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을 기다렸던 사람들에게는 꽤나 실망스러운 토요일이었다. 그칠 듯 말 듯하면서 비는 하루 종일 계속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부터 친했던 친구와 지리산 산행을 떠난 마누라가 걱정되었지만, 비를 맞고 둘레길을 걷고 있을 모습을 생각하니 질투심 섞인 미소가 민혁의 입가에 지어졌다.
'남편은 지금도 이렇게 일하고 있는데 말이야! 누구는 놀지 못해서 돈 벌고 있는 줄 아나?'
언제나 세상은 불공정하고 불평등하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진짜 인생은 그런 것이기 때문에 냉혹한 정글 속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실력, 돈, 냉정함이 무기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 자기 자신이 있기에 지금 식구들이 큰 걱정 없이 생활하고 있는 것이라고 또 한 번 깨닫게 되니 스스로 엄숙해지고 자랑스러워졌다. 그리고는 스마트폰을 켜고 은행계좌를 확인해 보았다. 오늘 아침에 부동산 중개 수수료가 어김없이 입금이 되어 있었다. 머릿속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매매가 아닌 전세에 대한 중개 수수료라서 그리 큰 금액은 아니었지만, 요즘처럼 어려운 시기에는 이런 것을 불평하는 것은 배부른 소리 하는 것이었다.
지난달에 찾아온 중년부부에게 소개해 준 아파트가 거의 매매계약이 성사될 것 같았는데, 마지막에 부인이 방향을 틀어 버렸는지 더 이상은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민혁은 남편에게 연락을 해 보았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신세계 부동산입니다. 한번 연락 주신다고 하셨는데, 연락이 없으셔서 제가 먼저 드렸습니다. 결정을 아직 못하신 모양이지요?"
"아. 네. 조금 더 다른 곳을 알아보고 결정하려고요. 다음에 제가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편하게 결정하시면 됩니다. 안녕히 계세요."
상냥하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지만 그 남자의 우유부단함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중개를 해준 아파트가 앞으로 부동산 가격이 많이 오를 것인데, 지금 약간의 프리미엄만 주고 사면 몇 년 후면 일억을 훨씬 넘게 그냥 돈 벌 수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바보라고 생각하니 몹시 한심스럽기만 했다. 언젠가 그 투자가치를 아는 고객이 민혁의 사무실 현관문을 열고 들어 오는 모습이 상상되었다. 그 미래의 고객과 자신은 험난한 인생의 정글 속에서 같이 사냥하며 먹잇감을 잡는 맹수들이라고 여겨졌다. 그런 고객들을 위하여 약간의 수고료만 받고 그들에게 부와 명예를 안겨 줄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으니 본인이야말로 황금을 만들어 주는 '연금술사'가 아닐까 생각되었다.
그로부터 약 한 달이 지났지만, 그의 예상과는 달리 계약이 한 건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번 달에 내야 할 사무실 임대료와 각종 세금들을 생각하니 영혼까지 뻥 뚫리는 듯했다. 어제까지 찾아온 고객들 중에 제발 한 두 명이라도 다시 문을 열고 오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머리가 아파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빌딩 모퉁이에 기대고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는 연기를 일부러 길게 뿜어서 걱정들이 저 연기와 같이 날아가기를 빌었다. 그의 앞에 드리웠던 희뿌연 공기는 서서히 걷혀 가면서 눈앞에 리어카를 끌고 오르막을 천천히 올라오는 노인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폐지 줍는 노인의 모습을 간간히 본 적이 있었던 것 같았지만 관심을 가지고 보지 않아서 똑같은 사람인지 짐작을 할 수가 없었다. 뉘엿뉘엿 리어카를 끌고 가다가 멈추어서 바닥에 버려진 종이 상자를 하나씩 담아 오고 있었다. 며칠 전에 대형마트에서 커피, 종이컵 등을 구입하였기 때문에 사무실 한 편에 큰 종이 박스들이 세워져 있는 것이 생각나자, 민혁은 안에 들어가 그것들을 가지고 나와서 노인을 불러 세웠다.
"아저씨! 이것도 가져가세요!"
노인은 그의 소리를 듣자 그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마치 겁에 질린 고양이가 엉거주춤하며 움직이 듯이 느린 속도로 왔기 때문에 민혁은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성질 급한 그가 대신 리어카를 끌어 오고 싶었다. 상자 더미를 수레에 담고는 그에게 빙그레 웃음을 지어 주고는 다시 가던 길을 노인은 떠나기 시작했다. 그 짧은 순간에 그는 노인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가 있었다. 주름진 이마와 탄력을 잃고 쳐진 피부, 백발이 성성한 머리, 배우자가 없어 보이는 듯 빛이 바랜 셔츠와 바지 등으로 미루어 독거노인이 분명하다고 느껴졌다. 하지만, 돋보기를 통과하여 굴절된 그의 눈은 나이에 비하여 그 빛을 잃지 않았고, 뭔가를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통찰력을 가지고 있는 듯이 보였다. 노인의 형체를 보며 민혁은 자신도 늙으면 저렇게 초라하게 변해 있을까 걱정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은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이렇게 돈을 벌 수가 있을 것이고, 그전에 돈을 많이 벌어서 여유가 있는 노후를 보낼 수 있으리라 믿음이 들었다. 다시 사무실에 들어가기 위해서 건물 벽면을 따라 조성된 화단을 따라 걸었다. 갑자기 악취가 그의 코를 자극했고, 이어 그의 눈에는 바닥에 여기저기 떨어진 막걸리 병과 화단 속에 시커멓게 놓여 있는 사람의 똥과 오줌 자국이 들어왔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앞 벤치에는 노숙자 한 명이 다시 사온 막걸리 병을 새로 따고 있는 것이 보였다. 모든 것이 순간 판단되고 나서는 민혁의 눈에 불길이 치쏟았다. 그리고는 바로 노숙자에게 소리쳤다.
"어이! 아저씨! 남의 가게 앞에 이렇게 똥과 오줌을 싸 놓으면 어떡해요? 그리고 여기가 뭐 술집인 줄 알아요? 대낮부터 혼자서 술판 벌여 놓고 말이야. 혼자 어디 가서 조용히 마셔요! 안 그래도 사업 안 되어서 힘든 판에 이게 뭔 일이야!"
술에 그윽이 취해 있던 노숙자는 소리치고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닥에 버려져 있는 막걸리 플라스틱병의 수만큼이나 취해 있어서 그런지 눈이 흐리멍덩해 보였다. 그러나, 그도 민혁을 당황스럽게 만들 정도로 매섭게 쏘아붙였다.
"야이! 씨발놈아! 엇다 대고 소리를 질러 대고 있어? 여기가 니 땅이냐? 내가 내 돈 내고 술 마시는데 네가 무슨 상관이야?"
민혁은 잠깐 정신을 차리고 나서는 바로 말을 이어받았다.
"아니. 이 사람이? 그나마 내가 존댓말을 써 주었더니만, 아예 말을 내려놓네? 누구는 반말이나 욕을 못해서 안 하는 줄 아나? 그래! 너 오늘 한번 잘 걸렸다. 이 개새끼야! 여기가 너 안방이냐? 어디서 똥 싸 놓고 거기다 술판까지 벌려서 말이야. 너 때문에 우리 사무실에 누가 들어 올 생각이나 들겠냐?
그의 말에 노숙자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야. 이 새끼? 네가 이 가게 사장이야? 그래. 잘하면 한 대 때릴 모습이네. 한 대 쳐 봐라. 어서!"
"누구 좋을 일 시킬 줄 아냐? 너는 한번 오늘 혼 좀 나 봐라. 잠깐만 기다려라!"
민혁은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어 경찰서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경찰이죠? 누가 제 가게 앞에서 똥 싸 놓고 담배도 피우고 술도 마시고 쓰레기도 많이 버려 놓고 장사를 못 하게 하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 와서 행패를 부리고 있으니 오셔서 좀 해결해 주세요!"
"경찰 부른다고 누가 겁낼 줄 아냐?"
조금 뒤에 경찰 순찰차가 그들 앞에서 멈추었고, 경찰 두 명이 내렸다. 화단에 놓여 있는 인분과 막걸리 병들, 취해 있는 노숙자의 모습과 그에게서 풍기는 쾌쾌하고 역겨운 냄새는 충분한 증거를 제공해 주고 있었다. 몇 가지 문답 확인을 거치고 나서 순찰차는 노숙자를 태우고 사라졌다. 민혁은 근처의 편의점으로 들어가서 사장에게 말하였다.
"사장님! 저 사람에게 술 팔지 마세요! 요즘 들어서 제 가게 앞 벤치에 죽치고 앉아서 낮이나 밤이나 술 마시고 있는 모습을 이제는 못 보겠어요. 오늘은 제가 돌아 버린 게 화단에 똥까지 싸 놓았지 뭐예요?"
편의점 사장은 머쓱해 하며 대답했다.
"그래도 자기 돈 내고 구매하는데, 제가 파는 것을 거절하지는 못해요. 아무튼, 오늘 일이 결국에는 터졌네요. 저도 좀 걱정을 하긴 했지요. 이제는 다시 안 나타나겠죠!"
그러나, 그런 일이 있은 이후에도 노숙자는 며칠 간격으로 계속 나타났다. 지난번처럼 술을 먹지는 않았지만, 그에게 마치 항의를 하듯이 벤치에 몇 시간이고 앉아 있다가 사라지곤 하기를 되풀이하였다. 민혁도 그가 나타날 때마다 극도로 신경이 예민해졌지만, 다시 얽히고 싶지는 않아서 그 사람이 벤치에 앉아서 멍하게 있는 모습을 잠깐 노려 보고 있다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곤 하였다. 어디선가 다른 곳에서 이미 술을 마시고 이쪽으로 온 것이 분명하였다. 여전히 그에게서 풍겨 나오는 술냄새와 오랫동안 몸을 씻지 않고 옷을 빨지 않아서 배어 있는 악취가 주위에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다음에 한번 날 잡아서 근처에 얼신도 못하게 만들어 주어야겠다고 민혁은 다짐을 하였다.
하루 종일 폐지, 플라스틱 병을 주워 리어카에 한가득 싣고 가서 팔아도 받은 돈은 고작 몇 천 원 정도였다. 그날의 노동에 대한 대가는 미천하였지만 최노인은 사뭇 진지할 정도로 엄숙히 그의 지갑에 고이 넣었다. 고철상 사장에게 간단히 인사를 남기고 밖으로 걸어 나왔다. 올해 들어서 왼쪽 무릎이 더 아파오기 시작하였지만, 그는 이 정도는 아직 참을 만하다고 넘겨 버렸다. 노을이 지고 있는 서쪽 하늘을 등 뒤로 한 채 이제는 가벼워진 리어카를 밀며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있었다. 폐품을 줍는 일도 몇 년 전부터는 더 많은 노인들이 하고 있는 것을 보아 왔다. 정부에서 노인복지에 관심을 가지고 많은 예산을 쓴다고 하지만, 아직도 그들의 삶이 녹녹지는 않는 모양이라고 그는 생각이 들었다. 저마다 수레를 끄는 이유와 사연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이 들었다. 십 년 전에 세상을 떠난 부인이 머리를 스쳐 갔고, 같이 보냈던 수십 년의 시간들의 조각들이 주마등처럼 하나둘씩 나타났다 희미하게 사라졌다. 잠시 후에는 이혼을 해서 혼자 자식을 키우고 있는 딸 생각으로 걱정이 가득했다가 손녀의 모습이 떠 오르니 가슴이 따뜻해져 왔다.
어느새 벌써 해는 졌고 깜깜해진 거리를 가로등들이 환하게 비추어 주고 있었다. 그때 건물 화단 근처에 쓰러져 있는 사람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몸이 약간씩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면, 술에 취해 잠이 들어 있는 듯했다. 초저녁부터 무슨 술을 저렇게 먹고 쓰러져 있는가 생각을 하며 그냥 지나쳐 갔지만 조금 있다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로 오게 되었다. 아직 날씨가 춥지는 않지만 밤새 저렇게 있다간 체온이 떨어져서 어떻게 되지는 않을까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노숙자에게서 나는 악취가 최노인의 코를 짤렀다. 하지만 그에게 다가가 몸을 일으켜 벤치에 앉혔다. 다행히 완전히 뻗어 있는 상태가 아니어서 노숙자는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노인을 보자 그는 입을 열었다.
"어르신! 죄송합니다. 잠깐 정신줄을 놓아 버렸네요. 제 몸에서 냄새가 많이 날 텐데, 조용히 길 가시는 분께 제가 너무 죄송합니다."
행색은 저래 보여도 예의는 아는 사람이라고 느끼며 노인은 말을 이어 나갔다.
"여기에 이렇게 밤새도록 누워 있으면 잘 못 하면 입이 돌아가든지 할 수가 있어요. 어디에 살고 있는지?"
노숙자는 머리를 긁으며 대답했다.
"저야 뭐 어디 집이 있나요? 보다시피 누운 곳이 제 집이고, 누워서 올려다보는 하늘이 제 집 천장이죠."
"그래. 혹시 끼니는 해결했는가?"
"저야 그때 그때마다 해결합니다. 요즘에는 무료급식소도 있고요."
"여기 잠시 기다리고 있게. 내 금방 올 테니까."
조금 있다가 최노인은 다시 나타났고, 근처 분식집에서 사 온 김밥 두 줄이 담긴 검은 비닐봉지가 그의 손에 있었다.
"이거 먹게나. 잠은 밖에서 자더라도 밥은 먹어야 살 수 있지."
"어르신. 감사합니다.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하고 버신 돈일 텐데. 사실 평소에 리어카 끌고 다니시는 모습 가끔 뵌 적이 있습니다."
"나도 자네를 처음 본 것은 아니야.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지. 지난번에 여기 공인중개사 사무실 사장과 자네가 싸우고 있을 때 자네를 자세히 볼 수가 있었지."
"네. 저도 옛날에는 이렇게 노숙하며 살지는 않았습니다. 노숙자들 대부분이 다 그렇게지만요. 어엿한 직장과 가정이 있었죠. 이제는 다 지나간 이야기이지만요."
"그래. 자네도 사연이 있었군."
그 이후 최노인은 일을 마치고 그 부근을 지나가다 그가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이면 어김없이 그의 곁으로 다가가 말동무가 되어 주었다. 노숙자는 마치 노인을 기다리고 있는 듯이 그 벤치에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점점 더 최노인에게 마음을 열어 주었고, 지나간 자신의 인생을 들려주기 시작하였다.
노숙자는 자신의 이름을 박서해라고 말해 주었다. 한국에서 잘 나가는 기업의 하청업체의 관리자로 40대 중반까지 그는 근무를 하였다. 자신이 다닌 회사 이름과 본인의 당시 직책과 하는 일까지 상세히 얘기를 해 주는 것을 보면 거짓은 아닌 듯하였다. 그 시절의 이야기를 노인에게 얘기해 줄 때의 눈빛을 보면 그가 당시 얼마나 조직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짐작케 하였다. 몇 시간이고 그의 옆에 앉아서 이야기를 들여 주었지만 노인은 전혀 피곤하거나 싫어하는 기색을 하지 않았고 끝까지 조용히 그의 말을 경청해 주었다.
"그때는 말입니다. 저 밑에 30명 정도 직원들이 있었죠. 회사와 함께 그 사람들의 생계를 제가 다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회사가 없어지고 모두가 실업자가 되고 말았죠."
"회사가 갑자기 어려워졌어?"
박서해는 잠깐 뜸을 들이며 기억을 떠 올리는 듯했다. 흐리멍덩했던 그의 눈빛에 천천히 힘이 들어오고 있었다.
"박 부장! 거산에서 오더 내려온 것 확인했어? 주문 물량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 같지 않아?"
이사님은 퇴근 무렵 갑작스럽게 호출을 하셨다. 그는 이사님 방으로 급히 달려갔다.
"그래도 계약이 몇 달은 더 남았습니다. 요즈음 경기가 좋지 않아서 거산에서도 사정이 여의치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10년 넘게 거래를 하고 있는 곳이지만, 요즘 들어 좀 물량이 많이 줄어들고 있는 점은 좀 이상하단 말이야. 박 부장은 다음 주에는 한번 거산에 들어가서 확인을 해 봐! 오랜만에 인사드리러 왔다고 하고 말이야."
"예. 알겠습니다. 이사님."
퇴근하고 부서 직원 몇 명과 함께 박 부장은 시내로 나가서 저녁을 먹으며 소주잔을 기울였다.
"김 과장! 아이가 생겨서 회사일 하랴, 집에서 가족들 돌보랴, 힘들겠어?"
"아닙니다. 부장님. 오히려 제 어깨에 힘이 더 들어 가는걸요. 식구 한 명이 더 늘어서 더 열심히 일해야겠다고 생각하니 동기부여가 되어 좋습니다."
"그래. 오히려 그때가 좋은 거야. 나도 그랬던 것 같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회사의 최근 사정으로 주제는 옮겨 가고 있었다.
"우리 부서에서도 몇 명을 내 보내야겠어. 이번 주에 두 명과 얘기를 나누었어. 회사가 어려워 어쩔 수 없다고 했지 뭐야? 속으로는 왜 자기들이냐고 했겠지만 묵묵히 받아들이더군. 내보내야 할 사람들 결정하고, 사직을 권고하는 과정이 나로서는 너무 힘들어. 그런 게 월급 받고 내가 하는 일 가운데 하나이지만 말이야. 나가서 새직장 구하기까지 실업급여는 받을 수 있을 테지만..."
"부장님. 힘내세요! 기술이 좋은 직원들이니 나중에 재취업을 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회사 떠나는 우리 식구들이 다 잘 되어야 될 터인데 말이야."
박 부장은 거산의 문을 들어서기 전에 다시 한번 옷차림을 점검하였다. 그의 회사의 주문 물량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제일 중요한 원청회사였기 때문이었다. 사무실 입구에 자리 잡은 여직원에게 말을 걸었다. 잠깐 기다리시라고 사무적인 대답을 하고는 그에게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리고 나니, 원청사의 실무급 직원 한 명이 그를 맞이하여 주었다. 일을 하다가 나왔는지 원청 직원은 박 부장과 얘기를 나누며 계속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듯 보였다. 최근 주문 물량에 대하여 은근히 말을 걸어 보니, 역시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자기들도 충분히 주문을 줄 만큼 사정이 여의치 않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다음 계약에서 더 유리한 조건을 제시할 다른 업체와 계약을 맺을 수도 있다는 말을 하였다. 박 부장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물량이 줄어드는 것과 계약이 아예 갱신이 안 되는 것은 엄청난 차이였기 때문이었다. 재계약을 위해서 요구하는 조건을 맞추는 것은 손해를 보고 장사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 후 박 부장을 비롯하여 회사의 임원들은 거산과 재계약을 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출혈까지 각오하며 계약을 하겠다고 의사를 표명하였지만 결국 다른 업체로 계약이 되고 말았다. 그 뒤, 회사는 급격히 어려워졌다. 그동안 정들었던 직원을 내 보내는 박 부장의 마음은 아팠고 스트레스는 극도에 달해 갔다. 어느 날 자신도 사표를 내기로 결심하였고, 마지막까지 회사와 운명을 다하지 못하고 떠나서 죄송스럽다는 말을 임원들에게 남기고 회사를 나왔다.
관리자로 재취업을 하기는 쉽지가 않았기 때문에 자영업을 하기로 생각하여 치킨집을 열어 보았다. 장사가 안되어 빚만 많이 생겼지만 힘겹게 버티어 가고 있었다. 어려운 처지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자기를 위로해 주는 부인에게 고마웠고, 학원도 잘 보내 주지 못 했지만 공부를 잘해 주고 있는 딸이 너무 자랑스러웠던 시간이었다. 어느 날 밤에 부인은 학원에서 늦게 마친 딸을 데리고 가게에 찾아오기로 되어 있었다. 늦게까지 고생하는 남편이 안쓰러웠는지 같이 집에 들어가자고 그에게 전화를 걸었기 때문이었다. 앉아 있던 단골손님에게 오늘 밤은 조금 일찍 가게를 닫겠다고 양해를 구했고, 가게 밖에서 배웅을 해 주었다. 그때 저기 맞은편 건널목에 서 있던 부인과 딸이 보였다. 그들은 그를 보자 반가운 나머지 신호등의 색깔이 바뀌기 전에 건너왔다. 그러나 커브길에서 갑자기 나타난 트럭이 모녀를 뒤늦게 발견하고 속도를 줄였지만 심한 충격을 주고 부딪히며 멈추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사고를 보고 그는 바로 달려갔다. 응급실에서 몇 시간 동안 의사들은 모녀를 살리기 위해 사투를 벌였지만 끝내 모두 숨지고 말았다. 매일 밤 치킨집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들의 환영을 그는 보기 시작했고 집 식탁에도 일부러 세 명의 밥그릇, 국그릇, 숟가락, 젓가락을 올려놓았다. 그렇게 이 년을 버텼지만, 슬픔을 지워 버릴 수가 없었다. 이제는 모든 것을 정리한 채 떠나기로 했다. 자살을 해 보려고 했으나 그때마다 다시 살아나기만 몇 번을 되풀이하였다. 마침내 그는 가족들과 살았던 집도 정리하고 정처 없이 각지를 떠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거리에서 생활하는 거친 환경은 잠깐이라도 추억과 악몽으로부터 그를 떠나 있게 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그런 거리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다.
최노인은 그날도 리어카를 끌며 부동산 사무소 옆을 지나고 있었다. 모든 것을 눈여겨보는 습관이 있는 그의 눈에 사무소 안이 컴컴한 것이 보였다. 대낮이어서 잠깐 어디 나가서 자리를 비웠겠지 생각했지만, 문 입구에 종이가 붙어 있는 것이 보여서 걸음을 그쪽으로 가까이 옮겨 보았다. 부친상으로 며칠 자리를 비우게 되었으며 급한 용무가 있을 경우를 대비하여 핸드폰 번호가 적혀 있었다. 상황이 파악이 되자 그는 다시 가던 길을 떠나기 시작했다.
약 이십 년 전에 있었던 모친상 이후에 형제들은 처음으로 모두가 모여서 자리를 같이 하였다. 조문객을 맞이하는 자리에서 나란히 줄을 서서 인사를 나누며 절을 하였다. 마치 의식을 올리는 사람들처럼 기계적이었고, 형제들은 서로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무엇이 우리들을 이렇게 매정하게 갈라놓았을까?’라고 민혁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도 형과 누나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어머니 제사에 형님 집에 처음 몇 년 간은 갔었지만, 제사 지내기를 싫어하는 형님과 형수님의 모습이 너무 싫었던 것이 이유가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면서도 그 보다 더 많은 것들이 얽혀서 서로 멀어져 버린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경제적으로 무능하고 나이가 들어서는 병약해져 병원비가 많이 나가고 있었던 아버지를 누가 모시느냐 하는 문제로도 형제들은 서로 다퉜었다. 결국, 아버지는 혼자서 오랜 시간 사시다가 쓸쓸히 하늘나라로 가신 것이었다. 누나가 오랜만에 전화하였지만, 아버지가 받지 않아서 걱정이 되어서 집에 찾아갔었지만 이미 운명하신 이후였다. 다행히 시체가 온전한 것을 보니 시간이 많이 지나지는 않은 것처럼 보였다. 조문객들이 자기들끼리 소곤소곤 대고 상주를 욕하는 것이 들렸다. 상복을 입은 불효자식들은 장례식장에서도 아버지의 사진을 바라보는 횟수보다 자신들의 가족들을 더 챙기고 있었고, 직장 등에서 찾아온 조문객들에게 더 신경을 쓰고 있는 중이었다. 자정이 넘자, 조문객들의 발걸음이 끊어졌고, 가족들은 모두 지쳐서 자리를 찾아 지친 몸을 뉘 우기 시작하였다. 텅 빈 빈소를 민혁은 홀로 지키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했고 말 잘 듣던 막내인 그를 아버지는 형제들 중에서도 특히 사랑하셨다. 기대에 부응하여 좋은 대학에도 진학을 하였지만 그가 음악에 빠져 기타 연주에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을 보자 아버지는 아들을 찾아가 몹시 야단치며 기타를 뺏는 일이 생긴 이후로는 부자간에 거리가 멀어져 버렸다. 시간이 지나자 민혁도 청년실업이 만연한 현실 속에서 힘들게 직장을 찾아가면서 음악에 대한 열정과 기억들을 서서히 잊어 가기 시작하였다.
장례식이 끝나고, 아버지의 집에서 유품을 정리하던 중에 안방 한구석에서 자신의 기타를 발견하였다. 수십 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그동안 관리가 되어 있었는지 상태가 양호하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누나가 말했다.
“그 기타 생각나니? 아버지가 그때 너한테 그렇게 하셨어도 마음이 많이 아프셨던 모양이더라. 우리들 중에서 너를 제일 이뻐하셨는데, 처음으로 너한테 그렇게 심하게 야단치시고 기타까지 뺏드셨는데, 아버지 마음속에 평생 남아 계셨을 거야.”
민혁은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십 대 소년이 부모에게 반항을 하듯이 그는 그 일 이후로 아버지에게 마음의 문을 닫아 버렸었다. 진지하게 얘기를 다시 해 보려고 다가왔을 아버지를 그는 냉정히 밀어내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금에야 비로소 그분의 진심을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집을 나오는 그의 손에는 오래된 그의 기타가 쥐어 있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민혁은 사무실과 집을 오가는 틀에 박힌 생활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다행히 중개 건은 많지는 않지만 꾸준히 성사가 되어 가고 있었고, 그 이상은 욕심을 내지 않았다. 한 번씩 찾아와서 벤치에 앉아 있는 노숙인 영감을 보아도 이전처럼 적개심이 가득한 눈빛을 보내지도 않았다. 리어카를 끌고 지나가는 노인의 모습도 멍하니 사무실 안에서 보며 하루를 보냈다. 그런던, 어느 날, 그 노인의 모습에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습이 투영되기 시작했다. 독거노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느 날 민혁은 지나가던 최노인을 불러 세웠다.
"영감님. 잠깐 들어오셔서 차 한잔 하고 가세요!"
노인은 그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잠깐 머뭇거리다가 그에게 걸어왔다.
"다른 게 아니라, 근처에 매일 같이 지나가시는데 인사 한번 제대로 못 드렸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불편을 끼쳐 드리려는 것은 아니고 정말 따뜻한 차 한잔이나 대접해 드리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선물 받은 대추차 세트에서 차를 꺼내어 뜨거운 물을 잔에 붓고 다과와 함께 노인의 앞에 내어 놓았다.
"저 같은 노인에게 이렇게 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얼마 전에 지나가다가 문이 닫혀 있길래, 사장님 사정을 알게 되었습니다."
"네. 저의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셔서 최근에 장례를 치르고 돌아왔습니다."
"상을 치르는 게 많이 고생하는 것인데, 마음고생, 몸고생이 많으셨겠어요?"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누구나 치러야 하는 것이지요. 영감님도 어디 아프시지 않도록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저야 이제 나이를 충분히 먹었으니, 갈 때가 되면 떠나야지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노숙인에 대한 화제로 옮겨 갔다. 최노인은 그동안 노숙인과 대화를 나누며 알게 된 사연에 대하여 알려 주었다. 노숙인의 이름과 이전 회사와 직책을 알게 되자, 민혁은 감짝 놀라며 눈이 동그래졌다. 노숙자가 당시 근무했던 회사는 민혁이 일했던 거성의 하청업체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업체가 거성과 재계약이 안된 이후 경영이 급격히 어려워져서 다음 해에 문을 닫은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재계약건을 윗사람들부터 지시를 받고 자신이 직접 실무자로서 서류 작업을 진행했었기 때문이었다. 박 부장이 몇 번 원청을 찾아와 사정을 하였고, 그 면담 자리에 자신도 있었다. 세월이 흘러서 노숙인의 얼굴에서 박 부장의 모습을 찾기가 힘들었지만, 모든 것을 종합하여 다시 기억을 떠 올려 보면 노숙인의 얼굴에서 희미하게나마 박 부장의 흔적을 찾을 수가 있었다. 재계약건은 원청 임원이 잘 아는 지인의 회사와 이루어졌고, 박 부장이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당시 실무자였던 민혁은 기존 하청의 사정을 안타깝게 생각했지만, 위에서 시키는 데로 일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한 회사가 자신이 작성한 서류 하나로 망하게 되고 그 직원들이 멀지 않아 대량 해고가 될 것이라는 것을 명백히 예상할 수가 있어서 당시 젊었던 민혁은 매일 불편하였다. 하지만, 재계약이 끝난 후에 승진이라는 조직의 보상이 주어졌고, 그는 그 달콤함에 빠져 버리자 그때의 일들이 희미하게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는 몇 년마다 찾아오는 승진 경쟁에서 다른 직원을 밟고 올라가는 승리감을 그는 누리기 시작하였다. 대기업 내에서 앞 길이 창창했던 그의 인생에도 다른 막강한 경쟁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그들은 이전의 경쟁상대와는 비교가 되지 않게 그보다 월등했다. 마치 정글 안에서 자기보다 상위에 놓인 포식자들을 만난 것 같았다. 경기가 어려지면서 정리해고의 바람이 불자, 어느새 그의 이름도 명단에 보였다. 퇴사 이후 온갖 분노로 가득 찬 시간을 보내다 마음을 잡고 공인중개사 시험을 시작하였고 그 이듬해 최종 합격을 하였다. 그 이후로는 조직에서 더 성공하지 못한 분풀이를 하듯이 돈을 많이 벌려고 노력을 하며 살고 있었던 것이었다. 가족을 교통사고로 잃어버렸다는 마지막 얘기를 듣게 되자 민혁은 눈을 감은채 한숨을 내 쉬었다. 그리고는 조금 있다가 최노인에게 말하였다.
"그랬었군요. 사람이 산다는 것이 서로 얽혀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그 얘기를 저에게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영감님은 오늘은 하루 쉬세요! 그냥 오늘 저의 마음이라고 생각하시고요. 돌아가신 제 아버님이 생각나서 그런 것입니다."
민혁은 돈을 든 봉투를 영감에게 조용히 내밀었다.
"이 봉투를 받아야 할 사람은 따로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사장님께 이것을 받아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직 하루가 많이 남았으니, 폐지를 충분히 주울 수 있어요. 아무튼, 오늘 이렇게 저를 잘 대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노인이 자신의 생각을 알고 있는지 확신을 할 수는 없었지만, 민혁은 영감님이 무엇인가를 느꼈다고 생각이 들었다.
며칠을 기다려도 노숙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자신이 퇴근하고 난 저녁시간에 나타날 수도 있다고 생각하여 민혁은 불을 끄고 사무실 안에서 음악을 들으며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그때 밖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고 움직이고 있는 방향은 벤치가 있는 곳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 문을 잠그고 밖으로 나왔다. 벤치에는 그가 기다리던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가 다가오자 노숙자는 쳐다보았다. 민혁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 말을 걸어 보았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안심하세요! 오늘은 선생님과 싸우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박서해의 얼굴에는 전혀 놀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태연히 옆으로 옮겨 앉으며 자리를 내어 주었다.
"내가 냄새가 좀 나서 옆에 앉기가 쉽지 않을 거요. 옆에 앉든지 거기서 서 계시든지 편 하대로 하시오."
민혁은 천천히 다가가 그의 옆에 앉았다. 몇 초 동안의 침묵을 깨고 말을 시작하였다.
"날이 추워지기 시작했는데, 밖에서 고생이 많으십니다."
"내야 뭐, 이렇게 산지도 오래 되었수다. 근데, 오히려 나 때문에 당신이 마음고생이 많았을 터인데. 남의 가게 앞에서 이렇게 죽치고 있으니 장사하는데 지장이 되었겠지. 요즘은 밤에만 오려고 해요. 그나마 여기가 제일 괜찮은 자리인 것 같아서 자주 오게 되지. 옛날에 살던 우리 동네를 많이 닮았어. 그래서 오게 되는 거요. 나도 그렇게 나쁜 놈은 아니요."
"아닙니다. 선생님. 일전에 제가 너무 흥분해서 그랬습니다. 장사가 잘 안 되거든요. 낼 돈은 많은데, 수입은 적고 해서..."
"사업하는 사람들이 힘들지요. 월급 받고 일하는 사람들도 요즘 힘들긴 마찬가지이지만 사업하는 사람도 힘들거든.."
"제가 일전에 있었던 일도 사과드리는 겸 해서, 식사라도 사드리고 싶지만... 이 봉투 받으세요. 오랜만에 맛있는 거 사드시고, 하룻밤은 편하데서 주무시고 뜨거운 물에 몸도 담그시고요."
"아니. 이게 뭐요? 사장님 마음은 고맙지만, 내가 노숙자이지만 아직은 남한테 구걸까지는 하지 않소. 이 봉투 받지 않는다고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시오. 모두 내 자존심을 위한 것이니까. 남의 돈을 쉽게 받아 버리면 왠지 내가 걸인이 될 것 같아서 말이오.. 하하! 노숙자이지 아직은 거지는 아니오."
민혁은 갑자기 무안해지며 얼굴이 빨개졌다. 그러는 모습을 보고 박서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앉은자리를 정리하고 헤어진 가방을 다시 어깨에 메었다. 천천히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 민혁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박 부장님! 죄송합니다. 거성을 대신해서 제가 사과드립니다. 그때 일만 없었어도 박 부장님이 이렇게까지 되시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박서해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가로등을 뒤로 한채 서서히 돌아 섰다. 그리고는 침묵하며 한참을 서 있었다. 그러고 서 있는 모습을 민혁은 쳐다보고만 있는 중이었다. 드디어 그는 입을 열었다.
"다 지나간 일이오. 이제 와서 돌이킬 수 없는 것이오. 하지만, 오늘 사장님이 한 마지막 그 한마디로 모두의 상처가 치료될 것입니다. 저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사장님이 그동안 가졌던 마음의 짐이 조금은 가벼워지겠죠. 저도 그러길 바라겠습니다."
가로등을 뒤로한 채 말하고 있는 그의 얼굴은 캄캄해서 잘 보이지가 않았지만, 미소를 짓고 있는 듯이 보였다.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 그의 모습은 가로등 저 너머 컴컴한 어두움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 뒤로 노숙인은 민혁의 사무실 앞에 나타나지는 않았다. 몇 달째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걱정이 되었고, 최노인을 비롯하여 이웃사람들에게 수소문을 해 보았지만 그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KTX가 도착할 시간을 계속 체크하고 있었다. 플랫폼에 도착하고 있는 열차 속에 앉은 딸을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모녀는 서로 웃으며 한참 동안 얘기를 하면서 기차역을 걸어 나와 주차해 놓은 자동차에 탔다. 늦가을이었지만 저녁부터 비는 장마철같이 많이 내리고 있었다. 비를 맞으며 집까지 오는 딸이 걱정이 되어 어머니는 차를 몰고 역까지 마중을 나온 것이었다. 큰 도로를 달리면 비 때문에 교통이 많이 막힐 것 같다고 생각되어 어머니는 지름길인 지하터널을 이용하기로 하였다. 지하터널 입구에서 지하터널로 차를 몰고 내려온 순간 앞에 밀려 있는 차들을 발견하였다. 판단을 잘 못 했다고 생각했지만 뒤에도 차들이 밀려 있어 꼼짝없이 갇히게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거북이처럼 느리게 지하터널을 이동하고 있던 도중에 갑자기 터널 벽의 양 옆에서 물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였다. 폭우처럼 쏟아지는 비로 인해 빗물이 터널 안으로 밀려들었고, 터널 안 하수구의 물도 쓰레기들로 인해 막혀서 물이 역류하여 위로 올라오고 있는 중이었다. 갑지가 불어난 물은 어느새 차 창문까지 올라오고 있었다. 차문을 열고 모녀는 탈출을 하였고 사람들을 따라서 물속을 헤치며 지상으로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불어 나는 물의 속도는 거세어졌고, 터널 안은 아비규환의 현장으로 변하고 있었다. 살려달라는 아우성이 터널 안을 가득 메웠다. 터널 근처 지붕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던 박서해는 그 소리를 듣고 터널 입구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잠깐 망설이다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물속에서 발버둥 치고 있는 사람들을 하나둘씩 위로 밀어 올려 주었다. 몇 사람을 구해주고 나서는 자신도 지상으로 올라가려고 하니, 저기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두 모녀의 모습을 발견하였다. 그는 주저 없이 그곳으로 달려가서 둘을 밀고 밖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모녀가 위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나서는 자신도 올라오려고 하였으나 이끼가 낀 바위를 잘못 헛디뎌 물속으로 다시 빠지고 말았다. 그때 터널 벽을 뚫고 거센 물살이 쏟아져 나왔고, 급류에 휩쑬려 그는 터널 안쪽으로 휩쓸려 들어가고 말았다.
다음날 뉴스에서 어젯밤 폭우로 인해 터널 안에서 숨진 사람들의 명단이 공개되었고, 어느 노숙자가 많은 사람들을 구했다는 것을 기자가 말하는 것을 민혁은 보고 있었다. 마지막에 목숨을 가까스로 건진 두 모녀의 인터뷰에서 노숙인의 영웅담과 마지막 모습이 생생히 묘사되고 있었다. 차가운 가을비로 불어난 물속에서 죽어 갔을 그의 모습을 생각하니 민혁은 눈물이 나왔다. 몇 달 동안 이 근처에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데, 노숙자들이 많이 있는 역 주변으로 거처를 옮겼다고 짐작이 되었다. 그날 밤은 사무실 불을 끄고 혼자 앉아 있었다. 얼마 뒤에 그는 책상 뒤에 놓인 기타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폭우가 쏟아져 사람들을 죽게 한 어젯밤과는 다르게 오늘 밤은 무서울 정도로 하늘이 아름다웠다. 그리고는 벤치에 앉아서 기타를 조용히 연주하며 죽은 이를 위하여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비라도 내리는 쓸쓸한 밤에는
남몰래 울기도 하고
누구라도 행여 찾아오지 않을까
마음 설레어보네
거리를 거닐고 사람을 만나고
수많은 얘기들을 나누다가
집에 돌아와 혼자 있으면
밀려오는 외로운 파도..."(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