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떨결에
2월 첫째 주 토요일, 아이들과 요가를 하기 위해 센터로 향했다.
남자아이들로 가득 찬 시끌벅적한 교실
안경을 쓴 까만 피부의 남자아이가 언제나처럼 제일 먼저 나를 맞이해 주었다. 우당탕탕 몸싸움을 하고 있는 남자아이 둘과 상하의를 보라색으로 맞춰 입은 밤송이머리의 남자아이와도 인사를 나눴다.
이전에 몇 번 시도한 적 있는 영어요가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오랜만에 영어요가 다시 해봐요!"
수긍하는 건지 거부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아이들의 소음을 뒤로하고 준비운동을 시작했다.
"자리에 앉아서, 양손 가슴 앞에 깍지 끼고! 머리 위로 쭈욱 기지개 켜기"
왼쪽으로 기울였다가 오른쪽으로 기울이는 사이 생머리의 안경을 쓴 남자아이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오늘은 무궁화 꽃이 안 해요?"
자세를 바꾸면서 영어요가 다 배우고 나면 게임을 할 거라 알려주었다.
준비운동을 하는 내내 안경을 쓴 까만 피부의 남자아이는 꽥꽥 혹은 컥컥 거리며 장난 섞인 기침을 이어갔다.
"오늘 어린이대공원 가요!" "동물원 가요!"
목 회전을 하는 동안 아이들이 하나 둘 자랑하기 시작했다. '우와 좋겠다' 약간은 건성으로 대꾸하며 스트레칭을 계속했다. 다리를 앞으로 펴서 툴툴 털어보고, 좌우로 왔다 갔다 움직이며 고관절 긴장을 풀어보았다.
"노란색이 잘 어울려요!"
흰 피부의 점잖은 남자아이가 대뜸 칭찬을 건넸다. 다리 스트레칭을 이어가는 내내 아이는 나에게 무슨 색을 좋아하는지, 노란색이 잘 어울린다라는 둥의 이야기를 했다. 관심의 표현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단순한 호기심이었을까? 무엇이 됐든 간에 아이와의 거리가 조금은 좁혀졌나 보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의 시끌벅적한 소음을 배경음악 삼아 영어요가를 시작했다.
다리를 넓게 벌리고 서서 손을 머리 위로 올려 A
F는 양손을 앞으로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요! 거기서 총을 쏴 빵야빵야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누자 전투극이 벌어졌다. 빵빵빵 한바탕 전쟁 후 다음 알파벳을 주욱 이어갔다.
"다리를 벌리고 서서 몸을 앞으로 숙여요, 손을 아래에서 모아서 엉덩이 보여주면 M!"
"엉덩탐정이다!!!!!! 엉덩탐정!!!! 엉덩탐정!!!! 꺄" 안경을 쓴 까만 피부의 남자아이가 소리를 질러댔다. 결국 그는 참관 중이던 담당자에게 혼이 났고, 이후 이어지는 알파벳에서도 계속해서 장난을 치는 바람에 덩달아 나도 같이 혼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생머리의 안경을 쓴 남자아이가 이제 게임을 하자고 했다. 아직 시간이 제법 남아있는 데다가 산만한 수업에 요가동작을 제대로 익히지 못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다 외웠는지 간단한 게임을 통해 확인한 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할 거라고 했다.
"선생님이 아무거나 알파벳을 외치면 그 동작을 해야 해요. 다 외웠는지 확인하고 무궁화 게임 할 거예요!"
'이얍'이라는 소리와 함께 양손을 둥글게 돌렸다.
"아이(I)" 소리와 함께 다들 손을 몸에 붙이고 일자로 바르게 섰다. "오 잘하는데?!" 놀라며 말했다.
"이번엔 에이치(H)" 잠시 방황하다가 이내 두 명이 손을 잡았다. 그렇지만 생머리의 안경을 쓴 남자아이가 손을 너무 세게 잡는 바람에 흰 피부의 점잖은 남자아이는 아프다며 소리를 질렀다.
안경을 쓴 까만 피부의 남자아이는 엉덩탐정과 싸운다며 소리치다가
생머리의 안경을 쓴 남자아이는 자꾸만 옆의 아이에게 레슬링을 걸어서 혼났다.
흰 피부의 점잖은 남자아이는 레슬링을 걸어오는 아이에게 붙잡혀 낑낑대느라
나는 담당자와 아이들의 눈치를 보며 수업하느라 혼이 났다.
얼추 알파벳 요가동작을 다 익힌 듯해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게임을 했다. 술래가 총을 빵야빵야하며 쏘기도 하고, 레슬링을 하다가 안경이 고장 나는 바람에 혼나기도 했지만 우리는 금세 활기를 되찾고 신나게 놀고 있었다. 땀까지 흘리며 정신없이 놀고 있는 사이 어느샌가 상하의를 보라색으로 맞춰 입은 밤송이머리의 남자아이가 우리 틈에 껴 있었다. 그는 어김없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그가 게임의 한 복판으로 들어왔다. 그리곤 나지막하게 혼잣말로 읊조렸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처음 보는 그의 행동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아이에게 너도 같이 할 거냐 물으니 아니라고 했다. 그리곤 다시 자신만의 세계로 돌아갔다. 이후로도 아이는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가도 어느새 돌아와 내 핸드폰을 만지거나 나에게 잠시 안겼다가 떠나길 반복했다.
시끌벅적 요란한 수업을 마친 후 담당자와 짧은 대화를 나눴다. 밤송이머리의 남자아이는 오늘까지만 센터에 나오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간다고 했다.
얼떨결이었지만 그 아이는 한차례 무궁화 꽃을 피우고는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