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자(朱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소설가 -이반 투르게네프
I. ‘마실’에 대한 나의 추억
나는 지난해 겨울 한 죽마고우의 초청으로 흑산도에서 공수해 온 홍어로 요리한 삼합을 대접받았다. 나는 세 명의 중고등학교 동창과 함께 통나무 의자에 앉아서 나무 탁자 위에 푸짐하게 차려놓은 안줏거리와 함께 얇은 양은 술잔에 가득 찬 막걸리가 못 줄기를 지날 때 느껴지는 촉촉하고 시원한 즐거움을 마음껏 만끽할 수 있었다. 나는 이 감미로운 분위기에 유혹되어서 청소년 시절에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이반 투르게네프의 소설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야 말았다.
이성에 눈을 뜨기 시작한 젊은 청년들은 매일 이 소설의 주인공인 ‘지나이다’의 집에 모여서 그녀의 사랑학 강의(?)를 들은 후에야 비로소 잠자리에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그녀의 매혹적인 유혹, 상냥함과 냉정함, 장난기와 성숙함 등에 흠뻑 빠져 있었다. 이렇게 젊은이들이 모여서 이성과 사랑에 그리고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나누는 장면을 읽을 때마다, 나는 고향에서 마실 갔을 때의 광경이 연상되곤 했다.
마실’은 ‘마을’의 방언이었으나 2015년 12월 국립국어원에서 ‘이웃에 놀러 가는 일’의 의미에만 표준어로 인정하였다. ‘마실 가다’의 사전적인 의미는 이웃 사람을 만나기 위해 놀러 간다는 뜻이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을 나는 경기도 연천 장남면에서 보냈는데, 1953년 7월 27일 6.25 전쟁의 정전협정 이후, 비무장 지대로 약 15년 이상 출입이 불허되었다가 1969년에 수복이 된 곳으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태어나서 농사를 짓고 살던 우리 집안의 고향이다.
귀향을 늦게 하면 땅을 빼앗길 것이라는 소문 때문에 서둘러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전에 농사를 짓던 논밭은 아까시나무와 잡초로 우거져 있어서, 우리는 매일 고갱이와 삽으로 아까시나무와 잡초를 제거하는 고강도의 노동을 마친 후에 허기진 배를 삶는 감자나 보리쌀을 삶아서 광주리에 담아 말린 후에 다시 밥을 지은 꽁보리밥으로 끼니를 때워야 하는 고달픈 생활을 견뎌내야만 했다.
농기구를 다룰 줄 알고 농사일을 담당할 힘이 있는 아버지와 청년이 있는 다른 가족들에게 고향이 이 거친 땅을 옥토로 만들어서 농사를 잘 지으면 부농이 될 수 있겠다는 희망의 땅이었다면, 땅을 개간할 일꾼이 없는 우리 가족에게 황무지 같은 논밭을 개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으므로, 고향은 절망의 땅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머니는 우리 가족이 일용할 식량과 생활용품을 시급히 해결해야만 하는 암담한 현실 때문에, 식솔을 고향에 남긴 채 홀로 또다시 도회지로 나가서 행상해서 돈을 벌어야만 했다.
나 같은 어린아이가 흙벽돌로 벽을 쌓아 갈대로 지붕을 올린 작은 오두막집에서, 어머니 없이 진흙 같은 어둠을 견디는 것은 두렵고 무서운 일이었다. 내가 그 외진 곳에서 지독한 가난과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매일 밤, 마실을 가서 친구들을 만날 때 느껴지는 따뜻한 마음이었다. 동네 아이들은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가, 어둠이 작은 초가집을 하나씩 삼키기 시작하면은 삼삼오오 모여서 하얀 종지 그릇에 들기름을 부어 목화솜으로 심지를 만든 등잔불 아래서 얼굴을 맞대고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옛날이야기’를 교대로 성대모사까지 동원하여 신나게 연출하곤 했다.
10여 년 전에 내가 근무하던 회사 사장은 한 달에 한 번씩 인사 동 골동품 가게에서 작은 오페라 무료 공연을 실행하고 있었다. 오페라를 약 2시간 정도로 축약하여 중요 장면을 공연하는 형태의 음악회로 보통 2~3명의 성악가가 출연했다. 또한 인간문화재로 등록된 분들을 모셔다가 심청가 춘향가 등의 판소리 공연도 했다. 관객의 수는 대략 10~20명 내외였다. 이 작은 음악회의 특징은 공연 말미에 약 20분간 공연자와 청중이 공연 작품에 대한 대화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다. 옆 사람의 숨소리까지 들리는 조용하고 작은 공간에서 감미로운 음률에 대한 청중의 감성적 공유는 깊고 짙었다.
또한 출입문 앞에서 호남에서 공수해 온 장독에 가득 채워놓은 막걸리 한 사발을 마신 후에 안주로 과메기 한 마리를 들고 공연장을 빠져나가는 청중들의 행복한 모습은 옛날 내가 고향에서 경험한 ‘마실’을 연상케 했다. 나는 이 작은 음악회에 초대된 외국인들의 안내를 맡아서 일했다. 특히 외국인 들은 소위 말해서 한국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정(情)과 음악이 만났을 때 일어나는 감흥의 공감 효과에 많은 감동을 하였다.
조선 후기 양반 문화를 보여주는 사진. 사진/공공부문-조선일보에서 인용함
II. 주자(朱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우리나라는 선대의 피땀으로 선진국 대열에 올라섰다. 우리의 국력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강력하며, 삶의 질은 세계 최고 수준에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많은 젊은이가 대한민국에서 희망과 꿈을 펼쳐나갈 것을 거부하고 결혼과 아이 생산마저 포기하고 있어서, 세계 유수의 언론들이 대한민국을 인구 절벽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제일 먼저 사라질 나라로 점치고 있다.
나는 조국에 대한 자긍심을 저버리고, 선대가 이룩한 위대한 성공을 비하하는 비정상적 풍토는 권력욕에 혈안이 되어서 대외적으로는 중국의 속국이 되기를 스스로 자처하면서, 대내적으로는 편협된 이념과 그릇된 예법을 빌미로 극단적인 당파싸움을 일으켜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적을 제거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았던 조선 사대부의 재림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유교는 현실을 기반으로 하는 실천적 학문이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로 표현되듯, 실세상에 써먹기 위한 자기 계발론이 자 처세술, 정치 윤리에 가까웠다. 공자·맹자는 먹고사는 실용의 가치를 중시했다. 공자는 “먼저 백성을 부유하게 해 주라” 했고, 맹자는 “물질이 있어야 마음도 생긴다”(無恒産無恒心)고 했다. 그랬던 유교가 관념론으로 흐른 것은 12세기 주자가 집대성한 성리학 때문이었다. 중국에서 성리학은 유교의 한 분파에 불과했고, 16세기 이후엔 양명학에 밀려 퇴조했다. 조선의 사림(士林) 정권은 성리학 극단주의에 빠져 정신 승리의 길을 치달렸다. 물적 생산을 천대하고, 실용적 변화에 문을 닫았으며, 이(理)냐 기(氣)냐의 관념 투쟁과 상복을 1년 입느냐, 3년 입느냐 같은 형식 논쟁으로 날밤을 새웠다. 중화 질서에 스스로를 종속시킨 것도 모자라 ‘소(小) 중화’를 자처할 지경이었다. 성리학 원리주의가 조선을 망국으로 이끌었다. 그러니 공자가 아니라 ‘주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고 해야 옳았다.”-‘[박정훈 칼럼] 朱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에서 인용
대한민국이 현재 처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주자를 버리고 공자로 돌아가야만 한다. 쓸데없는 이념과 사익을 버리고 실용적이고 실질적인 것을 우선하고 공익을 존중하는 고전주의 유교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것이 약소국의 국민으로 태어난 죄로 평생 고난과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던 우리 부모의 비극적인 삶을 우리 후손에게는 물려주지 않는 최선의 방법이다. 나는 이를 위해서 고전주의 문화의 부활 운동, 제2의 르네상스 운동인 ‘마실 문화운동’을 지방정부가 주체가 되어서 강력하게 추진해야 한다고 주창하고자 한다.
III. ‘마실 문화 운동’의 실천 방법.
'우리 시대의 지성'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마실 문화 운동’의 목표는 의정부시가 주체가 되어서 의정부 시민을 최고의 클래식 청중으로 교육해서 세계 유수의 클래식 음악가들이 공연하기를 원하는 예술의 도시로 만드는 것이다.
1. 우선, ‘마실 문화 운동 본부’를 구성한다. 본부장은 문화 분야에 최고의 지성인을 지명한다. 프랑스의 ‘앙드로 말로’나 대한민국의 ‘이어령 박사’ 같이 그 자신이 예술가이면서 또한 행정 능력이 있는 분을 모셔야 한다.
2.5~10명의 ‘문화 전도사’를 8급 공무원으로 특채한다. 예술대학을 졸업한 25~30세 정도의 젊은이로 구성하되, 분야별 전공자 중에서 기획력 추진력이 있는 젊은이를 대상으로 한다.
3. ‘마실 문화운동 본부’에서의 주요 임무는 공연할 오페라, 판소리 등에서 공연할 작품과 공연자를 선정하고, 마을 회관, 공연 시설을 갖춘 카페 등 공연장소를 선정하여, 작은 음악회를 성공적으로 공연하는 것이다. 단 공연 작품은 모든 이념이 배제된 고전을 엄선하여 선택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4. 오페라와 판소리 등의 고전음악 공연 전후에 출연자와 청중이 작품의 개요와 감상평 등을 교환할 대화의 시간을 갖는다.
나는 ‘마실 문화운동’을 통해서 의정부 시민에게 진솔하게 살아가는 삶의 가치를 설명하고 인간과 세상에 대한 정중한 태도로 행복한 삶을 영위하자는 캠페인을 벌이고자 한다. ‘마실’을 가서 ‘옛날이야기’를 했을 때는 말다툼이 없었다. 나는 이 다툼이 없는 세상을 고전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이념과 사상이 배제된 순수한 고전음악을 가족과 동창과 그리고 이웃집 아저씨와 같이 감상하는 것이다. 공연자와 청중이 대화를 통하여 고전음악과 판소리의 기저에 흐르는 선함을 추구하고 공유함으로써 모든 시민의 마음이 푸른 하늘을 품은 호수같이 맑고 투명해질 수 있을 것이라는 강력한 희망을 피력하고자 한다.
IV. 마실 문화 운동’으로 의정부를 이탈리아의 피렌체로!
르네상스 시대는 1400년대 초에 시작되었다. 르네상스(Renaissance)란 재생 또는 부활을 의미하는 프랑스어인데, 그리스와 로마의 예술을 모범으로 삼고, 이를 다시금 되살려내고자 했던 일련의 움직임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변화는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시작되었는데, 그 이유는 다른 나라처럼 왕정이나 봉건제로 운영되는 것이 아닌, 공화정 체제의 도시국가로 운영되고 있었고, 이들 도시 국가들은 경쟁적으로 무역 거래를 하며 부를 늘려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흥 부자가 된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을 비롯한 당대 많은 은행가와 사업가들은 미술가와 시인을 후원하고 새로운 작품을 주문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르네상스 운동은 지금으로 말하면 풍부한 자금력을 가진 지방자치 단체장의 주도하에 일어난 ‘그리스. 로마 시대’로의 문화 복귀 운동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위대한 예술가들은 대부분 ‘궁정 예술가’였다. 현재의 국립극단 단원과 같은 월급쟁이 공무원이다. 내가 생각하는 제2의 르네상스 운동은 지방 정부가 의정부 시민 전체를 ‘궁정 청중인’으로 양성하는 것이다.
국가는 모든 국민에게 고전음악을 들려주고 교육할 의무가 있다. 또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최소한 갖추어야 할 철학적 가치를 교육해서, 대한민국 국민이 국가에 대한 자긍심을 가지고 조국을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그런 민족 자존심을 심어줄 의무 또한 있다.
나는 김동근( 金東根) 시장이 ‘마실 문화운동’으로 제2의 르네상스 운동을 일으키고, 의정부시를 ‘이탈리아의 피렌체’로 만들기 위한 광대한 계획서를 강력하게 실행할 것을 정중히 요청한다. 그것은 의정부 시민을 고전 음악을 사랑하는 최고의 고전음악 청중으로 탄생시키는 것이며, 그것은 의정부 시민에게 대한민국의 지향점이 주자가 아닌 공자의 유교임을 선포하는 것이다. 따라서 ‘마실 문화운동’은 이 세상의 주인이 이념이 아니라 인간임을 선언하는 문화혁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