을 제대로 했었던 것인지, 그 당시 20대의 나는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나름 재미있고 인기 있었던 사람이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내가 순탄하게 아무 일 없이 잘 지낼 때 알고 지냈었던 그 수 많았던
나의 당시 지인들은, 나의 인생이 암초에 부딪혀서 침몰직전에 가게 돼버리자,
나와 나의 가족이 한순간 온갖 소문과 재미난 가십거리의
주인공이 되어버렸을 때에도, 착하고 믿을만하다고 생각했던 이들은 침묵하였었고,
나와 별로 친하지도 않았고 원래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이들은 거기에
합세를 넘어서, 본인들이 선두로 온갖 드라마까지 보태어 말을 퍼뜨리며
즐거워하는 블랙코미디 같은 인간의 씁쓸한 뒷모습을 내보였었다.
그 누구도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앞으로 벌어지게 될 줄은
그 아무도 장담 못하는데 말이다.
그 선두주자의 중년의 한국 여성은 그 후 몇 년 뒤에 내가 뉴질랜드에서 가진
첫 번째 직장이었던, 면세점에서 리셉셔니스트로 근무했을 당시에,
관광객 가이드에게 주어지는 20프로 할인 쿠폰을 내가 자신의 친한 지인이니
하나 발행해 달라며,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게다가 본인은 일반주부인데도
사정을 하러 왔었지만, 회사의 규칙에 위반되는 것이기에 내가 거절하자,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정말 많이 변했네”
하며 심하게 화를 내며 돌아갔었다.
그러나 두 시간 후 그녀는 자신의 남편과 그의 가이드 친구까지 앞세워
돌아와서는 결국 원하는 할인 쿠폰을 챙겨 갔었다.
사람이 사는 데에는 참 여러 가지의 방식들도 있구나 생각하게 되었었고,
얼마나 무의미하고 진정성 없는 수많은 관계들을 위해서 내가 많은 것들을
허비하었었는지 크게 반성하고 성장하게 된 시기였었다.
자연스레 그 후 나는 한국 교회나 한인들이 많이 모이는 모임 등을
피해온지 벌써 25년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그 후 몇 년 뒤 그녀가 한국 식당을 연 곳을 나는 전혀 모른 채 손님으로 가게 됐었다.
누군가로부터 내가 약사가 되었다고 들었다며 아주 반가운 내색을 하며...,
사이다 캔 한 개를 무료로 주며 생색내는 그녀…...
나는 전혀 고맙지도 반갑지도 않았고, 그 후로는 다시는 그 식당을 가지 않았다.
결국 아무 가치 없고 의미도 없는 관계들에 시간, 마음, 돈 그리고 나의 젊은 시절을
다 소비하며 결국에 상처와 실망만 남게 되는 많은 사람들과 나누었던,
그런 연락처들이 아직도 고스란히 나의 핸드폰에 남아 있었다니....
내가 내 핸드폰에서 그들의 연락처를 정리하고 있듯이, 나 또한 어떤 이의
연락처에서 정리 손절자가 되기도 하는 그런 텅 빈 만남들을 아직도 계속하면서
많은 소중한 것들을 소비하는 우리들은, 그 관계들에서 무엇을 얻고,
또 무엇을 그로 인해 잃어야 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 날이다.
소중한 한 두 사람만 우리의 인생 끝자락까지 있어 준다면
그것은 참으로 제대로 산 그리고
행복한 우리네 삶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미지: Pixabo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