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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킷 리스트와 앙코르 리스트

장남 초등 동창 제주 여행 보고서

by 최만섭

생각날 때 바로 실행해야 하는 이유


우리 나이쯤 되면, 무슨 일이든 생각났을 때 즉시 행해야 직성이 풀린다. 아마 칠십 평생을 살며, 해야 할 일을 이런저런 생각으로 미루다 끝내 후회로 남긴 기억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첫눈에 반한 이에게 거절이 두려워 고백 한번 못 하고 속앓이만 하다가, 그가 다른 이의 짝이 되는 것을 애달프게 지켜봐야 했던 세대. 부모와 사회의 눈치를 보며 수동적인 삶을 살아야 했던 우리 세대는, 이제야 비로소 옳다 여기는 일을 스스로 결정하고 실천하는 데 큰 자부심을 느낀다.


젊은이들 눈에는 망령 있는 노인으로 보일지언정, 우리는 물불 가리지 않는 21세기형 돈키호테가 되어간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제주 여행은 내게 주어진 또 하나의 임무였다. ‘성공하면 본전, 실패하면 비아냥’이라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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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 그리고 실행


마침, 근무하던 회사 바로 위층에 국내 굴지의 여행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아마 나는 이렇게 **‘문제 많은(?) 70대 노인 12명’**의 제주 여행을 책임지는 일을 자청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 날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여행사로 향했다. “우리 장남초등학교 동창들이 단독으로 제주 여행을 가려 합니다. 나이가 많으니,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안전한 여행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그 말과 함께 나는 다음과 같은 여행 계획서를 건넸다.


(1). 여행지: 제주도

(2). 여행 목적: 장남초등 동창을 위한 맞춤형 힐링 여행

(3). 일정: 2024년 3월 15일 출발(김포) → 3월 17일 도착(김포)

(4). 숙박: 2인 1실, 시내 중심 호텔

(5). 특징: 단독 길잡이 관광, 쇼핑 일정 없음, 여행자 보험 단체 가입


처음 참가를 신청한 12명 중 3명이 불참하게 되었고, 결국 9명의 동창생이 제주행 비행기에 올랐다. 창밖으로 펼쳐진 구름을 바라보며 나는 문득 꿈꾸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칠십이 넘은 초등학교 동창들이 이렇게 함께 비행기를 타고 여행하다니…” 그 순간, 이 여행은 내 버킷 리스트의 첫 번째 줄에 새겨졌다.


버킷 리스트와 앙코르 리스트


흔히 사람들은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버킷 리스트’에 적는다. 하지만 소설가 백영옥의 말처럼, 진정한 삶의 목록은 미래뿐 아니라 과거를 향해서도 쓰여야 한다. 이미 경험했지만 다시 한번 느끼고 싶은 소중한 순간들, 바로 ‘앙코르 리스트’다. 죽음의 문턱에서 인간이 그리워하는 것은 미지의 경험만이 아니라, 아름다웠던 추억의 재현이다. 그녀는 외친다. “죽기 전이 아니라, 생생히 살아 있을 때 실현하란 말이다! 어둠이 있어야 빛이 의미 있듯.” 그런 의미에서 이번 여행은 우리에게 버킷 리스트이자 앙코르 리스트이면서, 동시에 ‘미망(未忘)’, 즉 잊지 못할 기억을 되새기는 과정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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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망(未忘), 잊지 못함의 힘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남아 있는 나날』의 집사 스티븐스는 평생 주인에게 헌신했지만, 정작 자신의 감정은 외면한 채 인생의 황혼을 맞는다. 그의 삶을 허망하다 비판하면서도, 우리는 그에게서 동병상련의 비애를 느낀다. 그러나 “미망마저 없다면 노년의 문턱은 너무 쓸쓸하다”라는 한 기자의 말처럼, 우리는 그 허망함 속에서도 붙잡을 기억 한 자락이 필요하다.


이번 제주 여행은 나에게 바로 그 **‘미망을 되새기는 시간’**이었다. 아들의 도움을 받아 여행을 준비했지만, 70대 노인 아홉 명을 인솔한다는 책임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 그럼에도 깨달았다. 사회는 어린이를 보호하듯 노인 또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이해하고 품어야 한다는 것. 노인의 ‘망령’은 부끄러운 증상이 아니라, 평생 가족의 생계를 지켜온 영광의 상처임을.


제주여행, 작은 소동들


물론 여정은 순탄치 않았다. 70대 노인 아홉을 인솔해 김포공항 절차부터 제주에서의 모든 일정을 책임지는 것은 버거운 짐이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전자 항공권 확인서를 인쇄해 갔는데, 아니나 다를까, 와이파이가 말썽인 친구의 항공권을 발권하는 데 요긴하게 쓰였다. 대한민국은 70대 노인도 스스로 여행할 수 있는 훌륭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고, 우리는 그 안에서 작은 소동들을 만들며 추억을 쌓아갔다.


에코랜드의 곶자왈 숲을 달리는 기차 안에서는 작은 해프닝이 있었다. 중국어 공부에 빠진 한 여자 동창이 스포츠머리를 한 건장한 남성에게 다가가 “어느 나라에서 오셨어요?” 하고 물었다. 그가 말없이 바닥을 가리키자, 친구는 확신에 차 “중국말 할 줄 아세요?” 하고 되물었다. 잠시 흐른 정적을 깨고 그가 외쳤다. “저 중국 사람 아닙니다! 제주 토박이 관광 가이드입니다!” 우리는 모두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여행과 기억


더 큰 일은 숙소에서 일어났다. 여행 둘째 날 아침, 같은 방을 쓰던 친구가 식중독에 걸린 것 같다며 하루 일정은 쉬겠다고 했다. 처음엔 단순한 피로겠거니 생각했지만, 점심시간이 지나도 휴대전화를 받지 않자 불안한 기운이 감돌았다. 혹시 상태가 악화해 응급실로 실려 간 건 아닐까, 일행 모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사려니숲길을 걷던 나는 결국 호텔에 전화를 걸어 친구의 안부를 확인해 달라고 부탁했다. 한참 뒤, 호텔 측에서 걸려 온 전화는 다행스럽게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라는 소식이었다. 전화벨도 초인종도 듣지 못할 만큼 깊은 잠이라니, 안도와 허탈함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호텔로 돌아오자, 친구는 태연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사실 아침에 너무 졸려서, 식중독이라고 거짓말했어.” 순간 모두가 어이없어 웃음을 터뜨렸지만, 왠지 그 거짓말 속에는 여행의 피로와 일상의 권태가 묻어 있는 듯했다.


나는 그의 무책임함에 속이 상하고 서운했지만, 다른 친구들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모두 그에게 달려가 “나는 네 허물조차 사랑한다”라는 듯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오랜만에 ‘흔쾌히’라는 단어의 의미를 되새겼다. 모든 것을 이해하고, 조건 없이 상대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그 아름다운 부사. 그것은 우리가 모두 동심으로 돌아가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처럼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임을 합창할 때 비로소 생성되는 무언의 합의가 아니겠는가. 다음 날 아침, 비가 그친 제주 하늘에는 어제의 우정처럼 따뜻한 뭉게구름이 목화솜 이불처럼 펼쳐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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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마치며


'정박한 배는 안전하다. 그러나 누가 선장과 선원의 가족을 책임질 것인가? 그래서 배는 거센 풍랑을 무릅쓰고 출항해야만 하는 것이다.’ 많은 친구의 동참을 바라며 내가 단체 카톡방에 올렸던 글이다. 그 말처럼 우리의 여정은 시작부터 비바람과 함께였다. 난기류에 비행기는 심하게 요동쳤고, 앞자리의 아이는 자지러지게 울었다. 2박 3일 내내 제주의 날씨는 초겨울처럼 추웠다. 아내가 챙겨준 겨울 잠바가 아니었다면 어찌 버텼을까. “아내 말 들어서 손해 볼 것 없다”라는 옛말은 진리였다.


하지만 인생이 본래 크고 작은 고난과 맞서는 과정이라면, 이번 여행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남겼다. 궂은 날씨와 친구들이 일으킨 소소한 사건들 덕분에 우리는 이 여정을 더 오래 기억할 것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고요함이 죽음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여행의 진정한 가치는 완벽한 풍경이 아니라, 그 안에서 나눈 경험과 감동에 있음을 우리는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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