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사람이 남기고 가는 것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돈, 지식, 재산처럼 손에 잡히는 것도 있지만, 말과 태도, 삶의 방식처럼 형체 없는 것도 있다. 그중에서도 평판은 묘한 힘을 가진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한 사람의 존재를 증명해 주고, 또 다른 인연의 문을 열어주는 보이지 않는 열쇠가 되곤 한다.
평판은 단지 한순간의 인상이나 소문이 아니다. 그것은 오랜 시간 쌓인 신뢰와 행동의 결과이며, 때로는 세대를 넘어 전해지기도 한다. 마치 하나의 계보처럼, 부모에게서 자식으로, 또 그 자식에게로 이어지는 보이지 않는 유산이다. 나의 인생에도 그런 평판의 계보가 조용히, 그러나 깊이 흐르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어느 날, 아버지는 가게 문을 닫고 나와 단둘이 집에 계셨다. 그때 밖에서 누군가 아버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 내가 방문을 열고 나가보니 할머니 두 분이 버스를 갈아타려다 잠시 우리 집에 들른 참이었다. 두 분은 집을 유심히 살피며 예전 주인이 아직도 사는지 확인하셨고, 아버지는 금세 그분들을 알아보고 반갑게 맞이하셨다. 방으로 모셔 인사를 나누던 중, 한 할머니가 나를 유심히 바라보시더니 결혼적령기 큰 외손자라며 가지고 계시던 사진을 꺼내 보여주며 한 번 만나보라고 권하셨다. 마침 나도 외출 준비를 하던 중이라, 아버지께서 인사를 드리라고 하셔서 정중히 인사드렸다. 그렇게 소개받은 이가 지금의 남편이다. 세월이 흘러 아들딸 낳고, 옥신각신 살부딪히고, 사랑을 주고받으며 함께 살고 있다.
그 모든 인연의 시작이 유난히 특별하게 느껴졌던 이유는, 결혼이라는 인생의 전환점의 매개가 된 낯선 할머니의 신뢰가 나를 아껴주게 된 배경이 온전히 부모님의 평판 덕분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논밭을 일구며 가정을 성실히 이끌어 오신 분이다. 늘 부지런하셨고, 이웃과 나누는 일에 인색하지 않으셨다. 동네 사람들은 “참 인정 많은 양 씨 아저씨”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친척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 또한 조용하고 단아한 분이셨다. 말수는 적지만 늘 부드러우셨고, “얌전하고 곱게 사는 분”이라는 말이 동네 어른들 입에 자주 오르내렸다. 부모님의 그런 모습은 단순한 인상이나 소문을 넘어 사람들 마음속에 ‘평판’이라는 이름으로 깊이 새겨졌다. 그 자취는 곧 나의 배경이 되었고, 인생의 문을 여는 보이지 않는 열쇠가 되어 주었다.
시간이 흘러, 내가 부모가 되어 딸을 시집보낼 때의 일이다. 딸이 만나는 남자친구가 있다며 진지한 만남을 조심스럽게 이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양가 상견례를 겸한 식사 자리를 마련하자고 했다. 그날, 나는 약간의 긴장감을 안고 딸의 예비 시댁 식구와 식당에서 식사를 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를 이어가고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딸의 시아버지가 될 분이 조용히 내게 말했다.
“어머님을 뵈니 안심이 되네요. 아들을 장가보내도 좋겠다 싶은 마음이 들어요.”
그 말에 나는 울컥했다. 결혼이란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깊은 신뢰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다시금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내 말투, 눈빛, 살아온 태도에서 묻어난 어떤 진심이 그분의 마음에 닿았던 것일까. 그날 나는, 부모님이 그랬듯 내 평판이 또 다른 인연의 다리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돌아보면, 나는 부모님께 참 많은 것을 물려받았다. 무엇보다도 삶을 대하는 태도, 성실함과 정직함, 나눔의 기쁨을 실천하는 마음. 그 모든 덕목이 부모님의 평판을 만들었고, 그 평판은 오늘의 나를 이루는 인격의 뿌리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뿌리가 딸에게로 이어지고 있다.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다.” 나는 그 말이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고 믿는다. 부모의 말과 행동, 삶의 방식은 자식의 인생 깊숙한 곳까지 스며든다.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배경이자 기준이 되며, 때로는 자식의 인생을 열어주는 열쇠이자 등불이 되기도 한다. 누군가를 소개받는 자리, 인생의 중요한 갈림길에서 사람들은 단지 그 사람의 ‘현재’만이 아니라 ‘근간’을 본다. 그리고 그 근간은 대부분 부모의 삶과 태도 속에서 드러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부모님의 은덕을 입고 살아가고 있다. 그 은덕은 집 한 채나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유산이 아니다. 오히려 더 깊고, 무형적이며, 오래 가는 유산이다. 사람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인격의 밑바탕—그것이야말로 부모님이 나에게 물려주신 가장 값진 유산이다.
이제는 나도 그 유산을 딸에게 물려주고 싶다. 살아가는 동안 어디에서든 **“그 부모에 그 딸”**이라는 말이 신뢰와 긍정의 의미로 전달되기를 바란다. 부모의 평판이 자식 인생에 비추는 빛이라면, 나는 오늘도 그 빛의 방향이 흔들리지 않도록 내 삶을 정갈하게 다듬어야 한다는 책임을 느낀다.
우리는 각자의 삶을 살아가지만 결국 연결되어 있다. 누군가를 만나고, 소개받고, 또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 가는 이 삶의 굴레 속에서, 내가 쌓는 평판이 결국 내 자식의 이름을 밝혀주는 등불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좋은 평판이란 단지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라, 삶이 쌓아 올린 결과이며,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입증하는 또 하나의 이름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