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 잃은 8년의 우왕좌왕기 “
ㅣ뉴질랜드 키다리 아저씨|
극심한 스트레스와 실제 일요일 오후부터 몸의 이상을 동반한 “월요일 신드롬”을 선사해 주었던 보험회사 콜센터의 일자리를 2년여 만에 그만 두기로 결정하였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참 안심이 되는 결정이었다.
그 당시 나의 유일한 뉴질랜드의 친구이자 중요한 결정을 할 때는 늘 자문을 구하며 의논하고는 했던, 실제 키가 큰 (192cm) “나의 키다리 아저씨”, Grant(그랜트)는 내가 시내에서 초밥집을 운영할 때 매일 단골로 오다가, 어느 날 내가 세 살 아들을 잃어버렸을 때 적극적으로 도와주어 찾게 되면서부터 친구가 되었다.
마치 "뉴질랜드 아빠"같이 베이비붐 시절에 태어난 그랜트는 나이가 지긋하신 친구이고, 그는 내가 곤경에 처했을 때, 자신이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알려 달라고까지 하신 가족과도 같은 고마우신 분이다. 물론 나는 실제로 단 한 번도 친구로서의 좋은 의견과 조언 외의 도움을 청한 적은 없다. 그것이 내가 좋은 친구를 끝까지 지킬 수 있다고 믿는 신념이기에... 그렇지만 그가 나를 믿고 적극적으로 권해준 일자리로 가족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수 있게, 경제적으로 크게 성공할 것이라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18세 때 독립|
대부분의 뉴질랜드인이 그렇듯, 나의 친구 그랜트도 아주 오래전 그가 10대 후반이었을 때, 넉넉지 않으셨던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한 후, 작은 시골 마을에서 뉴질랜드의 가장 큰 도시인 오클랜드로 이주 후 건설 용역 등의 여러 가지의 직업을 거친 후, 당시 회사의 매니저의 자리에 꽤나 젊은 나이인 30대 초반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15살 때부터 기차를 타고 집으로부터 먼 거리에 위치해 있었던 공장에서 방학 때마다 일을 해서 모은 돈으로 상경할 차비와 일자리를 구할 때까지 한동안 쓸 수 있을 돈을 마련하여 18살에 대도시로 온 것이라고 한다.
무일푼에서 정말 많은 재력을 일구어 낸 성실하고 성공적인 그는 자기 관리도 철저하여서, 그 당시 60대가 가까운 나이임에도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운동을 하고 식단도 잘 관리하여서인지 건강 검진의 신체나이가 30대 이라며 기뻐하였었다. 더 놀라운 것은 70대 후반이 된 지금의 그가 그 덥디 더운 인도네시아에서도 매일 새벽 운동과 식단을 아직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역시 성공한 사람들의 끈기와 자기 관리는 나와 같은 평범한 이들과는 다른 레벨이라는 것을 느꼈다. 여러모로 참 내가 배울 게 많은 존경하는 어른이셔서, 긍정적이고 선한 영향력을 내 인생의 여러 방면에 끼쳐준 고마운 친구이다.
그 당시 그는 오클랜드 시내의 유명한 부동산 회사의 매니저로 일하고 있으면서, 자신의 사업채도 관리하고 있었다. 현재는 일선에서 퇴직하여 십여 년째 발리에서 호텔과 리조트를 사서 생활하고 있고, 곧 다시 뉴질랜드로의 이주를 고려하고 있다고 하였다.
|생각지도 못한 스카우트|
그는 일단 오랫동안 나를 보아 왔었기에 나의 성격과 인성을 잘 알고 있었고, 또한 내가 초밥집을 운영할 때에는 새벽 6시부터 저녁 7시까지 주에 6일을 쉬지 않고 일을 했었다는 것, 또 면세점에서 일할 때에는 세일즈왕으로 여러 번 보너스를 받았던 것, 그리고 그 후 다닌 메씨 대학에서 거의 A학점으로 졸업한 후 지난 2년여간 보험회사의 콜센터에서 근무했었던 것들을 알고 있다는 전제가 있다.
당시 근무하던 보험회사가 있는 웰링톤에 살고 있다가 휴가차 오클랜드의 가족을 방문할 당시에 아주 오랜만에 연락이 되어서 그랜트 씨와 커피를 마시기로 하였다.
내가 보험회사 콜센터일을 그만둘 생각에 대해서 고민을 상담하자, 그는 내가 화장품으로 세일즈왕이 되었던 판매의 재능을 부동산업에 발휘하게 된다면, 자신과 같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며, 자신이 매니저로 있는 당시 오클랜드에서 가장 큰 부동산 회사로 스카우트를 하고 싶다고 이야기를 하였다.
|고정수입 없는 일은…|
나는 보통 규칙적으로 들어오는 수입에 의한 예측가능한 저축, 지출 그리고 미래의 계획을 하는 사람이다.
그도 나의 이런 성향을 잘 알고 있었기에, 내가 그의 회사에서 보통 성과급 혹은 부동산 커미션만이 주 수입인 부동산 에이전트로 일하게 된다면, 파격적으로 내가 수입이 없을 경우를 대비하여서 보험회사에서 받던 월급보다 30프로나 많은 월급을 보장 (Guaranteed Monthly Income) 해 주겠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나의 수입이 보장한 월급의 반밖에 안 되는 달에는 그 반을 채워주거나, 하나도 못 벌게 되면 100프로를 내준다는 나만을 위한 특별 맞춤 조건이었던 것이었다.
나는 나의 절친이라서 그러한 오퍼를 하는 것이라면, 더더욱이 받아들일 수 없다고 완강히 그렇지만 진심으로 감사하다며 극구 사양을 하였다.
|친구끼리의 사업관계는 쫌...|
친한 사이에 일, 사업 그리고 금전이 얽히면, 귀한 친구를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은 당연한 원리이기에 나로서는 당연한 답변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나에게, 자신은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이지만, 동시에 몇십 년 차 경력의 사업가이기에, 본인의 사업에 마이너스가 되는 결정은 하지 않으며, 그리고 "일자리 제의"도 친구나 가족이라 할지라도 성공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게다가 자신은 내가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을 한다고 하였다. 그의 말이 정말 고맙고 또한 내게는 또다시 새로운 도전에 응할 큰 용기가 되었다.
또한 내가 경제적으로 성공한다면, 언젠가 만날 아이들에게도 아낌없이 지원을 해 줄 수 있을 것이고, 한국에 계신 내 엄마께도, 넉넉한 생활비도 보내드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기에, 부동산 중개업자가 되기 위해, 웰링톤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6년 만에 오클랜드로 돌아오게 되었다.
|부동산 에이전트|
나는 그의 말에 힘입어서 부동산 에이전트 자격증을 땄고, 그에 필요한 교육들도 이수한 후에 , 오클랜드 시내 지점에서 곧 일을 시작하였다.
나의 얼굴과 이름이 나오는 명함, 신문 광고, 잡지 광고 등 아주 바쁜 첫 2주를 보냈다. 그리고 바로 일을 시작한 셋째 주에 나는 새로 지은 뉴마켓의 아파트를 세 채나 팔아서 나의 친구도 다른 부동산 에이전트들도 놀라워했었다. 아주 오래전이었는데도 그 한 주치의 커미션 (복비, 뉴질랜드는 복비가 3프로 정도 된다) 은 그전에 다니던 보험 회사에서 버는 연봉의 반 정도가 되는 큰돈이었다. 당연히 나는 친구가 약속해 준 수입 보장을 받을 필요가 없게, 그 후에도 매달 수입보장액보다 높은 수입이 생겨났다.
조금씩 인지도가 쌓이며, 여러 주택과 아파트의 주인들의 의례를 받아서 일을 해나가고 있었는데, 나에게는 생각지도 못했던 또 다른 도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공인" 새로운 풍차|
내가 오클랜드가 아닌 웰링톤으로 내려가게 된 근본적인 이유, 일부러 한인들을 피해서 조용한 웰링톤에서 지내기를 원했었던 나였었는데, 한인 신문 그리고 한인 잡지에까지 나의 광고가 실리게 되었고, 나는 마치 무슨 공인 같이 되어버리는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세상 모든 것에는 거저 얻어지는 것은 없듯이, 그 기회비용이 따를 것이고, 행여 내가 경제적으로 성공하여 나의 가족들을 도울 수만 있다면, 감당해야 할 나의 몫일수도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나의 이름과 얼굴이 만천하에 알려지니, 집을 사겠다고 또 팔겠다고 연락하는 이들 중에는, 주택 매매거래가 아닌, 혹시 어디 어디에 사시던 누구누구 아니신지요? 혹시 누구누구 엄마 아니세요? 하는 분들도, 어떤 한국 여성은 자신이 시내의 아파트를 사고 싶고, 자신의 가게가 8시에 끝나니 태우러 와라, 막상 가면, 마지막 손님이 있으니 일 좀 도와달라는 분도 있었고, 또 몇몇의 남성분들은 집을 사겠다고 하여서, 나의 차로 여러 곳의 관심이 있다던 집들을 보여드렸는데, 집보다는 젊은 여성 에이전트에 관심을 보이는 등등의 여러 당혹스러운 폐해가 생겨나기 시작했었다.
늘 밖으로는 밝은 척 그러나 내면은 한없이 소심하고 공사 구분을 확실히 하는 것을 삶의 원칙으로 생각하는 내가 만족할 수 있는 직업이 아니라는 것을 몇 달의 시간이 지나면서 더더욱 느끼게 되었다.
|생활 루틴|
게다가 늘 규칙적인 루틴에 의해서 생활하던 나와, 프리랜서 스타일일의 직업이라 밤에도 주말에도 일을 하며 원치 않는 사회생활도 하며 발을 넓혀가야 하는 직업이, 개인시간과 사생활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와는 정말 맞지 않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부동산 경기마저 악화가 되어서, 한 번도 친구가 제안한 월급 보장금을 받지 않았었는데, 받아야 할 일이 생겨나 버렸고, 나의 삶의 지표마저 잃기 전에 나는 바로 사표를 내게 되었다.
물론 그로부터 불과 2~3년 뒤, 부동산 붐이 시작되어 당시에 에이전트를 하던 중국 친구는 꽤나 많은 부를 축적하였고, 내가 약대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그녀는 대 저택을 몇 개나 소유하게 되었지만, 나는 지금 생각해 보아도,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역시나 그 일을 그만둘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물질적인 부자로서의 삶은 아닐지언정,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의 방식과 가치를 지키며 살 수 있고 고로 마음만은 부자일 수도 있는 약사로서의 길을 택할 것이다.
|틈새 자격증|
부동산 일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는 그 틈새 기간 동안 시간을 좀 더 유용하고 가치 있게 쓰고 싶어서, 자격증 모으기가 취미인 나는 TESOL 자격증과 통역사 자격증 코스도 마치며 보험회사 근무 시에 따 두었던 금융 보험 자격증 외에도 두 개의 자격증을 더 보유하게 되었다.
그리고 생각지도 않게, 같은 테솔 코스를 하면서 알게 된 한국 동생의 소개로 오클랜드의 번화가인 뉴마켙의 웨딩샵의 매니저로의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웨딩샵의 매니저로 일하면서 호주 시드니의 웨딩쇼에도 참석하며, 나름 재미있고 보람된 일을 하고는 있었지만, 나이가 들고서도 오랫동안 안정되게 할 수 있는 전문 직종을 찾기 시작했고, 그때 마지막에 추린 두 개의 일자리는 한의사와 약사 직종이었다.
| 외국 한의사 vs 외국 약사|
그런데 외국에서 운영되는 사립 한의대 과정을 하는 곳들은 한국의 정식 한의대학 과정과는 아주 확연한 차이가 나는 것으로 보였다. 한의학 과정을 이곳 뉴질랜드에서 나오고도 일을 못 찾거나, 자신의 한의원을 차렸다가 망하는 사람들도 여럿 있음 또한 지인들로부터 듣게 되었다. 물론 모든 분들이 다 그러신 것은 아니고, 몇몇 분은 성공적으로 또 사명감을 가지고 환자분들도 돌보시고 사업도 잘 운영하시는 곳도 있으실 것이다.
한의대라고 불리는 곳들도 실제로 가본 후, 내가 개인적인 느낌으로만 말하자면 ( 그저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그저 작은 학원 규모에 입학도 한국에서 높은 수능점수를 받아야 들어갈 수 있는 한의대학교하고는 판이하게, 별다른 조건이 없이 입학이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일례로 지금 여의도에서 큰 한의원을 하고 있는 친구는 고교시절 반에서 늘 1~2등을 하던 친구였다.
많은 한인 분들이 이곳의 한의원을 찾으실 때에는 한국에서 원래 한의원을 하시다가 이곳으로 이주 후 개원 한 곳, 그리고 한국에서 한의사 면허를 가지신 분들의 한의원들을 선호하고 있다며 내게도 권해주기도했다. 그래서 이런저런 리서치 후에 나는, 뉴질랜드 정부에서도 정식으로 인정되는 그리고 뉴질랜드 현지인을 포함한 다양한 환자분들을 돌볼 수 있는 약사가 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결국 40에 약대|
결국 약대에 가기로 결정한 때는 내가 40세가 되던 해였다.
물론 그전 몇 해를 이런저런 공부와 직업들 사이를 방황하며 허비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방랑기가 없었더라면, 굳이 진지하게 미래를 진지하게 고려하고 계획하며 다시 전문직을 위한 공부를 할 용기 또한 없지 않았을까 또 여성 피난소의 바닥에서부터 그 자리까지라도 온 자신을 변호해 본다.
결국 약대를 가기 전까지 한국도 아닌 뉴질랜드에서 내가 거친 직업은 첫 번째 면세점 리셉션, 랑콤 매니저, 보험회사, 부동산 그리고 웨딩샵 매니저 총 8년의 여러 갈래의 길을 돌아온 세월 후에 드디어 40살이 되어서야, 오클랜드 생활을 정리하고 내가 나온 오타고 대학교가 있는 더니든으로 이주를 하게 되었다.
"인생이라는 여행은 계획을 하여도 때로는 전혀 새로운 곳에도 이르게 되는 불가사의한 그렇지만 꽤나 흥미진진한 "나"라는 가이드가 여행의 승패 흥망의 열쇠라는..."
**이미지: Pexel,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