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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talie Nov 13. 2024

|남루한 곳에서 시작|

   "첫 홀로 보금자리“


|차갑게 대해줘서 고마왔어요|


드디어 나의 인생에서 가장 길디 길은 마치 2년과도 같았던 이틀밤의 주말이 지나고, 그 당시의 나에겐  마치 구세주 같으셨었던 여성 피난소의 한국인 직원분께서  월요일 아침 9시에 출근을 하셨다.


조금은 퉁명스러우신 듯 보일 수도 있을 정도로, 약간 차갑고 쿨하신 성격의 한국 직원분은 필요한 일과 도움을 줄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 조금은 사무적으로 또 논리적으로 이야기해 주셨다.  나에게는 다른 보통의 한국 아주머니들처럼 너무 살갑게 대해주면서, 이것저것을 자세하게 물어보며 걱정해 주는, 소위 인정 많다는 사람들보다 훨씬 듬직하시고 되려 나의 일이 아무 일도 아닐 수 도 있겠다는 마음의 안정이 되었던 것 같다.




그렇게 말씀과 설명을 해주시는 동안, 지난 이틀 밤사이 최고치와 최저치의 줄넘기를 하던 나의 감정과 울분이, 그저 이제는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 속에서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지금 나의 처지에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와 그리고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금방 해결될 일이 아니라면,  다음 몇 주간의 가능한 행보를 이성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마음가짐을 조금은 되찾게 된 것 같다.


나와 같은 감정적이고 감성적인 성격이라면, 도와드려야 하는, 한 분 한 분마다 감정이입이 되어서, 혼자서 떠안기엔 벅차서 밤마다 아마 잠도 못 자지 않았을까 싶었다.  


"차갑고 이성적이고 또 냉정하게 대해주셔서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긴급보조지원금|


한국 직원분이 처음으로 또 급선무로 진행 주셔야 했던 일은 긴급 정부 보조금 수령을 신청하는 업무였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빈털터리라고 한탄했었던 나였었지만, 나에게는 뉴질랜드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하고 기본 중의 기본이 되는 뉴질랜드의 영주권이  있었다.

참으로 내게는 신의 한 수이자, 7년간의 결혼생활 후 위자료가 영주권인 셈이었다.


빈털터리는 아니었어 그래도....



 뉴질랜드에서는 영주권을 획득한 지 2년 이상이 지나야, 정식으로 정부 보조금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지는데, 당시에 나는 1년도 채 안된 상태라서 보조금이 전혀 지급이 안 되는 상태였었다.


 그렇지만, "Emergency Benefit (긴급 보조 지원금)"라는 것이 있어서 급박한 상황에  재정 지원이 필요한 어려운 사람들에게 임시적으로 지원을 해주는 제도가 있기에 신청을 할 수가 있었다.  나와 같이 갑자기 무일푼으로 여성피난소에 들어온 사람에게도 적용이 된다고 하여서, 바로 그다음 주부터는 긴급 정부 보조금의 일부로 여성피난소의 방값을 낼 수 있게 되었다.


말하자면, 적극적으로 도와주신 덕분에, 무료가 아닌 유료로 같은 방에 몇 주 더 머물 수 있는, 서로에게 도움과 이득 (win-win)이 되는 첫 번째 업무였었고, 또한 가장 급선무였기에 가장 먼저 해결해 주셨던 것 같다.


마치 사막에서 길 잃은 나에게 생수를 주기적으로 박스채 가져다준다 약속을 것과 같은 상상 하지도 못했었던 도움이었다.


뉴질랜드정부에 그리고 피난소 직원분에게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기에, 지금 일하면서 내는 막대한 세금에도 일말의 불만도 없이 감사히 납부하고 있다.




|그 후 25년|


그 무렵 아직도 나는 곧 상황이 좋아지고, 안정되고 안전한 생활의 확신만 생기게 된다면, 다시 우리 집으로  돌아가서  예전처럼 살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그렇지 않았었다면 그렇게 힘든 당시의 시간들을 버텨내지는 못했을 거다.


그런데, 그러고는 그 후 25년이나 흘러버릴줄은 상상조차도 해본 적이 없었다. 물론 지금도 진행형...


첫 보금자리,  Huia (후이아) 호스텔, 며칠 전 앞을 지나다가 찍어보았다.

   


여성피난소에서는 4-5주간 지내다가 주별로 지급되는 정부지원금이 확정된 이후엔, 기숙사처럼 생긴 호스텔에 방 한 개를 얻어 이사를 나올 수 있었다. 한국의 고시원 같은 사이즈에 부엌과 욕실, 화장실은 공동으로 사용하는 곳이었다.


나는 여성 피난소를 떠나기 전에 3명의 하우스 메이트들을 다시 같은 슈퍼로 데리고 가서 이번엔 $100 어치 장을 보게 해 주었다. 물론 2 자루의 당근과 그녀가 좋아하는 치킨 라면도 홍에게 사주었고, 그녀는 마치 세상에 남은 그녀의 마지막 한 명의 친구가 떠나가듯 눈물을 흘렸다.


당시엔 둘 다 이메일도 할 줄 모르고, 핸드폰조차도 없었던 시기였는 데다가, 나는 나대로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것도 해외에서 빈털터리부터 새로 시작하는 가장 낮고 남루한 시기였기에, 여성 피난소에서 만났던 이들과는 그 후론 다시 연락할 여유도 방법도 없었다.



25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가끔 그 착하디 착한 홍이 과연 그녀의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는지, 지금은 어디서 그 착한 미소로 다른 사람을 훈훈하고 행복하게 해주고 있을지 문득문득 생각을 한다.


당시 세 살이었던 꼬마가 지금은 28살의 청년일 텐데....


그녀가 행복하고 안전한 곳에서 아들과 같이 살고 있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이미지: Pexel,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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