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풍차 -콜센터 지옥"
|타고난 언어능력?|
어려서부터 영어권 나라의 현지에서 살거나 혹은 원어민으로부터 배워야 영어를 원어민처럼 한다는 것은 모두에게나 적용되는 것은 아니며, 언어 능력을 타고 난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통하지 않는다고 들 한다.
“내 돌잔치에 직접 손님접대”를 다 했다는 엄마의 말씀에 나도 혹시나 상당 부분 언어적 능력을 타고난, 그 소수의 사람 중의 한 명이 아닐까 은근히 기대를 해보았었고, 열심히 노력하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나는 보통의 언어 능력자들에도 못 미치는 영어 발음을 구사하고 있었고, 영어는 여전히 내가 싸워야 할 풍차로 자리 잡은 채, 크고 작은 전투를 벌인 지 어언 27년 차인데도 아직도 절대 끝나지 않는 투쟁에 어느 정도 타협점을 찾으며 휴전을 모색해보고 있는 중이다.
결국 나는 타고난 언어 무능력자이지만 무한한 노력형으로 그나마 의사전달은 정확히 하게 된 생존형 언어능력을 아주 오랜 기간 나름의 해외생활 경험으로 터득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불어와 일어를 공부하여 국적불명의 독창적인 발음에도 전혀 꿀리지 않는 자신감과 임기응변력,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다는 들장미 소녀의 성격으로 버티며 감내하고 있는 뉴질랜드 살이중이다. (도나키호테라)
한국에서 나온 6년의 중고등학교 그리고 4년의 대학교 특히나 외국어 대학교 (물론 전공은 불어이다, 그나마 변명을 들자면)의 영어공부가 무색할 정도로, 영어학원을 뉴질랜드에서 고작 6개월 다닌 게, 그 10년간의 한국에서의 영어 교육보다 이곳에서 생활을 할 수 있는 언어의 기반이 되었다는 것은 부인하기 힘든 웃픈 현실이었다.
|70대의 아름다운 화장품 판매직원|
기초를 조금 벗어난 정도의 영어실력으로 면세점의 리셉션니스 직업을 거쳐서, 랑콤의 카운터 매니저로 일하던 나는, 진심으로 앞으로의 자기 계발이나 커리어를 향하기엔 부족한 언어의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
공부를 마치고 아주 오랜만에 다시 오클랜드에 돌아와서 전에 다니던 면세점에 들렀다가 나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그 당시 50대 중반이셨던 동양 여성분이 지금은 70대가 다 되었어도 여전히 면세점 화장품 카운터에서 판매직 일을 20여 년째 해오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한 직종에 그리고 단골로 가는 가게에 계속 머무르는 뉴질랜드의 문화의 하나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다른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그녀의 자리가 아마도 나의 것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분의 70대의 나이에도 아름다움과 건강을 관리하시며, 하시는 일에 최선을 다하시는 삶의 자세에 진심으로 박수를 보내드리고 싶었다. 말씀으로는 자신이 함부로 직원을 정리 못하는 뉴질랜드회사에서 처치곤란일 것이라고 하시면서도, 몇십 년 한길 경력의 화장품 판매 전문가로서의 아우라가, 또 자기 관리를 잘하신 노년의 아름다움이 남달리 우아하게 보이셨다.
|만족은 행복의 키|
그분은 자신의 신념에 의해 선택하셨던 자신의 생활에 감사하며 만족하시고 계시는 듯 보이셨다. 다들 인생의 가치관은 다르기에 자신이 원하는 것이 다른 꿈을 좇는 것인지, 아니면 지금의 그 자리에서 평온과 안정을 찾고 나름의 여유로운 삶을 가지는지는 개인의 차이이기에 존중한다.
평안한 일상에 하루에 만족을 하는 삶은 가장 성공하고 행복한 인생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엄마께서도 내가 랑콤의 매니저로 일하다가 다시 공부를 하러 갈 때에, 쫌 편하게 살지 왜 또 늦은 나이에 공부를 하러 가냐고 하시며, 막내딸이 늦깎이 공부로 힘들지 말고 그냥 지금 만족하며 편하기를 원하셨었다.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었더라면, 더더욱 하고 있는 일을 그만두고, 다른 커리어를 위한 공부에 집중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도 더더욱 불가능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당시 홀홀 단신이었던 나는 랑콤에서 근무하면서도, 공부를 더 하여서 올라갈 수 있는 직종은 없을까 모색하게 되었고, 그 당시에는 다른 외국 기업에서는 근무해 본 경험도 없었고, 또한 내가 달리 특히 뉴질랜드에서는 내세울 경력도 없었기에, 랑콤 본사에서 근무하며 나와 같은 카운터 매니저와 다른 직원들을 교육하는 연수 교육원의 직업을 희망하였고, 나의 당시의 영어 수준과 한국에서의 학위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경영학과 마케팅 공부를 하기로 결정하고, 회사에 사직서를 내게 되었다. 뉴질랜드에서의 첫 번째 직장에서의 내부 이직 후 2년 만에 내린 결정이었다.
|해외에서 첫 대학 도전|
나의 공부와 생활비를 지원해 줄 가족이 없었던 내가 하고 있던 유일한 수입원인 풀타임 직업을 그만두고, 공부를 풀타임으로 하기로 결정했던 것은, 30대 초반이라는 늦은 나이 문제를 떠나서 금전적으로는 더더욱 결단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었다.
나중에 경제학을 공부하면서 배운, "Opportunity Cost" (기회비용)을 생각해 보아도, 공부하느라 잃게 되는 연봉과, 공부하는데 들어가는 비용 그리고 드는 시간 특히나 적지 않은 나의 나이와 남은 삶을 계산해 보고, 한해 총 들어가는 것을 계산해 보니 막대한 비용과 그리고 공부 중에 필요한 생활비까지, 한국이었었다면 엄두도 내지 못할 결코 쉽지 않았을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다행히 나는 뉴질랜드 영주권자여서 학비는 전액을 융자를 받을 수 있었고 (불과 2년 전에야 드디어 경제학 그리고 약학의 두 대학 학비 융자금을 다 갚았다), 학생이라 나오는 주별 정부 보조금을 받아서 생활비로 쓰면서, 부족분은 아르바이트를 하며 또 일하면서 모아두었던 자금으로 3년간의 경제학 학위를 받을 수 있었지.
|중국 유학을 뉴질랜드에서|
그런데, 아뿔싸!!! 내가 아주 크게 간과한 것이 있었다.
영어권인 뉴질랜드에서 3년제 대학을 졸업하게 되면은 당연히 나의 영어실력도 일취월장할 것이라는 큰 착각이었다. 영어는 그저 먼발치 그대로 그 자리에서 나를 바라만 보며 그저 묵묵히 같은 장소에 머물러만 있었다.
그 이유 인즉은, 비즈니스 그리고 마케팅 전공 학생의 95프로가 모조리 중국 유학생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강의실은 교수님이나 강사분들이 오기 전까진, 귀가 멍할 정도로 큰 중국어 고함 같은 대화소리이었을 뿐이었고, 그룹으로 하는 과제에서도 유일한 외국인은 나뿐이었다. 당연히 그들끼리의 모든 대화는 내가 앞에 있건 없건 모조리 중국어로 이루어진 것은 두말하면 입만 아픈 상황이었다.
거의 전체가 중국인 학생이었던 경영학부 그리고 그들의 영어는 심지어 나보다도 훨씬 형편없어서, 영어가 늘기는커녕 되려 쉬운 중국말이 들어올 뿐인 나의 첫 대학, 3년이라는 30대의 귀중한 시간 그리고 막대한 비용...... 속으로 울부짖었다.
기회비용이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심사숙고하여서 결정을 내렸던 것이었고, 오클랜드의 생활을 정리한 후, 뉴질랜드의 수도인 웰링톤에까지 내려와서 공부에 집중하리라 다짐하고 온 대학에서 그저 학위장 하나뿐인 3년을 허비하고 나의 영어는 여전히 제자리표 하급이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헛된 시간은 아니었는지, 나중에 약대에 들어갈 때에는, 한국에서 나온 외국어 대학교보다, 뉴질랜드에서 나온 이 대학을 인정해 주는 특혜를 받게 되었던 것이 유일한 뉴질랜드에서의 첫 대학 졸업의 성과라고 생각한다.
고로 필요 없는 공부나 배움은 없는 것인가라는 뒤늦은 그리고 조금은 덜 억울한 소극적인 교훈을 얻긴 했다.
|입사 지원 100군데|
메시대학 (Massey University)에서 경제학 학사과정을 졸업 후 나는 100 개 가까이 입사 지원서를 냈고, 기적적으로 IAG 보험사의 클레임 어드바이서 (Claim Advisor)라고 콜센터에서 헤드세트를 끼고, 차량 사고나, 물품 도난 혹은 집이나 건물의 누수 혹 화재 등의 보험금 배상을 지원해 주는 역할로서의 직업을 가지게 되었다.
다른 어린 졸업생들과 나의 지인들은 나에게 어떻게 그렇게 취업이 잘되냐고 묻고는 했었다. 그중의 한 명은 취업이 안된다며 정말 낙담하고 우울증 초기 증상까지 왔다며 고민을 상담하는 학생도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몇 군데에 지원을 했느냐고, 그녀는 내게 5군데나 지원했지만 면접을 보자는 곳도 없었다며, 이미 포기 상태이며 중국으로 이대로 돌아가야 하는지 고민이라며 유학을 보내준 부모님 얼굴을 볼 면목도 없다고 하였다.
나는 그녀에게 내가 100군데 가까이 지원하여, 총 7군데에서 면접 초대를 받았으니, 14:1의 성공 비율이고 그녀와 같이 5군데만 지원했다면 당연히 아무 데에서도 연락이 안 왔을 것이라고 이야기해 주었고, 그녀는 정말 토끼눈같이 눈이 휘둥그레져버렸다.
뉴질랜드 청년들도 겪고 있는 취업난이라면 우리 같은 이방인들은 더욱 내세울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고 나름의 취업의 팁을 이야기해 주었다. 특히나 자신감과 적극성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도전정신과 우리의 제2 외국어를 특기로 쓸 수 있는 직업에 먼저 도전해 보라고 권해주었다.
나의 직업도 특히나 뉴질랜드의 여러 은행을 통해 보험을 가입한 고객 그리고 한국 고객들의 번역을 돕는 역할이, 내가 그 일자리를 잡는데 한국어라는 제2외국어가 특기로 한몫을 했었고, 중국인 시장은 한국인 마켙보다 훨씬 광대하기 때문이었다.
일례로 중국인 부동산 중개업자들 중엔 억대 수십억 대 연봉을 호가하는 이들이 굉장히 많다. 중국인들은 중국인을 통해서만 집을 거래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부유한 중국인들이 외국에 집을 사두는 일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전 세계적인 추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택시기사 한 명 대졸 직원 세명|
나를 포함한 두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 총 4명이 같은 해에 IAG 보험회사의 신입 사원으로 연수 교육을 받게 되었고, 원래 택시 운전사일을 하였었다고 밝힌 한 명의 뉴질랜드 남자직원 마이크 외엔 모두 막 대학을 졸업한 중국인 (두 명)과 그리고 나였다.
아시안들은 고학력에도 합격이 어렵지만, 현지인들은 고등학교를 중퇴해도 가질 수 있는 직업이라는 사실이 씁쓸했었지만, 이곳은 한국도 아니고 내가 그 나이에 한국을 가도 취업난은 뉴질랜드보다 어려우면 어려웠지 절대 쉽지는 않으리란 생각으로, 그 직업을 통해서 배울 것이 있다면 최대한 성장한 후, 다시 징검다리 삼아 더 발전을 하리라 나름 큰 포부를 가지고 시작한 미약한 시작 같은 직업이었다.
그나마 우리 아시안 직원들은 각각 한국어 그리고 중국어를 구사하기 때문에 대학에서 무엇을 전공했는지와는 무관하게 각국의 고객 관리와 상담을 위해서 특별 입사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콜센터 지옥|
영어가 서툰 나에게 영어 콜센터 사고 보험 접수일은 정말 생지옥과도 같은 업무였다. 어떤 뉴질랜드 중년 남성은 내가 전화를 받고 소개 인사말이 끝나기도 전에 굉장히 무례한 어투로 소리를 지르기도 하였다.
“영어로 말할 수 있는 사람으로 바꿔줘 당장! “
그러면 나는 차분하고 단호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는 하였다.
“나는 여기에서 당신의 사고를 처리해 주는 일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저와 통화하기 싫으시다면 다시 통화 대기자순으로 돌려드릴게요. 한 45분에서 1 시간정도만 기다리시면 될 텐데 그렇게 해드려도 될까요?
당장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이들에게, 그나마 보험을 판매하는 직종이 아니고, 그들의 클레임을 도와준 후 지불을 해주는 역할이기에 그나마도 그 정도로 수그러 드는 무례한 고객들이었다.
영어가 서툰 우리를 현지인들은 우리의 두뇌도 말과 같이 느릴 거라 생각하는지 의심할 정도의 태도를 종종 보이기에, 단호함과 단단함을 보여주지 않으면, 종종 무시당하기 일쑤였기에 나름 터득한 생존 방법이었다.
또한 상대방이 우리의 영어를 한 번에 못 알아 들었을 경우는 같은 말을 두 번 반복하기보단, 다른 단어와 쉬운 표현으로 되풀이하기를 추천한다. 영어로 말은 할 수 있지만, 어려운 단어를 모르는 고등교육을 받지 않은 뉴질랜드인과 원주민들도 많기 때문이다.
콜센터에 전화가 오면 모든 고객들이 보험 청구를 위해 이야기하는 것을 나중에 분쟁의 오해를 막기 위해서, 토씨하나 바꾸지 않고 (Verbatim), 컴퓨터에 입력해야 하는 콜센터 역할 2년 만에, 다른 능력은 크게 진전된 것이 없다고 생각되지만, 최소 영어 듣기는 일취월장했다고 확신한다.
역시 어떤 일이나 공부에서 무언가를 배우고 얻어간다는 진리는 또 통했던 나의 콜센터 지옥이었다.
|진짜 아픈 일요일 오후|
그럼에도 불구하고, 콜센터 일을 해야 하는 월요일 아침이 너무 심적으로 힘들었기에, 실제로 일요일 오후부턴 몸에 하나둘씩 이상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속이 메슥거리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고 열도 나기도 하였다. 절대 꾀병은 아니었는데, 월요일에 병가를 신청하고 나면, 실제 월요일 아침에는 멀쩡히 일어났었던 나를 보니
스트레스가 역시나 만병의 근원이 맞는 것을 몸으로 직접 경험을 한 것이었다.
게다가 다들 대학을 졸업하고 입사한 아시안 직원들과는 달리 현지의 고졸출신의 뉴질랜드 백인 남성이나 여성이 (그나마 남성이 80프로) 우리들을 관리하는 팀리더 그리고 매니저가 되는 유리천장 (Glsas Ceiling) 실제 상황을 보며, 다른 전문직으로 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하여야겠다는 생각이 또다시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유라천장이라는 단어는 굉장히 민감한 상황임을 스레드에 올린 짧은 글로 많은 이들이 논쟁하는 것을 보았기에, 여기서의 Glass Ceiling은 다분히 주관적이며 전혀 객관적이지 않을 수 있음을 강조하고 싶다.)
금융과 보험 관련 자격증 공부도 근무하면서 다 취득하였고, 혹 다른 직종으로의 승진 기회도 열심히 알아보았지만 그 끝에서 발목을 잡는 한계는 역시나 영어라는 슬픈 현실이 있었다.
또한 이곳에서 22년째 콜센터에서 풀타임으로 사고접수 전화를 받으며 쌓인 스트레스를 단 간식으로 풀며 불어나 버린 엄청난 체중을 가진 많은 중년의 백인 동료들을 보며 나의 미래도 그들과 다르지 않을 수 있었기에, 힘들게 취업한 뉴질랜드 첫 사무직 직장이었던 이곳을 3년여 만에 과감하게 떠나기로 결심했다.
이로서 뉴질랜드에서의 첫 직장 면세점 리셉션니스트, 그리고 랑콤 카운터 매니저일을 거쳐서 세 번째 보험회사 클레임 어드바이저 일을 그만두게 된 것이었다.
|포기도 용기|
내 주위에는 자신의 일상의 틀을 깨는, 작은 변화조차도 두려워하는 지인들이 많다. 나도 어릴 적과는 달리 나이가 먹어가면서 안정감의 중요성에 대해서 더욱 느끼고 있다.
나의 뉴질랜드 친구 중의 한 명은 자신의 회사에서 불공정하고 자신의 능력에 비해 적은 월급을 받으면서도, 내가 권해줄 때까지는 이직을 한 번도 고려해 본 적도 없다고 하여서 많이 놀랬었다.
그도 그럴 것이, 20여 년 전 뉴질랜드에 처음 왔을 때 들은 말이, 키위 (뉴질랜드인을 부르는 이름)들은 한번 단골로 간 커피집이나 식당 그리고 식료품가게를 거의 평생 간다고 들었다. 내가 전에 일했던 약국에서도, 처음 만나는 커플들이, 결혼 후 아기가 태어나고, 아이가 학교에 들어갈 때, 연세 드신 분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다니시다가, 돌아가신 후 그분들의 자녀들로부터 감사 문자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렇게 새로운 것을 혹은 낯선 것을 시도해 보는 것을 극도로 불편하게 생각해서인지, 내가 좋아하는 폰손비에 위치한 프레고라는 피자집은 그 같은 곳에 1986년에 오픈 한 이후로 줄곧 피자집과 같이 나이 들어간 단골들 그리고 그들의 자녀, 손주들의 성지처럼 된 것도, 빠르게 트렌드가 바뀌고 식당들이 닫고 다시 열고를 반복하는 우리나라와는 사뭇 다른 문화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나의 친구에게 때로는 포기와 도전도 용기가 필요하다고 적극 권해 주었고, 지금 현재는 다른 대학으로 이직을 하여서 그의 능력을 마음껏 펼치며, 매니저 자리로의 이직을 눈앞에 준 실력자가 되어 있다.
잦은 이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맞지 않고, 이 길이 아님을 깨달았을 때에는 박차고 나와서 새로운 것을 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기에, 포기에는 도전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나 또한 뉴질랜드에서 나름 안정에 이르렀다고 생각하게 된 그리고 재미있고 어렵지 않았던 랑콤 매니저 일을 포기했기에, 약사로서의 도전을 할 수 있었다. 40대에 약대를 가기로 결정을 했을 때보다, 고정 수입이 들어오는 풀타임 자리를 그만둘 때의 고민이 또 필요한 용기가 훨씬 더 컸었기 때문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이듯이, 포기는 새로운 시작의 첫 단계" 일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40이라는 늦은 나이에 새로운 공부를 시작했지만, 지금 돌아보니 그때가 가장 어렸었고, 무언가를 시작하기엔 가장 완벽한 때가 바로 내가 가장 어리고 멋진 "오늘"이라는 사실을 부족한 글로 전달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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