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의 ‘마실’이 예술이 되는 날까지
나는 지난해 겨울 한 죽마고우의 초청으로 흑산도에서 공수해 온 홍어로 요리한 삼합을 대접받았다. 나는 세 명의 중고등학교 동창과 함께 통나무 의자에 앉아서 나무 탁자 위에 푸짐하게 차려놓은 안줏거리와 함께 얇은 양은 술잔에 가득 찬 막걸리가 못 줄기를 지날 때 느껴지는 촉촉하고 시원한 즐거움을 마음껏 만끽할 수 있었다. 나는 이 감미로운 분위기에 유혹되어서 청소년 시절에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이반 투르게네프의 소설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야 말았다.
이야기의 시작은 매일 저녁, 이제 막 이성에 눈을 뜨기 시작한 마을의 청년들이 하나둘 ‘지나이다’의 집으로 모여드는 장면으로 펼쳐진다. 그녀는 요염하면서도 지성을 지닌 여인이었다. 말끝마다 번뜩이는 재치와, 무심한 듯 건네는 눈짓 하나로 상대의 마음을 뒤흔드는 재주를 타고난 사람이었다. 청년들은 그녀의 말 한마디, 웃음 한 번에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곤 했다. 상냥함과 냉정함, 장난기와 성숙함이 절묘하게 뒤섞인 그녀 앞에서, 그들은 어느새 모두 단체로 상사병에 걸린 환자들처럼 변해 있었다. 지나이다의 집은 사랑과 이성이 교차하는 작은 학교 같았다. 밤이 깊어도 등불은 꺼질 줄 몰랐고, 그 속에서 젊음의 숨결이 은은히 번져 나왔다. 그런 장면을 읽을 때마다, 나는 고향의 저녁 마실, 달빛 아래 웃음이 오가던 그 다정한 시간을 문득 떠올리곤 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을 나는 경기도 연천 장남면에서 보냈는데, 1953년 7월 27일 6.25 전쟁의 정전협정 이후, 비무장 지대로 약 15년 이상 출입이 불허되었다가 1969년에 수복이 된 곳으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태어나서 농사를 짓고 살던 우리 집안의 고향이다.
늦게 귀향하면 고향 땅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에 우리 가족은 서둘러 돌아왔다. 그러나 한때 풍요를 약속하던 논밭은 수십 년의 세월 동안 버려져 아까시나무와 잡초가 숲처럼 뒤엉켜 있었다. 그 거칠고 메마른 땅을 어머니와 어린 자식들이 다시 일군다는 것은, 애써도 끝내 힘만 소진될 뿐, 도저히 완수할 수 없는 과업이었다. 농기구를 다룰 줄 알고 농사일을 담당할 힘이 있는 아버지와 청년이 있는 다른 가족들에게 고향이 이 거친 땅을 옥토로 만들어서 농사를 잘 지으면 부농이 될 수 있겠다는 희망의 땅이었다면, 땅을 개간할 일꾼이 없는 우리 가족에게 황무지 같은 논밭을 개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으므로, 고향은 절망의 땅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머니는 날이 갈수록 바닥을 드러내는 식량과 살림살이를 바라보며 끝내 결심하셨다. 식솔을 고향에 남겨둔 채 홀로 도회지로 나가 행상을 하며 돈을 벌겠다고. 그렇게 어머니의 두 어깨에는 가족의 삶과 고향의 쓸쓸한 계절이 함께 내려앉아 있었다.
나 같은 어린아이가 흙벽돌로 벽을 쌓아 갈대로 지붕을 올린 작은 오두막집에서, 어머니 없이 칠흑 같은 어둠을 견디는 것은 두렵고 무서운 일이었다. 내가 그 외진 곳에서 지독한 가난과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매일 밤, 마실을 가서 친구들을 만날 때 느껴지는 따뜻한 마음이었다. 동네 아이들은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가, 어둠이 작은 초가집을 하나씩 삼키기 시작할 때, 삼삼오오 모여서 하얀 종지 그릇에 들기름을 부어 목화솜으로 심지를 만든 등잔불 아래서 얼굴을 맞대고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옛날이야기’를 교대로 성대모사까지 동원하여 신나게 연출하곤 했다.
10여 년 전, 내가 몸담았던 회사의 사장은 매달 한 차례 인사동의 오래된 골동품 가게를 무대로 작은 오페라 공연을 열곤 했다. 공연은 약 두 시간짜리 오페라를 핵심 장면만 추려 축약한 형식이었고, 보통 두세 명의 성악가가 무대에 올랐다. 때로는 인간문화재로 지정된 명창들을 초청해 심청가나 춘향가 같은 판소리를 들려주기도 했다. 관객은 대체로 10명에서 20명 남짓이었지만, 그 친밀한 규모가 오히려 공연의 매력을 더했다. 무엇보다도 이 음악회의 특별한 점은, 공연이 끝난 뒤 약 20분 동안 연주자와 청중이 함께 작품의 주제와 감상을 나누는 대화의 시간이 마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옆 사람의 숨결까지 느껴지는 조용한 공간에서 나눈 그 감미로운 음률의 공유는 깊고도 진한 울림으로 남았다.
공연이 끝나면 출입문 앞에는 호남에서 공수해 온 장독이 놓였고, 그 안에는 막걸리가 가득 차 있었다. 관객들은 한 사발씩 막걸리를 따라 마시며, 안주로 과메기 한 토막을 손에 들고 공연장을 나서곤 했다. 그 정겨운 풍경은 마치 고향 마을 사람들이 모여 서로의 안부를 나누던 ‘마실’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나는 이 작은 음악회에서 초대된 외국인들을 안내하는 일을 맡았는데, 그들은 특히 한국 사람들이 말하는 정(情)과 음악이 어우러질 때 피어나는 깊은 공감의 울림에 크게 감동하곤 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나는 정부에 ‘마실 문화운동’을 제안하고자 한다. 그 목표는 단순히 행사를 열거나 축제를 치르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온 국민이 세계에서 가장 성숙한 클래식 청중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것이야말로 이 운동의 핵심이다. ‘마실 문화운동’의 본질은 공연자가 아닌 청중이 주체가 되는 문화적 실천에 있다. 화려한 볼거리나 일회성의 감동이 아니라, 고전음악이 지닌 깊은 힘을 통해 인간 내면의 가장 근본적인 성정을 일깨우고 인성을 회복하는 데 그 뜻이 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마실 문화운동 본부’를 조직하고, 예술적 통찰과 행정적 역량을 두루 갖춘 인물이 중심이 되어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할 것이다.
특히 예술에 대한 신념과 사명감을 지닌 젊은 예술가들을 ‘문화 전도사’로 특별 채용하여, 그들이 지역 곳곳에서 기획력 있는 소규모 공연을 주도하게 한다면 그 효과는 더 커질 것이다. 오페라와 판소리 같은 고전 예술을 마을회관이나 카페에서 나누고, 공연 전후에는 출연자와 청중이 함께 **감상과 사유를 나누는 ‘대화의 마실’**을 마련하도록 기획한다. 이러한 과정은 단순히 공연을 즐기는 경험을 넘어, 문화 현장을 이해하고 직접 기획할 수 있는 공연 기획 인재를 길러내는 중요한 사회적 실험이기도 하다. 결국 ‘마실 문화운동’은 예술을 통해 인간다움을 회복하고, 청중과 예술가가 서로를 성찰하게 만드는, 작지만, 깊은 문화적 혁명의 시도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