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사생활 지킴이“
|해외 첫 취업|
뉴질랜드 영주권 자였었기에 받을 수 있었던 정부 보조 중의 하나로 영어 학원에 무료로 다닐 수 있었던 것은 지금까지의 뉴질랜드 생활의 기반이 되었던 절대적으로 필수적이자 귀중한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오클랜드 시내에 위치해 있었던 랭귀지 스쿨에서 영어 공부를 풀타임으로 6개월가량을 수험생모드로 마친 후, 뉴질랜드인이고 원래 변호사였었던 영어 학원장의 추천서를 받고 나는 시내에 위치한 면세점의 리셉션니스트로 뉴질랜드 또 해외에서의 인생 첫 취업을 하게 되었다. (최종면접일이 2001년 9월 11일이라서 이 글을 쓰다가 문득 마음이 찡해져 버려서, 짧게 "911 날의 면접" 글을 올리게 되었다)
|일 안 해도 살 수 있는 뉴질랜드?|
2000년도 초반당시에는 다른 많은 아시안 이민자들이나 뉴질랜드의 원주민인 마오리 혹은 섬나라 이민자들이 나라에서 주는 실업수당을 놓치기 싫어서 일을 아예 안 하는 경우가 많았었고, 20여 년이 지난 현재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높은 실업 수당 (고로 세금도 아주 높음)으로 인하여, 일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게 아닌가 하는 의견도 많았으나, 실업 수당자체는 그저 빙산의 일각일 뿐, 그 외에도 다양한 의료비 보조, 렌트비보조, 복지 보조, 자녀 교육비와 생활비 보조, 싱글맘 보조 등등 (너무 많아서 검색을 하고도 일부만을 나열했다) 일을 하지 않고도 여유롭게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게 놀라운 이곳, 뉴질랜드라고 한다.
일례로 골프와 요가, 필라테스를 즐기며 오클랜드의 좋은 카페와 레스토랑 인간 백과사전이며, 다양하고 여유로운 문화생활을 누리며 살고 있다고 말해준, 나와 비슷한 또래의 한국여성이 약국에 온 적이 있었다. 계산해 보니 일해서 얻는 이득이 얼마 없다 생각하여, 막 시작한 일을 그만두고 다시 예전처럼 여유롭게 지내기로 하였다고 하였다.
그녀처럼 마음을 비우고, 주어진 것만 가지고도 편하게 행복하게 살며 본인이 만족한다면 잘 사는 인생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추구하는 가치관은 다르기에…
나는 늘 쌓여있는 해야 할 일들에 과제들, 또 불확실한 미래의 계획들에 조바심을 내고 사는 사람이다 보니... 현재에 집중하고 행복해야 한다는 원칙을 글로 쓰기 시작하면서, 나도 그러고자 노력해 보리라 다시 다짐해 본다.
|미련 곰탱이 나?|
어떤 이들은 실업수당을 유지하면서도 할 수 있는 캐시잡 (비공식적으로 법정 시급보다 낮지만 세금을 내지 않고 현찰로 받는 일, 그러나 뉴질랜드에서는 불법임)을 찾거나, 혹은 실업수당 담당 정부기관에서 압박을 하게 될 경우에만 최소한만의 파트타임을 하다가 그만두면 된다며, 지인들에게만 알려준다던 나름의 현지생활에서 터득한 팁 혹은 삶의 지혜라고 알려주고는 하였었다.
그들 중 몇몇은 그 당시에 내가 찾은 풀타임 자리가 실업자 수당보다 세금을 제하면 불과 주에 $100 (당시 환율로 63000원 경) 정도만 더 받는 일자리였었기에, 나의 결정을 현명하지 못하고 타산이 맞지 않는다며 의아하게 생각하였었다.
그렇지만 나는 언젠가 (곧이라고 생각했었다, 25년이 흐를 것이라곤 상상도 못 했다) 나를 찾은 아이들 앞에서 무력하게 나라에서 주는 실업수당이나 받으면서 제자리에 머무르며, 허송세월을 하고 있는 엄마의 모습으로는 절대 보여주고 싶지 않았었기에, 박봉인 시작이었어도 제대로 된 일자리를 찾고 공부하며 발전해 나가는 홀로서기에 최선을 다하려 악착같이 살아온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 엄마가 좋아하시던 성경 구절을 되새겨 본다. 미약한 시작이었고, 아직까지는 창대한 성과에는 절대 이루지는 못했지만, 여전히 진행형이니 언젠가는 만족에 가까울 날이 오리라 희망하며 살고 있다.
|뉴질랜드에서 맞닥뜨린 일본어 장벽?|
영어는 그나마 영어 학원에서 반년 정도 공부한 후에 조금은 나아졌었지만, 아직도 전문직을 가지기에는 턱없이 서투른 수준이었기에, 영어 공부에 집중하며 새로운 직장에서 최선을 다하리라 다짐하였었다. 그런데...!!
영어권인 뉴질랜드에서 또 다른 외국어가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어버렸다.
일본어는 대한항공 승무원 때 기내 방송용과 기내 서비스용으로 승무원 연수기간 중 배운 게 다인 제한적인 능력 (“하늘에서만 할 줄 아는 일본어“라고 우리끼리는 말하곤 하였다)이었었다.
지금은 엔저현상 혹은 국내여행을 장려하는 일본 국가 정책 때문인지 요즘은 뉴질랜드를 찾는 일본인 관광객이 거의 없지만, 2000년도 초반 당시에는 많은 일본인들이 찾았었던 뉴질랜드의 면세점의 리셉션데스크에서 일본어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직원은 나밖에 없었고, 그렇지만 그래도 그곳은 영어권의 나라였기에, 일본어가 나에게 직업의 장벽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도 못했다.
|마사코상, 영어로 말해주세요!|
일본의 마케팅 담당이었고, 일본 직원들 사이에서도 악명 높기로 소문난 마사코라는 40대의 여직원은 리셉션으로 내려와 나에게 업무 관련 이야기를 단 한 번의 망설임이나 주저도 없이 아주 빠른 일본어로 하기 시작하였었다. 나는 일본어를 할 줄 모르니, 영어로 이야기해 달라고 하였었고, 그녀는 깜짝 놀라며 히스테릭하게 소리를 쳤었다. 누가 도대체 일본어를 할 줄 모르는 직원을 면세점의 리셉션직원으로 뽑았었냐고...
나는 한국인 마케팅 매니저의 추천으로 지원하게 되어서 일을 하기 시작하였었고, 한국인 관광객들과 여행사 그리고 가이드들의 업무 그리고 한국 마케팅부의 일들을 도와주며, 동시에 면세점을 찾는 모든 국적의 고객들에게 안내를 해주는 뉴질랜드 기업의 리셉션니스트였는데도...
2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일본 여행을 좋아하게 되어서 다시 독학으로 일본어를 시작하여 공부하고 있고, 그때 더 열심히 일본어공부를 못한 게 못내 아쉽긴 하다.
|암기왕 리턴즈|
나는 학교시절 수포자이면서도 대학입시에 성공했었던 암기왕 실력을 되살려, 일단 리셉션 업무에 필요한 일본어 회화와 방송, 쇼핑 안내 브리핑, 전화응답, 안내방송용 일본어를 모조리 외우면서 기초 일본어 공부에 들어갔다.
그렇지만 뉴질랜드에 와서도 주로 집에서 주부로 살다가, 잠깐 초밥집을 운영했었던 나에게 영어는 더더욱 넘기 힘든 높디높은 산이었다. 특히 첫 번째로 외국에서 가진 직업이 면세점 리셉션 안내 데스크여서, 매일 전화를 받고 면세 쇼핑 안내를 영어와 일본어로 해야 하는 업무라, 언어에 의한 스트레스와 차별에도 절대 그만두지 않고, 꿋꿋이 버틴 지 1년 만에 모든 면세점 여직원들이 가고 싶어 했었던 랑콤의 카운터 매니저 자리로 옮기게 되었다.
바로 그때 나의 잠재적이고 미처 발견되지 않았던 판매왕의 재능과 기술, 또 대한항공과 신라 호텔등의 무수한 과거의 서비스업에서 습득한 고객 대응 능력과 나의 밝은 성격의 시너지 효과가 여기서 발휘되며 나는 전체 판매 1등 상을 받고, 때로는 월급보다 더 높은 세일즈 보너스를 받기도 했으며, 또 해외에서 열리는 랑콤 매니저 컨프런스에도 참석하게 되었다.
"그저 포기만 하지 않고 일단 버텨내면서 자신의 일과 공부에 꾸준히 거북이처럼 전진하다 보면, 지금은 보이지 않는 그 작은 먼지 같이 느껴지는 노력들이 모여 나중에는 큰 뭉치의 결과를 낼 수도 있다"는 일말의 한 줄기 빛과도 같은 희망을 얻은 나의 해외 첫 취업 그리고 전업 케이스였다. 그 후로도 인생 통틀어 가장 길게 일하고 있는 지금 현재의 직업을 가질 때까지 나의 전업은 계속되었다.
|타지라서 혼자라서 더욱 반가왔었던…|
그 무렵 아직 30대 초반이었던 나는, 외로왔던 여성 피난소를 거쳐서 또 의기소침해 있던 영어학원을 마치고 아직도 절대 익숙해질 수 없었던 홀로서기 후, 뉴질랜드에서는 처음으로 가진 직장, 그리고 새로 만난 동료들이 너무 좋고 행복하며, 또 진심으로 반가워서, 나의 새로운 인생이 드디어 순조롭게 시작되고 있다고 혼자만의 착각을 하고 있었다. 특히나 한국 그리고 일본 관광객이 많았던 그 시절이어서, 한국 직원들도 많았었고, 다들 자주 식사도 하며 친하게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 당시의 나는 머지않아 곧 다시 아이들을 만날 것이고, 다시 가족과 함께 살 것이라고 믿었었고 또한 내가 부끄럽게 숨겨야 하는 과거들도 전혀 없었기에, 나와 처음 동료로 만나서 친해지던 한국 동료들이 한국식으로 내가 미혼인지 기혼인지 등의 개인적인 것들을 물어보았을 때 나는 다 사실대로 말하였었다.
굳이 거짓말을 할 이유나 필요는 없었기에 또 누구나 다들 그러리라고 생각도 하였었다. 그 후폭풍과 결과를 다 아는 지금은 다시 돌아보니, 나이 30도 넘은 그때의 나는 너무 철없고, 순진하고, 어리숙하기 그지없다.
|아무도 믿지 마, 나를 포함해서|
그런데, 내가 만난 사람들 중의 대다수의 동료들은 자신들을 믿고 사실대로 말한 나의 개인사 그리고 나의 귀한 가족사를 건조하고 무료한 뉴질랜드 생활 중에 모처럼만에 만난 단비같이 재미난 가십거리인양 이곳저곳에 이야기를 하며, 그중에 나보다 몇 살 어린 한국 여자직원은 내게 "언니 여기 사람들 아무도 믿지 마. 언니 이야기 절대 남한테 하지 마, 아, 나도 믿지 마 나도 자신 없어"라며 미리 선전 포고까지 해가며, 소문내기에 합세를 하며 보이지 않는 신경 구도를 곤두세우게 하는 드라마들을 만들어 갔었다는 것을 곧 듣게 되었다.
나의 단순한 두뇌로는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들 여러 가지 인생사들과 사연들에 또한 각자의 목표를 가지고 한국을 떠나서, 이 외롭고 머나먼 타지, 뉴질랜드에서 해외생활을 시작하였을 테고, 더욱이 그 많은 곳 중에 같은 일터에서 만난, 또 같은 동포인 한국인 직원들끼리, 서로 아껴주며 힘이 되지는 못하고, 언어가 모국어이기에 속속들이 통하는 이들끼리 서로의 가십이라니....
나는 다시 한번의 사람과의 큰 상처 후 다시 대학을 갈 때에는 한인들이 많지 않은 웰링톤으로 옮겼고, 그 당시에 알고 지내던 지인들과는 지금까지도 별다른 왕래 없이 혼자서 바쁘게 할 일과 공부들을 계획하며 나름 열심히 잘 살고 있는 것 같다.
|찐 절친은 허상|
그중의 한 명은 나와 아주 절친을 넘어선 찐 절친으로 거의 1년을 매일 같이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또 쉬는 날에도 만났던 1살 아래 동생이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어느 날, 늘 하듯이 같이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재미난 수다를 떨고 온 바로 다음날 회사를 그만두었다. 이미 4주 노티스를 주고는 그 4주는 휴가로 쓴다고 하여, 나와 점심을 먹은 바로 그날이 그곳에서의 마지막 날이었다고 다음날 매니저한테서 들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나와 거의 매일 1년을 어울렸었던 그녀는 나에게 말했었던 그녀의 나이도, 가정사도, 결혼사조차도 다 드라마처럼 사실인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 그야말로 1년 동안 내가 그녀와 같이 나누었던 시간, 대화, 우정, 그리고 그 많은 서로의 고민 상담 등등이 나 혼자만의 진실과 상대방의 드라마나 영화 같은 그녀의 머릿속 꿈꾸던 상상뿐인 허상이었던... 그녀와의 시간 후에 나는 절대적인 허탈감과 좌절감 그리고 배신감 등 말로 형용 못할 감정들로 뒤통수를 다시 한번 아주 세게 된통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그 힘들고 어두운 터널 같은 시간들을 버텨내고 드디어 찾은 설레고 행복했던 일상의 일터에서, 진짜 친구를 만났다고 생각했건만, 게다가 나는 그녀가 부자이건 유명인이건 전혀 상관이 없었고 그저 마음 통하고 믿고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가 필요했었고, 그게 바로 그녀라고 믿은 그 1년 후엔 더 이상 친구를 찾기 않기로, 진정으로 혼자 홀로서기를 하리라 마음을 먹게 되었었다.
|사생활 잠금장치가 키|
내가 경험해 보고 느낀 결론은 해외에서 특히나 이혼 후 홀로서기를 위한 생활을 할 때에, 진심으로 안정되게 살고 싶다면, 개인사를 남에게 절대 말할 필요도, 남의 도움을 받을 필요는 더더욱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일례로 이곳에선 취업 면접에서 나이나 결혼 유무등을 묻는 것은 차별이 될 수 있고 또한 불법이기에, 먼저 말하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지난 20여 년간 진짜 가족 같이 지내는 25년 지기 동생과, 나의 가족 외엔 아무에게도 나의 사생활을 얘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현재 대부분의 뉴질랜드인 지인들은 나의 나이조차도 알지 못한다. 단지 외모로 대충 한 40살쯤 되었을 거라 짐작을 하곤 한다. 워낙 어려 보이는 동안 얼굴의 한국인의 강점을 나도 지닌지라.
결론은 해외에서 이혼녀로 성공적으로 홀로서기에 생존하려면, 또 나와 같이 딱히 새로운 배우자를 찾을 계획이 없다면, 자신의 개인사에 대한 이야기를 보호하고, 소중한 추억은 소중한 채로 홀로 간직하라고 나의 좌충우돌 격동기 같은 경험과 주위의 많은 홀로서기 여성들을 지켜본 후에 내린 결론이며, 진심으로 권해드리고 싶다.
|공부만이 살길|
그저 자신이 현재 하고 있는 일에, 자신이 나중에 꿈꾸는 일을 위해,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깨닫고 조금씩 공부하며 자기 자신을 계발하다 보면은, 실상은 남들과 어울릴 시간적 여유도 없으며, 그로 인해 상처받을 일은 더더욱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미 한차례 큰 아픔을 겪고 새로운 삶을 그것도 혼자 시작해야 하는 이들이라면, 자기 자신을 보듬어주며, 혼자만의 귀중한 돌아봄의 시간으로 앞으로의 생활과 인생에 대해 계획을 하며, 그것에 한 발 한 발 다가가기 위한 밑거름들을 장만해 보라고 진심으로 추천해드리고 싶다.
나의 경우에는 물론 아직까지도 언어는 큰 장벽이지만, 운전 중에는 늘 현지 라디오를 듣고, 집에서 쉬는 시간에도 배우고 싶은 언어로 하는 방송을 보며, 일에 관련된 업데이트도 빼지 않고 공부를 하는 것을 쉬지 않고 하는 것을 루틴으로 만들었다.
또한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는 자신의 분야의 실력과 지식으로 환자들과 손님들에게 믿음과 확신을 주는 것이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임을 깨달았기에, 새로운 의약품이나 치료법이 발표되면, 다른 약사동료들과 하는 스터디 그룹으로 함께 의논하며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물론 삶은 끝없는 배움의 과정들이고 짧디 짧은 인생이라는 여행동안 모든 것을 깨닫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무언가를 배우고 있다는 기쁨과 설렘은 죽기 전까지 포기할 생각이 일도 없기에...
**이미지: 별 연관은 없지만 제가 직접 찍은 사진들을 올려보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