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은 호르몬의 농간질이다

기분이 구린 날에 이유를 찾지 마

by 이전철

그런 날이 있다. 혼자서 땅 파고 끝도 없이 들어가는 날. 랜덤 재생하다 신나는 노래라도 나오면 짜증이 팍 나고, 실수로 볼펜을 떨어트리면 욕이 목구멍까지 나온다. 그런 날이면 괜시리 왜 기분이 나쁜지 이유를 찾게 된다. 아, 나 기분이 왜 이렇지? 요새 신경 쓰이는 걔 때문인가, 내 통장과 서울 집값 때문인가, 다이어트한답시고 풀떼기만 먹고 있어서 그런 건가.


그런데 또 이런 날도 있다. 그냥 아침부터 햇살이 아름답게 느껴지고, 괜히 구름 사진을 찍고, 박진영 노래를 틀어 놓고 혼자 둠칫 둠칫 거리면서 파워 양보운전자가 된다. 이런 날엔 이유를 찾지 않는다. 보통 다들 그냥 이렇게 말한다. 아! 날씨가 좋아서 기분이 좋아!


물론 날씨가 좋아서 기분이 좋을 수도 있겠지만, 날씨가 좋아도 기분이 구린 날도 있다. 내 통장잔고는 똑같은데 기분이 좋은 날도 있고 기분이 구린 날도 있다. 날씨나 통장잔고에 내 기분이 매달려있는 게 아닌 거다. 기분 좋고 나쁜 거에 딱히 이유를 찾을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럼 나는 왜 어제는 기분이 너무 좋았다가, 또 오늘은 왕창 다운되고 그런 걸까. 난 뭐 때문에 이런 거지?


난 앞으로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기분은 다 호르몬의 농간질이다. 이건 과학이다. 세로토닌인지 머시기가 많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적으면 기분이 구리다. 그런데 우리 몸뚱이가 아무리 항상성을 유지한다 해도 매일 매 순간 같은 호르몬 농도를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많이 분비되는 날도 있을 거고, 적은 날도 있을 것이다. 많이 분비되는 날은 박진영 노랠 들으면서 춤추는 날이고, 적게 분비되는 날은 목구멍까지 욕이 나오는 날이다. 기분을 느끼는 주체는 내 정신이 아니라 내 몸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기분이 구린 날을 잘 버틸 수 있다. 기분이 나쁜 이유는 그냥 호르몬 때문이지, 괜히 누구탓 뭐탓을 할 필요가 없다. 별 문제없다. 문제를 억지로 찾아내서 해결하려 할 필요 없다. 그냥 그날 호르몬이 좀 적게 분비되는 날인 거다. 그냥 잊고 하던 일 하면 된다. 다음 날이면 다시 많이 분비될 거다. ‘아, 나 왜 땅 파고 있냐. 다 호르몬 탓인데, 내일은 기분 좋겠지.’라고 생각하면 머릿속을 뒤집던 걱정 근심을 내려놓을 수 있다. 이왕이면 과학자들이 말하는 세로토닌을 많이 분비시킬 수 있는 행동들, 규칙적인 생활하기, 인스턴트 안 먹기, 행복한 생각하기 등등을 하면 더 좋을 것이다. 이게 또, 양성피드백인지라, 규칙적인 생활을 함 > 기분이 좋음 > 규칙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됨 > 기분이 좋음 … 의 무한 반복이다. 그런데 이게 또, 반대도 양성피드백이다. 규칙적인 생활을 못함 > 기분이 구림 > 규칙적인 생활을 못하게 됨 > 기분이 계속 구림 … 의 반복은 조심해야 한다.


기분이 구린 거에 이유를 찾지 말자. 이유를 찾으면 걱정이 생기고, 그 걱정이 파동이 되어 또 기분을 나쁘게 만든다. 내리막이 있으면 오르막이 있다는 단순한 진리만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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