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것은 나의 것입니다.
동양학, 비교언어학의 세계적 권위자였던 막스 뮐러는 슈베르트의 연가곡으로 널리 알려진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처녀>, <겨울 나그네>의 노랫말을 쓴 낭만적 서정시인 빌헬름 뮐러의 아들로 독일에서 출생하였다. 베를린 대학에서 F.보프, F.셸링, 파리에서 E.뷔르노프 등에게 사사하였으며 1850년에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가 된 그는 인도 -게르만어의 비교언어학, 비교종교학 및 비교신학의 과학적 방법론을 확립하였다.
막스 뮐러는 오직 한 편의 소설을 남겼을 뿐인데 그것이 바로 <독일인의 사랑(Deutsche Liebe)>이다. 이 밖에도 그는 <고대 산스크리트 문학가>, <신비주의 학>, <종교의 기원과 생성>등의 저서를 후세에 남겼다.
지난 설 연휴의 어느 날이었다. 점심 후 쏟아지는 졸음을 쫓고자 아내와 함께 집을 나섰다. 몇 년 전 우리나라 영화 ‘해피엔드’를 함께 본 이후 처음으로 영화관을 찾은 날이었다. 극장 앞에는 청바지를 입은 젊은이들의 긴 줄이 이어져 있었다. ‘이제 영화관도 젊은이들만의 문화공간이 되어버린 걸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영화가 시작되려면 아직 한 시간이 남아 있었다. 우리는 시내를 천천히 산책하다가, 역전 근처의 대형서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낡은 형광등에서 쏟아지는 초록빛이 진열대 구석의 한 책 위에 부딪히고 있었다. 그 책의 제목은 ‘독일인의 사랑’(Deutsche Liebe) 내가 한때 가슴 깊이 간직했던 청춘의 감성을 다시 불러오는 이름이었다. 산소 용접을 할 때, 붉은 불꽃이 쇳조각을 달구고 그 중심의 초록 불꽃이 두 철판을 하나로 녹여내듯, 그 순간 ‘독일인의 사랑’은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떨어져 나간 청춘의 감성을 다시 이어주었다.
세상 모든 일이 상대적이듯, 1970년대 초는 물질적으로는 가난했지만, 정신적으로는 더없이 풍요로운 시절이었다. 우리는 삶의 가치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데 있으며, 그 아름다움은 오직 감성이 지배하는 세계에만 존재한다는, 지금 생각하면 비논리적일지 모를 낭만에 흠뻑 젖어 있었다. 그 중심에는 늘 지식에 굶주린 사자 같았던 ‘최영준’ 선생님이 계셨다.
선생님은 우리가 모두 지성인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시며, “지성인의 참된 자세는 늘 책을 읽고 사색하는 것”이라 가르치셨다. 우리를 만날 때마다 “너, 오늘 무슨 책 읽었니?” 하고 묻는 것이 선생님의 인사였다. 그리고 이상적인 사랑을 꿈꾸던 우리에게 이렇게 선언하셨다. “『독일인의 사랑』을 읽지 않은 녀석은 사랑할 자격이 없다.” 그 한마디에, 그 책은 우리 모두의 사랑 지침서가 되었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나는 그때부터 사랑이란, 둘이서 오직 한쪽만을 함께 바라보는 것이라 여겼다. 즉, 선과 악을 나누는 이성적인 사고가 아니라 오직 선만이 존재한다고 믿고 행동하는 것이다. 어쩌면 올바른 삶이란 것도 결국 양쪽 세계 중 한쪽에 온전히 몰입하는 것일지 모른다. ‘인간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단순한 감정의 교류를 넘어, 깊고 순결한 영혼의 경험을 나누는 행위다. 사랑은, 그렇게 진한 초록 불꽃이었다.
소설은 중년이 된 주인공이 첫사랑을 회상하며 시작된다. 어릴 적 꿈속에서 본 소녀를 쫓아가면, 그 끝에는 사랑스러운 여인 대신 잡을 수 없는 뭉게구름만이 떠 있는, 그런 아련한 기억. 소년의 집 창 너머에는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오색찬란한 성이 있었고, 그곳을 산책하는 것이 소년의 유일한 꿈이었다.
마침내 꿈이 이루어진 날, 소년은 침대에 누운 채 두 사람에게 들려 옮겨지는 마리아라는 소녀를 만났다. '아! 이 가여운 여인은 평생 걸을 수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겠구나.' 소년은 탄식하며, 그녀의 고통 일부를 자신이 떼어 받아야만 하는 운명을 타고났다고 느꼈다.
어느 날 마리아는 친구들에게 반지를 나눠주며 자신을 잊지 말아 달라 부탁하지만, 소년은 그 반지를 거절하며 말한다. “이 반지를 내게 주고 싶거든 네가 그대로 갖고 있어. 네 것은 다 내 것이니까.” 성년이 되어 재회한 두 사람. 주인공은 오랜 시간 품어온 사랑을 고백하지만, 마리아는 좋은 친구로 남자며 그의 마음을 거절한다. 머지않아 세상을 떠나야 할 자신의 운명 때문에, 홀로 남겨질 그가 겪을 고통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결정이 단순한 거절이 아님을, 자신의 영혼이 도달한 사랑의 본질임을 설명하고자 했다. “진리는 교리가 아니라 내 안의 계시로부터 옵니다. 스스로 사랑을 아는 사람만이 타인을 사랑할 수 있고, 자신의 사랑을 믿는 만큼만 타인의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주인공은 간절히 애원했다. “신은 당신에게 고통을 주셨지만, 그 고통을 나누도록 나를 보내신 겁니다. 당신의 고통은 곧 나의 고통이어야 합니다. 제게 그 짐을 나눌 기회를 주세요.” 그의 눈물 어린 호소에 마리아의 굳게 닫혔던 마음이 열렸다. 그녀는 비로소 깨달았다. 그를 위해 고통을 막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랑을 받아들여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함께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임을.
마침내 그녀가 속삭였다. “나는 당신의 것이에요. 그것이 주님의 뜻이겠지요. 살아 있는 한, 나는 온전히 당신의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다음 세상이 있다면, 좀 더 행복한 모습으로 태어나 이 깊은 은혜를 갚고 싶어요.” 마리아가 죽은 후, 남자는 그녀가 남긴 옛 반지를 받는다. 반지를 싼 낡은 종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당신의 것은 나의 것입니다. 당신의 마리아.’
나는 사랑은 깊고 오묘하여 정말로 자신을 사랑해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는 지은이 막스 뮐러의 생각에 동감한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물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고귀한 존재인가를 느끼는 것이다. 흐르는 강물에서는 자신의 형상을 올바로 볼 수가 없다. 사랑은 일상에서 탈출하여 신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 자신을 사랑하냐고 묻는 마리아에게 주인공 청년은 이렇게 외친다. "마리아! 어린애한테 왜 태어났느냐고 물어보십시오. 꽃에 왜 피었느냐고, 태양에게 왜 비추느냐고 물어보십시오. 나는 당신을 사랑하게 되어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겁니다." 사랑은 “왜”냐는 물음이나 요구가 아니라 경건하게 받아들여야 할 인간의 운명이며 숙명인 것이다.
-2007년 1월 1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