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보문고와 보타닉 가든
마음이 답답하거나, 달콤한 케이크 한 조각으로도 씻겨지지 않는 나쁜 기분이 들 때면 나는 서점에 갔다. 서점에 가면 셀 수 없는 많은 책들이 나를 반겨주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개운해지고, 나빴던 기분도 좋아졌다. 스트레스가 많은 날에는 서점에 가서 책을 샀다. 어떤 책을 살지도 얼만큼을 살지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발길이 그쪽을 향했다.
교보 문고 강남점에 들어서자마자 왼편에 위치해 있는 매거진 섹션을 시작으로 모든 섹션을 둘러보며 책을 뒤적인다. 어떤 섹션에서는 위로받고, 어떤 섹션에서는 영감 받았으며, 어떤 섹션에서는 피로감을 얻기도 했다. 어느새 내 손엔 두세 권의 책이 들려있었다. 계산을 마친 나는 한 층 아래에 있는 핫트랙스에서 문구 쇼핑을 시작한다. 노트 하나라도 구입을 한 뒤에야 서점에서 나올 수 있었다. 나의 '힐링'은 서점에서 아주 건전하게 이루어졌다.
호주로 이사 오면서 난 새로운 나의 '힐링' 장소를 찾아야 했다. 이 곳에는 교보문고가 없었으니까. 물론 호주의 서점도 잘 되어있지만(문구도 즐비하고!) 여기 있는 책을 읽다가는 상태가 더 안 좋아질 듯했다. 호주로 이사 오고 얼마 뒤, 남편과 다툰 나는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다. 이럴 때 한국이었다면, 친정에 가서 엄마가 해준 맛있는 밥을 먹으며 마음을 달랬겠지만, 아쉽게도 호주에서는 내가 갈 곳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냥 발길이 닿는 대로 트레인을 타고, 걸었다. 어느새 나는 오페라 하우스 앞에 서 있었다. '바람 쐬러 기껏 온다는 곳이 북적이는 관광지라니..' 나는 오페라 하우스에서 벗어나기 위해 '보타닉 가든'으로 들어갔다.
보타닉 가든은 오페라 하우스 옆에 있는데도 한적했다. 처음 와본 곳은 아니지만 혼자 온 것은 처음이라 다르게 느껴졌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보았다. 바다를 왼편에 두고 걷다가 큰 나무 아래에 있는 벤치에 앉아보기도 하고, 잔디밭에 옹기종기 모인 사람들을 구경하기도 했다. 조깅하는 사람들, 열심히 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보다 보니 어느새 해 질 녘이 되어 갔다. 보타닉 가든에는 멋진 선셋 포인트가 있다는 게 문득 떠올랐고, 그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나는 호주의 교보문고, 아니 호주의 '힐링 장소'를 만나게 되었다. 유명한 선셋 포인트라 사람은 많았지만, 누군가 '뮤트' 해 놓은 듯이 조용했고, 슬로 모션을 걸어둔 듯 모든 것의 이 천천히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 사이에 자리 잡고 앉아 아무 생각 없이 오페라 하우스 뒤로 사라져 가는 빨간 태양을 보다 보면, 금세 하늘은 까매졌다. 하나 둘, 작은 불빛들이 생겨났다. '참 아름답구나.'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모호해진 그 순간에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는 방향으로 걸었다. 이상하게 미웠던 남편의 얼굴이 보고 싶어 졌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하소연을 한 것도 아닌데, 누군가 내 이야기를 들어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 이후로 답답한 마음이 들 때면 보타닉 가든에 간다. 잔디밭에 앉아 풍경을 바라보다 해 질 녘이 다가오면 어김없이 '미세스 맥쿼리 포인트'에 가서 멋진 선셋을 지켜본다. 핑크빛 하늘을 만난 날은 기분이 배로 좋다. 해가 저물고, 집으로 향하는 트레인에 올라탈 때쯤이면 내 마음은 가벼워졌거나, 따뜻한 뭔가로 가득 채워져 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글/그림 에린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