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 세대에 던진 희망의 메시지
지난해 가을, 나는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을 만났다. 그는 ‘핵폭탄의 아버지’라 불리는 오펜하이머 박사의 전기 영화를 만든 감독이었다. 젊고 발랄한 여성 패널이 던진 도발적인 평가에 나는 매료되었고, 놀런 감독이 진지하게 영화에 관해 설명하는 동안 정신없이 그의 영화 세계로 빠져들었다.
“당신의 이름을 한국어로 발음하면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놀람(Surprised)’, 다른 하나는 ‘논란(Controversy)’이다. 나는 당신의 영화 연출이 우리를 놀라게 했고, 영화 주제가 우리 사회를 논란 속으로 빠뜨렸다고 생각한다.”
나는 크리스마스를 손꼽아 기다리는 어린아이처럼 날밤을 새우고, 다음 날 아침 극장으로 달려가 오전 9시에 첫 상영 영화를 관람했다. 칠십 넘은 나이에 이제 와서 새삼 무슨 감동을 받겠느냐 싶었던 우려는 기우에 불과했다. 영화 ‘오펜하이머’는 색채와 흑백 필름을 넘나들며 천재 과학자의 행복과 불행, 과거와 현재의 사건들을 숨 가쁘게 보여주었다. 나는 한순간도 스크린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문득 젊은 시절, 음울한 현실의 탈출구로 삼았던 ‘제임스 딘’의 영화에 빠져들었던 기억이 떠올랐고, 나는 다시금 그때처럼 스크린이 펼쳐내는 거대한 역사 속으로 깊이 몰입해 들어갔다.
오펜하이머는 인류를 파멸시킬 원자폭탄을 만든 뒤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과 죄책감에 휩싸여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라고 자책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진의를, 혹은 그 심연에 자리한 거대한 모순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토로한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은 1945년 히틀러의 자살로 핵 개발의 주된 명분이 사라졌을 때, 프로젝트를 중단시킬 동력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오펜하이머는 전쟁 자체를 영원히 끝낸다는 명분으로 핵무기의 필요성을 역설했으며, 일본 원폭 투하 결정 시에는 그 파괴력을 극명하게 입증하기 위해 인명 피해를 극대화하는 방안을 설계했다.
나는 이 지점에서 발이 묶였다. 한 인간이 어떻게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는 끔찍한 윤리적 자각과 동시에, 그 파괴의 효율성을 가장 냉철하게 계산할 수 있단 말인가? 수십만 명의 즉각적인 희생을 발판 삼아 '전쟁 없는 세상'을 열겠다는 그의 논리는, 그가 느꼈다는 죄책감의 무게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이 모순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나는 '오펜하이머'에 대한 글쓰기를 이어갈 수 없었다.
나이 칠십을 넘겨 깨달은 반복되는 실수는, 난제에 부딪혔을 때 이를 극복하려는 결의를 다지고 면밀한 계획을 세우는 데만 매달렸다는 점이다. 하지만 나는 오랜 경험을 통해, 그렇게 머리로만 궁리해 낸 해법은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게 할 수는 있어도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하며, 때로는 그 과정에서 목적이나 수단을 합리화하는 오류에 빠지기 쉽다는 것을 깨달았다.
몇 달간 새벽 수행에 매진한 끝에, 내 마음은 점차 안정되었고 김원수 법사의 법문이 떠올랐다. 수십 년 수행한 스님이 날마다 소의 우직함만을 칭찬하다가 결국 소로 태어나야 했다는 이야기였다. 어떤 면에서 소는 사물의 진면목을 볼 줄 모르는 어리석은 고집의 상징이다. 이는 수단(우직함)을 목적(깨달음) 그 자체로 착각한 어리석음을 경계하는 말일 것이다. 깨달은 이의 관점에서 본다면, 아무리 위대한 과학자나 예술가라 할지라도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특히 자신의 지성(知性)이 완벽하다고 믿는 '치심(癡心)', 즉 '이만하면 되었다'라는 지적 자만심은 이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오펜하이머도 그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인격적 단면을 보여주는 글이 있다. 괴팅겐 대학 교수 막스 보른이 네덜란드 레이든 대학 교수 에란패스트에게 보낸 편지다. “나는 그에게서 만큼 타인으로부터 고통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는 확실히 재능은 있으나 정신 수양은 되어 있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겸손하지만, 속으로는 대단히 오만한 사람입니다.”
기분 나쁘게 착한 아이
1904년 뉴욕, 부유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오펜하이머는 어릴 적부터 물리학, 화학, 문학 등에서 천재성을 보였다. 하지만 내성적이고 운동 신경이 부족하여 친구들 사이에서는 외톨이였다. 14세 때 여름 캠프에서는 친구들의 오해로 냉동실에 갇혀 밤을 지새워야 했지만, 결백을 주장하거나 친구를 미워하지 않았다. 오펜하이머는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기분 나쁘게 착한 아이’였다고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젊은 천재의 분노
하버드에서 화학을 전공한 후 케임브리지로 유학했지만, 실험물리학에 어려움을 겪고 이론 물리학으로 방향을 바꿨다. 블래킷 교수와의 갈등으로 우울증과 향수병을 겪으며, 심지어 사과에 독을 넣는 사고까지 벌였다. 다행히 발각되어 큰 문제는 피했다. 이 경험으로 그는 독일 괴팅겐 대학에서 양자역학 연구에 몰두하며 교육자로 성장했다.
맨해튼 프로젝트와 연구
1943년부터 1945년까지 로스앨러모스 연구소 소장으로 원자폭탄 설계·제작을 이끌었다. 그가 세계 최고의 물리학자들을 설득할 수 있었던 강력한 동기는 '전쟁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그의 이상과 신념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는 뛰어난 물리학자이면서 동시에 철학, 언어학, 시(詩)에 조예가 깊은, 다방면에 박식한 인물이었다. 이처럼 과학적 통찰력과 인문학적 소양을 겸비했기에, 그는 당대 최고 과학자들의 난해한 이론을 꿰뚫어 보는 동시에 그들의 강한 고집과 자의식을 이해하고 조율할 수 있었다. 이는 단순한 기술 총괄 책임자를 넘어선, 복합적이고 지적인 지도력이었다. 이후 그는 정치적 활동에도 관여했으나, '전쟁 없는 세상'을 향한 그의 이상주의적 신념과 좌익계 인사들과의 교류는 훗날 그가 '매카시즘'의 탄압받는 빌미가 되었다.
건축가 유현준은 놀런 감독에게 깊은 감사의 뜻을 표했다. 2009년, 그는 수차례 공모전 실패와 진로 고민으로 방황하던 중 영화 ‘인셉션’을 보고 “적어도 예술가라면 이 정도 세계관을 보여주는 작품 하나는 남겨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오기를 품었다고 한다. 그 오기는 각고의 노력이 되어, 마침내 그를 대한민국의 저명한 건축가로 만들었다.
70대의 아날로그 신봉자인 나에게도 놀런 감독은 창조적 삶의 가치를 일깨워준 문화적 선각자다. 그의 예술적 지향점은 나의 고전주의 및 휴머니즘 사상과 깊이 통하고 있다. 나는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세 가지 창작 원리가 그의 솔직하고 정직한 삶의 태도와 맞닿아 있다고 느꼈다.
첫째, 실체적 진실에 대한 집착으로서의 아날로그 철학이다. 영화 ‘오펜하이머’에는 단 한 컷의 CG도 없었다. 트리니티 실험과학 구름 모두 실제 모형을 제작했다. 디지털이 아닌 아날로그야말로 현상의 실체적 진실에 가장 가깝다는 그의 철학은, 눈앞의 본질을 중시하는 인문주의적 관점과 맥을 같이한다.
둘째, 민주적 자세로서 타인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창작이다. 놀런은 인내심을 가지고 수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파편화된 정보를 모아 비로소 창작의 줄거리를 완성한다. 타인의 고집과 난해한 이론까지 이해하고 조율했던 오펜하이머의 지도력처럼, 예술의 출발점은 바로 타인의 복잡한 서사를 경청하는 민주적 태도에서 비롯된다.
셋째, 인간의 모순을 감추지 않는 솔직함이다. 영화는 오펜하이머를 단순히 순수한 애국자나 현실을 간과한 이상주의자로만 그리지 않는다. 천재로서의 자만, 정치적 속물근성, 그리고 비겁함까지 한 인물의 거대한 모순을 숨김없이 보여준다. 이것이 놀런이 추구하는 진실의 깊이다.
영남대 김영수 교수는 “과학자는 순수하고 정치가는 무지하다. 중재자가 필요하다”라고 말한다. 놀런 감독은 바로 그 '중재자'의 역할을 자처하며, 이 영화를 통해 핵무기와 관련한 우리 시대의 경고와 함께 그 복잡한 딜레마를 정면으로 응시할 필요성을 상기시키고 있다.
영화 ‘오펜하이머’를 통해 나는 놀람과 논란, 인간과 천재성, 예술과 삶의 교차점을 경험했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은 나 같은 아날로그 세대에게, 삶과 창작의 본질, 그리고 솔직함과 타인 경청의 가치를 일깨워 주었다. 우리는 여전히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고민하지만, 놀란의 작품은 우리에게 희망과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나는 과학과 정치, 예술과 삶 사이에서 균형을 찾고, 실체적 진실에 다가서는 그의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2024년 3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