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가출
열흘 넘도록 목욕 안 하는 인간과는 살기 싫다고 현관문을 부서 서라 닫고 집을 나왔다. 막상 나오니 갈 곳이 없어 화가 더 치솟았다. 수많은 여행지가 기다리고 있지만 가지 않을 뿐이라고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 돌발 가출의 허무! 경험하지 않으면 모른다. 어디로 갈까? 목적지가 없음을 깨닫자 걸음 속도가 줄었다. 그냥 앞만 보며 걸었다. 말 안 듣는 남편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야속하고 미웠다.
삼청사 공원 주변 건물 앞에 있는 작품.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두꺼운 돌을 구부려 나선 형으로 만들었을까?
삼청사 공원 오솔길로 접어들며 국제 전화비가 아까워서 카톡으로 딸한테 시시콜콜 일러바쳤다.
즉답이 왔다.
“아빠 요양원에 버리고 당장 뱅기 타고 우리 집으로 날아와!”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겁주기 위함이지 그건 아니었다. 소용돌이치던 마음이 그 한마디에 거짓말처럼 소르르 풀렸다. 역시 최고의 상담사였다. 천천히 걸어 한밭 수목원에 도착했다. 오후 5시. 집에 있었으면 저녁을 짓기 시작할 것이다. 저녁 짓기를 포기하니 시간이 낮잠이라도 자는 듯 여유롭다.
가출을 감행한 나의 행동은 무어라 규정지을 수 있을까? 일탈일 수도 반란일 수도 반격일 수도 세 가지 전부일 수도 있을 것이다. 때론 이런 사고를 칠 필요도 있다. 내 정신건강과 서로를 객관적인 시선으로 볼 기회를 얻게 되니까. 숙제를 하지 않은 것 같은 묵직한 불편함은 있지만 느긋하게 물고기를 구경하고 나비와 문익점이 붓 뚜껑에 세 알 숨겨왔다는 목화 열매를 찍었다. 일찍 여문 목화 열매는 하얀 솜 송이가 되어 있었다.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지만 맨 밑에 달려있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일행이라면 몰라도 낯선 이한테 부탁하는 성격이 아니라 간단하게 포기했다.
허브 농원을 지나 전망대에 올라 분주하게 오가는 차들과 초고층 아파트와 하늘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혼자 보는 게 아까워 가슴이 저렸다. 인간 관계에서 끝까지 남는 것은 부부라고 했다. 하지만 인생 끝자락에는 혼자 남을 수밖에 없는 외로운 존재다. 남편으로부터 정서적으로 독립하는 연습을 많이 해야겠다.
전망대 오르막에서 만난 범 부채.
정자 앞에 드문드문 피어 있는 노란 상사화 .
장미원에는 향기가 별로 없는 장미꽃 몇 송이가 피어 있었다. 젊은 부부가 아이들을 데리고 산책하는 모습이 장미꽃보다 예뻐 보였다. 역시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웠다.
한밭수목원 장미원의 늦장미.
8월 31일 수요일 7시. 저녁 먹고 설거지할 시간에 공원 가득한 청량한 공기를 실컷 마셨다.
풀이 이렇게 예뻐도 되나?
풀한테 홀딱 반했다.
하나하나 예뻐서 감탄 또 감탄했다.
날이 흐려서 노을은 찍지 못하고 딸이 보내준 네덜란드 일몰 풍경을 실었다.
소나무 숲길을 지나 담장 앞에 다다랐다. 담장은 언제나 아련한 그리움과 정겨움을 안겨준다.
우리 고유의 단아하고 정갈하면서 기품 있는 모습이다.
넓은 트랙을 따라 자전거를 타는 청년들과 어린이와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과 소풍 나온 가족들 곁을 지나 걷다 보니 어느새 예술의 전당 앞 분수대다.
7시 30분. 공연에 늦었다며 사람들이 마구 뛰었다. 뭔지 모르지만 나도 공연을 볼까? 하지만 공연 관람이 끝나면 마트에서 주중 폐점 할인 행사하는 생선과 고기를 사지 못한다. 갑자기 배가 고팠다. 남편도 배가 고플 것이다. 한 끼 굶는다고 죽지 않아. 모른 척하기로 하고 중식당 문을 열었다. 혼밥도 나름 괜찮았다.
저녁을 먹고 최대한 집에 늦게 들어가기 위해 천천히 걸었다. 아주 늦게 들어가 남편 속을 있는 대로 썩여주고 싶었다. 마트에 도착해서는 가지 않아도 될 화장실로 들어가 손에 비누칠을 잔뜩 해 오래오래 씻었다. 시원찮게 작동해서 다른 날은 사용하지 않던 건조기에 손을 대고 뽀송뽀송해질 때까지 말렸다. 느긋하게 여러 층을 둘러보며 생각에 잠겼다. 편마비에 시각 장애 2급으로 적수가 되지 못하는 남편이었다. 그런 남편한테 지나치게 모질게 군 것은 아닐까? 우회적이고 부드러운 방법도 많았을 텐데. 그랬다. 다구나 식사를 굶기는 것은 엄연한 학대행위이다. 학대? 학대는 무슨 얼어 죽을! 비열함과 사악함을 고루 지닌 지극히 평범한 인간인 주제에 착한 척 하기는.
가출 이후 남편의 목욕 기피증은 완벽하게 치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