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 꼭꼭 숨긴 그림

by 락부락부

어떤 그림은 아무리 작은 캔버스에 그려졌더라도, 내 마음속 서랍 가장 깊은 곳에 숨겨 두고 싶어진다. 잊고 싶은 건 아닌데, 꺼내어 보는 게 싫은 기억. 보는 순간 그때의 감정이 선명하게 되살아나서, 고개를 돌리게 만드는 그런 장면이 있다.


나는 원래 예술을 공부하고 있었다. S예대에서 연기를 전공했지만, 1년 남짓 다니다가 자퇴했다. 진로에 대한 확신도,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그림도 없었다. 그 상태로 군대에 입대하게 되었다.

하지만 군대 안에서 오히려 생각이 선명해졌다. 막연한 예술가보다는 실질적인 기술과 체계적인 교육이 나를 먹여살리고, 훗날 가족이 될 가정을 먹여살릴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군 복무 중 수능을 다시 준비했고, 전역하자마자 공과대학에 진학했다.


이미 동기들보다 두 살이 많았고, 다시 선택한 길이었기에 이번엔 절대로 허투루 살고 싶지 않았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절박함으로 학교 생활에 몰입했다.

조기졸업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게 나에게 주어진 두 번째 기회처럼 느껴졌다.

4.5점 만점에 4.0 이상을 받으면 한 학기 혹은 한 해를 줄이고 사회에 먼저 진출할 수 있었다.

나는 그렇게 나만의 목표를 세웠다.


정말 열심히 했다. 강의는 한 번도 빼먹지 않았고, 토익이며 자격증이며 발표 준비며 틈틈이 시간을 쪼갰다.
스터디를 이끌고, 과제는 누구보다 먼저 제출했다. 밤새워 리포트를 쓰고, 시험이 끝나면 다시 다음 과목 교재를 펼쳤다.


누가 보지 않아도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으려고 애썼다.


3.97점. 그 수치는 지금도 생생하다. 겨우 0.03점이 나를 족쇄처럼 잡아끌었다.

그 작은 차이가 내 모든 노력을 무너뜨린 것 같았고, 어쩐지 인생이 다시 한 번 내게 등을 돌린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조기졸업 대신, 조기취업을 선택했다.


‘그래, 어차피 사회로 나가야 한다면 지금이 기회야.’

그렇게 선택한 첫 직장이 바로 D사였다.

환경질 측정을 하는 소규모 중소기업이었다.


내가 상상한 사회 초년생의 모습은, 번듯한 셔츠를 입고 사무실에서 일하며 회의도 하고 기획도 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나는 작업복을 입고, 안전화를 신고, 장비를 실은 스타렉스에 올라탔다.


현장을 돌아다니며 대기질을 측정했고, 땀과 먼지와 소음 속에 파묻혀 하루를 보냈다. 대학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 고개 숙여 책을 보던 나, 열심히 미래를 준비하던 나.


그런 내가 지금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건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심지어 월급은 최저시급 수준. 통장에 찍힌 숫자들을 보며, ‘이게 내 몸값인가’ 싶었다.


자괴감이 밀려왔다. 그래서 그 회사에 오래 있지 않았다.


곧바로 다른 회사를 찾았고, 이번에는 컨설팅을 배울 수 있다는 말에 혹해 N사에 입사했다.

하지만 그 기대는 금세 무너졌다.

컨설팅은커녕, 나는 공장에서 일하는 과장님들 밑에서 공구를 나르는 보조 역할을 했다.

드라이버, 플라이어, 줄자, 절단기… 하루에도 수십 번씩 불려 다녔다.

뭔가를 배우기는커녕, ‘인력’이라는 이름조차 민망한 하루하루가 계속됐다.


무엇보다 힘들었던 건, 내가 아무 의미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는 점이다.

그러던 중, 사장이 주말에도 무급으로 일하라는 말에 감정이 폭발했다. 말다툼 끝에 퇴사했다.


3개월, 그것이 내 두 번째 회사에서 보낸 전부였다.


지금 나는 꽤 괜찮은 기업에 다닌다. 이제는 누군가 나를 보면 ‘제법 열심히 살아온 사람’이라 말해줄 수도 있다.


그래서일까... D사와 N사에서 보낸 그 시간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이력서에도 적지 않았고, 친구들에게도 숨겼다. 심지어 그 시절을 말할 기회가 생겨도 얼버무리고 만다.
내게는 ‘있었지만, 없는 시간’이니까.


창피하다. 그토록 공부하고 준비했는데, 결국 작은 회사에서 허드렛일을 하다 싸우고 나온 것.


내 노력의 결과가 그거였다는 게, 그땐 참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 기억은 나만 아는 그림이 되었다.

늘 서랍 안에 꼭꼭 숨겨둔, 꺼내면 부끄럽고 아픈 그림.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아주 가끔은, 그 그림을 다시 꺼내보려는 용기도 생긴다. 그때의 나를 조금은 다르게 바라보게 됐으니까.


그 시절의 나는 철이 없었다. 하지만 그만큼 절실했고, 치열했고, 스스로를 믿고 싶었던 사람이다.


지금의 나는 그 시절을 부정함으로써 만들어진 게 아니라, 그 시절을 버텨냈기에 존재한다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그림을 사람들 앞에 꺼내어 놓기엔 아직 용기가 부족하다. 그래서 오늘도, 그 그림은 내 안에서만 살아간다. 조금은 찢기고, 얼룩져 있고, 형체가 불분명한 그림.


언젠가 그 그림 위에 새로운 선을 그리고, 더 따뜻한 색을 덧칠할 수 있을까.

그날이 오기 전까진, 이 그림은 내 마음 서랍 가장 깊은 곳에, 조용히 놓아둘 생각이다.

keyword
일요일 연재
이전 02화#1 - 눈 돌리고 싶은 그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