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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talie Dec 11. 2024

|40살에 빵점을 맞다니...|

  "실화냐고요? 넵 실화입니다 “

|수학을 못하는 영특한 아이|


말하기도 걸음마도 그리고 새로 가르쳐주는 것들도 다 다른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빨리 배우고는 했었다며, 늘 영특한 아이라고 불려지던 어린 시절부터 이상하리만큼 나는 간단한 산수 외의 모든 이과과목을 좋아하지도  그리고 잘하지도 못했었다.


자연스레 난 고등학교 때 문과를 선택했었고, 대학도 당연히 문과전공인 이문동에 위치한 대학교의 불어과를 졸업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의 삶동안도 따로 이과 과목을 잘하지 못했기에 인생이나 직업면에서 어려움은 딱히 직면할 일이 없이 잘 살아왔었던 것 같다. 마흔 살이 되기 전 까지는...


이과 과목은 그저 열심히 공식이나 개념을 암기하는 것만으로는  습득되는 것이 아닌, 원리의 이해와 그 개념을 바탕으로 한 응용과 연결고리를 이해하면서 해야 하는데, 나한테는  이과 쪽의 뇌가 아예 기능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의문이 들 정도였었고, 따라서 대학 입시 준비 중에도 가장 복병이 수학과 화학 쪽의 이과 과목들이었었다.


거의 수학을 포기하다시피 하였었기에, 다른 문과 과목은 거의 90프로 이상을 맞아야 원하는 대학을 지원할 수 있을 정도여서, 암기 과목과 언어 영역분야는 최대한의 점수를 따기 위해여서 최선을 다하여 학업에 총력을 기했었다.


노력만으로는 되지 않는 수학과 화학 등의 이과 과목들을 거의 포기하고도, 평창동 부촌에 위치해 있었던 사대 부속 고등학교 3년 내내, 반의 60명 중 늘 상위권을 놓치지 않았었을 정도로, 그리고 나름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다고 믿는 대학교에 입학했을 정도로, 정말 열심히 노력하며 공부하였었던 학생이었다고 자부했었다.






|자연에서 뛰어놀던 어린 시절|


우리 엄마께서는 내가 3살일 때부터 "아모레 아줌마"로 첫 직장을 시작하신 후로는 늘 쭉 일을 하셨었고, 다른 형제자매와도 나이차이가 꽤나 나는 막둥이였던  나에게 공부를 하라고 권해준다거나, 그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는 가족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하여 초등학교 전체 6년 동안은 서울인 도시에서 태어나서 자라났음에도, 거의 밖에서 산이나 들 그리고 동네 놀이터에서 강아지와 뛰어놀면서 무척 행복하고 재미난 어린 시절을 보냈었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가끔 꿈을 꾸면 내가 어렸을 시절에 살던 집으로 뛰어들어가는 반복적인 장면이 나오고는 한다. 그만큼 나는 그때가 행복했었고 엄마가 계셨던 내 집이 실로 그리웠었나 보다.


지금 생각을 해보아도, 초등학교 시절에 학교 수업 외에 단 한 번도 시험을 위해서도 공부를 해본 적이 전혀

없었고, 그러던 어느 날은 엄마께서


"선영아, 내일  시험 본다고 아래층 유리가게에 사는 네 친구, 현주는 공부하던데 넌  안 하네?"


라고  말씀하셨을 때도 나는 다음과 같이 해맑게 대답하여 온 가족이 배를 잡고 웃기도 하였었다.


“ 엄마 나는 공부를 하나도 안 해도, 자신이 아주 철철 넘쳐 “


실제로 시험준비라고는 아침밥을 아주 실하게 먹고, 시험날 참석만 했었던,  나였음에도 반에서 중간 정도는 그래도 하였고, 당시엔 산수경시대회에서도 어쩌다 100점 상을 받는 둥 그나마 머리가 아주 심하게 나쁘지는 않았었던 듯하다.





|졸업 후 첫 부임하신 선생님|


중학교도 당연히 초등학교의 연속처럼 공부를 도통하지 않고 또한 필요성을 느끼지도 못한 채, 아무 생각 없이 엄마가 싸주신 맛있는 도시락 먹는 재미에 일 년을 다니고는, 또 세월은 흘러 중학교 2학년이 되어버렸다.


막 교육대를 졸업하신 후 부임하셔서 처음으로 우리 반의 담임선생님이 되신 후, 나라는 아이를 지켜봐 주시고 또 나에게 공부에 대해 난생처음 권유해 주셨던, 나의 “김완기 선생님”을 만나게 된 이후로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부를 해봐야겠다고 마음먹게 되었고, 그로 인해 나의 미래와 인생의 진로가 바뀌게 된 큰 전환점이 되었다고 단언한다.





|선영야, 너는 영리한 아이야!|


김완기선생님께서 어느 날 방과 후 오후에 잠시 교무실로  나를 부리셔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선영아. 너는 성격도 아주  밝고 쾌활하고, 수업시간에도 그렇게 적극적인데 왜 성적이 안 좋을까?


선생님 생각엔 네가 공부를 전혀 안 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일만큼 너는 정말 영리하고 똑똑한 아이이거든! “


나는 당장 그날 오후부터 난생처음으로 공부하기에 본격적으로 접어들어, 평생 뛰어놀기만 하던 철딱서니 제로의 떼쟁이 막둥이가, 집에 와서 대청마루에 접이식 온 가족용 자개 밥상을 떡하니 펴놓고, 공부한다고 앉으니 온 가족들이 다들 신기해하였고, 엄마는 신통방통하다 칭찬하시면서도, 곧 다시 원래대로 놀러 뛰쳐나갈 줄 아셨었다고 후에 말씀하셨다.






|도서실 관장 자진 임명|


그 바로 다음날부터 나는 학교에 아침 7시에 도착하여, 음악실로 쓰던 작고 낡은 강당에서 수업 전 그리고 수업 후 공부를 시작하였고 저녁 8시까지 그곳에 머물게 되었다.


나와 친했었던 세명의 친구가 합세를 하고, 우리를 따라 몇몇 학생들도 그곳에서  방과 후 공부를 하게 되었고, 그 수가 점점 늘어갔었다.


나를 기특하게 여기셨던  나의 김완기 담임 선생님께서 학교 측에 건의하여, 당시에는 없었던 그 작은 음악실을 중학교 도서실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나는 그 후 중학교 졸업까지 2년 동안, 처음에는 자진이었지만 이제는 정식으로 도서관장으로 임명되어,  매일  도서실을 아침 7시에 열고 저녁 8시에 닫았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그때와 현재 나의 생활이 크게 다르지 않다.


매일 아침 7시 반경에 약국을 열고, 밤 8시에 닫고 있으니..

사람의 인생이란.... 반복과 복선의 장편소설일까?!…




|쉽게 오르는 성적?|


당연히 난생처음 공부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보니, 성적은 마치 당시에는 불법이었던 특별 개인 과외를 한 것처럼 급격하게 오르기 시작해서 선생님께서도 같은 반 친구들도 다들 놀래기 시작했다.


처음에 반 70명 중에서 38등밖에  못했던 내가, 바로 다음 달엔 25등, 그 바로 다음 달엔 14등 그리고 3달째부턴 10등 안 진입 후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쭉 단 한 번도 성적이 떨어진 적이 없었다.


중학교를 졸업할 당시 나는 총 3개의 상장, 노력상, 봉사상 그리고 공로상을 전교생을 대표해서 단상에 올라가서  받기까지 하였다.


특히 "노력상"은 어린 중학생이 아무 도움도 없이  갑자기 스스로 공부를 열심히 하여, 이례적으로 성적이 급격히 오르고, 다른 친구들도 같이 성적이 오르게 되어서,  우리 담임선생님의 추천으로 다른 학생들에게도 모범이 되도록, 교장선생님께서 그해에 새로 나를 위해서 만들도록 지시하신 정말 특별한 맞춤형 상장이라고 하셨다.




|수학은 예외...|



노력한 만큼 올라가는 과목들 중에 나는 영어, 국어, 역사 등의 모든 문과 과목은 거의 다 맞을 정도로 성적도 잘 나왔었는데, 수학과 화학은 도통 이해도 잘 되지 않고, 성적이 전혀 오르지를 않았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그 이과 과목들과는 더더욱 멀어지게 되어버린 것 같다.


그래서 성적도 반에서 최상위가 5등 정도에  오르는 정도에 머물게 되어버렸고, 어느 순간부터는 이과 과목들은 내가 넘을 수 없는, 나의 한계라 생각하고 포기해 버린 과목들이 되어버려 나는 결국 “수포자”가 되기에 이르렀다.






|이과 과목 알레르기|


위에서 장황하게 아주 어린 시절이야기까지 해가면서까지, 내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그만큼 나는 이과 과목에는 거의 알레르기가 있나 싶을 정도로 문외한이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문과만을 공부하고 전공했었던 내가 뉴질랜드에서 그것도 40살이라는 결코 적지 않은 나이에, 이과인 약대를 가기로 하고,  남섬에 위치한 더니든에 있는 오타고 대학을 들어가면서 벌어졌던 황당하고 부끄러운 일들을 위한 구차한 변명과 이유들의 방어기제 구축이 핵심이다.


1학년의 Health Science (건강 과학) 과정에서는 의학, 치의학, 약학, 간호학등의 다양한 의료 분야의 기초를 쌓는 과정이고 생물학, 화학, 물리학, 의료 윤리 및 보건 정책, 통계학 및 연구 방법론 그리고 해부학 및 생리학의 나와는 전혀 맞지 않아서, 한국어로도 엄두도 못 냈던 이과의 과목들을 이수하여 높은 평균 점수를 취득하여야만 약대에 입학을 할 수 있다.





|실제로 빵점을.... 실화냐? 진짜라니...|


첫 학기의 물리 과목 중 실험실 수업 (Laboratory class)에 참석한 첫날, 정식시험은 아닌 8문제의 간이 쪽지시험을 보게 되었다.


뉴질랜드에서 건강 과학과에 입학한 현지의 학생들은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고등학교 시절부터 이과로

분리되어  물리, 화학, 생물등의 이과 과목들의 기본지식을 쌓고 온 학생들이다.


그렇기에 , 그들에게는 너무나도 쉬운 기초테스트에 지나지 않았던 짧은 물리 쪽지 시험을 나는 총 8 문제 중 8문제를 전부 다 틀려서 그야말로 평생 놀면서 학교를 가도 결코 맞기 힘들었었던, "빵점"을 나이 40에 맞아버리고 말았다!…


 나는 실로 충격적이고 부끄러운 그때의 감정과 생각만으로도 바로 밀려오는 속 쓰림과 울렁거림을 남은 인생동안 평생 절대 치유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왜 들어왔냐고요?|


30-40 대경의 뉴질랜드 인 (키위) 실험실 강사가 조심스레 나에게 물어보았다.


무슨 전공을  공부하러 건강 과학을 공부하러 왔는지, 내가 그였더라도 굉장히 의아하고 아주 당황스러웠을 거 같다.  의료 쪽의 전공을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거쳐야 하는, 건강 과학에 입학한, 그것도 나이도 40이나 먹은 어른 학생이 단 한 문제도 맞히지 못하고, 그 쉬운 쪽지시험에 빵점을 맞았으니 말이다.


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약대에 들어가기 위해서 왔어요”


몇 초의 정적 후, 그는 나에게 약대를 들어가려면은, 전체 1학년의 건강 과학의 평균이 꽤나 높아야 하기에,

앞으로 많이 분발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었다.


굉장히 점잖고 조심스러운 그의 말 뒤에는 아마도


"아니 50점도 아니고, 빵점을 맞아놓고, 약대라니, 말도 안 돼요. 차라리 더 늦기 전에 다른 길로 가는 게 어떻실는지…“


가 아니었을까.....




|빵점 충격요법에 진짜 분발|



40년 인생에 있어서 처음 경험해 보는, 또 절대 못해볼 줄 알았던  "빵점 충격"에 난 정말 분발하기 시작했다.


중학교 때 하루아침에 갑자기 공부를 시작했듯이, 하루에 10시간 이상씩 앉아서 공부하였고, 나머지 시간에는 5시간가량의 수면 외에는 수업과 과제들을 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발발된 허리 디스크 통증도 같이 시작된 후 아직도 쭈욱 나의 동반자가 되어있다)


물리와 화학에서는 많은 계산을 하고, 외국 이공계에서는 계산기도 사용하는데, 나는 심지어 물리와 화학 계산을 위한 계산기사용법부터 익혔어야 했었다.


또한 영어로 공부를 하며 많은 양의 책과 관련 리포트와 자료들을 읽었어야 해서, 나의 약대 도전 비하인드 스토리에는 언어장벽, 이과장벽, 그리고 나이장벽 등등이 내가 경쟁해야 하는 다른 현지의 어린 학생들에 비해 추가의 방해물이 되어 적재되어 버렸다.





|천사와 사탄의 신경전|



어떨 땐,


그냥 원래 다니듯이 직장생활이나 하면서, 편하게 주말엔 친구들이나 만나고 살 것을 왜 40이나 돼서, 이과 과목은 오래전에 포기했었던 내가 약대를 그것도 뉴질랜드에서 간다고 나 자신을 이렇게나 괴롭히나"


라고 혼자 자신에게 혀를 끌끌 차기도 했었다.


그리고는 역시 우리 엄마께서 내가 40살에 약대 간다고 했을 때, 한숨반 걱정반으로


“너도 차~암 가지가지 한다 “


하신 말씀이 맞는 게 아닐까. 차라리 지금이라도 관둘까?  과연 내가 시간낭비만 하고 약대에 들어갈 점수를 과연 현재 나의 실력으로 1년 만에 받아낼 수 있을까?라고 생각한 적 또한 있었다.





|천사의 항변|



하루에도 몇 번씩 천사와 사탄이 대화하듯 내 마음속에서 현 상황의 장단점의 저울질과 그에 따른 감정들의 널뛰기가 쉴 새 없이 되던 처음 3주의 수업 후에, 나는 다시 한번 큰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래, 내 인생에서 일 년 정도는 없어져도, 남은 인생동안 충분히 또 즐기고 행복할 수 있어. 헬스 사이언스 (건강과학) 1년을 내 인생의 지옥훈련 혹은 극기훈련을  다녀온다 생각하고  한번 견뎌보자. 

최선을 다했는데 안되면,  그때 깔끔하게 손 털고 원래 하던 일 다시 찾아서, 취업하면 돼 그야말로,  Nothig to lose (잃을 건 아무것도 없어)"





|40살에 다시 고3이 되어버린 나|



2010년 1년 동안 그전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정도로, 그해를 뒤돌아보면, 한 것은 공부와 수업 그리고 끊임없는  시험준비 그리고 실제 시험의 연속이었다고 해도 절대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중학교 때 갑자기 나만의 공부법의 결과로,  나만을 위한 노력상을 받았듯이,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었고, 그 나이에 왜 또 공부를 그것도 가능하지 않은 이과 공부를 하려고 하느냐는 많은 지인과 가족들의 우려와 걱정을 보상시켜 주듯이, 나는 바로 다음 해에  약대에 그것도 아주 좋은 성적으로 합격을 하게 되었다.


지금 돌아보며 생각해 보면, 나에게 있어서,  나이 40살 때에 맞아버린 첫 "빵점"은 말에게는 달리기 위한 채찍질,  차로 비교하면, 추운 날이라서 예열을 하는 그런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그 사건만큼 충격요법처럼 강렬하게 나 자신을 자극하고, 도전하게 만들고, 힘들 때마다 그 생각만으로도 벌떡 일어나게 해주는 일이었으니 효과는 확실히 증명된 셈이다.





|빵점, 마음 편안한 시작|



나름 늘 공부하기에는  자신과 자부심이 있었는지, 약사가 되어야겠다고 조금은 안이하게 생각하고 들어 갔었던  헬스사이언스과정이었던 것 같다. 그 상상도 못 해보았던 빵점 사건이 아니었다면, 내가 나 자신에게 실망하고 발끈하여 다시 머리띠를 두르고, 몇십 년 전 중학교 도서관장을 하던 시절과 같은 도전과 강행군을 과연 해낼 수 있었을까...


처음엔 어린 학생들과 젊은 강사 앞에서 빵점을 받은 내가 수치스러웠지만, 또 바꾸어 생각해 보면,


"빵점"처럼 편안한 단계는 또 없지 않을까?


왜냐하면 더 나아질 수밖에 없고, 더 나빠질 길은 없으니, 무엇을 해도 나의 성적과 결과는 나아지고 개선될 수밖에 없는 정말 시작하기 안전한 때인 것이라 생각한다. 


그때 빵점을 맞아 버렸기 때문에, 결국 나는 약대에도 갔으며, 혹시 모를 자만감 같은 쓸데없는 기름기도 쏙뺀 담백하고 자신을 한계를 인식하며, 그래서 지금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고 노력하는 겸손한 약사가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인생의 빵점은 완벽한 시작점|



꼭 공부의 빵점뿐이 아닌, 누군가가 지금 내 인생은 왜 이렇게 힘들고 바닥을 치는 건지 낙담하고 있다면, 바꾸어 말하면 당신은 이제 올라갈 일밖에 없는 참으로 완벽한 시작점에 있다는 것을 강조해 말해 주고 싶다. 


빛 좋은 개살구 같은 말장난이 아니다. 내가 직접 무일푼 여성피난소 그리고 빵점점수 등의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물론 인생을 성공 그리고 실패로 나누는 것 자체가 어패가 있다. 왜냐하면 다 그 과정이며 끝날 때까지 끝난 게 또 결론에 이른 것은 결코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성공은 각자 정해놓기 나름이라고 믿는다, 그저 자신이 만족할 만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인생, 그것이 인생의 행복 그리고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또 누군가가 인생의 어느 시점의  어딘가의 바닥이라면, 최대한 몸을 움츠려 모아서 공기나 물의 저항을 약하게 한 후, 바닥을 있는 힘껏 두 발로 밀치며 위로, 우리가 미처 생각지도 못할 만큼 더 높이  비상할 수 있는 최고의 시기라고 생각한다.


'고로, 나는 어쩌다 40살에 그 누구도 맞기 힘들다는, "빵점"을 맞는 바람에 나는 약사가 되었다.'


여러분도 빵점 그리고 지금의 그 고난의 과정이 있기에, 원하는 것에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음"만 피하시면 됩니다.


지금 정말 잘하고 있고, 앞으로도 더욱 잘할 것이라 자신을 토닥여주고 아껴주세요.



 **이미지: Pixabay, Pexel

*** 브런치 북을 연재하기 전에 써 놓은 글이, 브런치 북이랑 연결이 되어서 편집하여 다시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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