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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마중 김범순 Aug 15. 2023

딱 기다려 네덜란드

32. 까꿍


딸이 아프다. 일주일에 이틀은 수업해야지, 친구에 이어 내가 와서 여기저기 구경시켜야지, 새벽 5시까지 고2 엄마 노릇해야지, 몸살 날만도 하다. 딸이 무기력하게 누워 있으니 집안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딸한테 같이 점심 먹자고 했더니 생각이 없단다.

자꾸 권하기도 그래서 그냥 두기로 했다.

뱃속에 있을 때 잘 먹지 못해 저리 약한 것 같아 애틋하기 짝이 없다.

빚 좀 있으면 어떤가.

그까짓 빚 좀 천천히 갚으면 어떤가.

태아만 생각하고 잘 먹었어야 했다.


국을 데우려고 인덕션을 켰다.

인덕션조차 깔보고 묵묵부답이다.

인덕션한테 눈을 흘기며 가스레인지를 켰다.

인덕션한테 눈을 흘기며 가스레인지를 켰다.

밥 먹는데 만감이 교차했다.

물 한번 마시기 어려운 넘사벽 다기능 수도꼭지.

수돗물, 정수된 차가운 물, 스파클링 워터, 펄펄 끓는 뜨거운 물.

요철 있는 부분을 누르며 돌려 네 가지 중 원하는 물을 선택해야 한다.

기계치인 나는 이십 일이 넘었어도 매번 실수한다.

그리고 또 하나

집안 곳곳에 공기 청정기는 있는데 눈을 씻고 봐도 쓰레기통이 없어 난감했다.

야, 쓰레기통. 너 너무 근사한 거 아니냐?


산책을 하려는데 날씨가 우리나라 4월 초처럼 쌀쌀했다.

 속에 두꺼운 티셔츠를 입어야겠다.

서랍을 열고 셔츠를 고르는데 어머나!

잃어버린 줄 알았던 카드가 옷 사이에서 까꿍하고 얼굴을 내민다.

이게 왜 이 자리에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다.

이 정도면 치매 초기 단계 아닌가? 은근히 두렵다.


큰아들한테 톡으로 배워 분실신고를 해제했다.

어휴, 딸하고 사위한테 말하지 않길 정말 잘했다.


얼른 카드를 써보기로 했다.

무엇을 살까? 교회를 개조한 양조 펍으로 갔다.

펍 입구에 있는 카고 자전거.

카고 자전거는 아이들을 편하고 안전하게 태울 수 있다.

어린이가 있는 네덜란드 가정에는 전부 카고 자전거가 있다.

막상 문 앞에 다다르니 망설여졌다. 

영어를 못해 어차피 못 살 것 망신당하지 말고 나중에 딸이나 사위하고 올까? 

아니지, 못 사면 어때 이것도 경험이야!

딸이 마신 맥주 캔이 너무 예뻤다.

가져오진 않았지만 이걸 사고 싶다.


카운터에 있던 앳된 청년이 무엇을 주문하겠느냐고 했다.

  "알루미늄 캔 비어, 테이크 아웃, 마이 홈 드링킹."

청년은 난감한 얼굴로 못 알아듣겠다고 했다.

나는 손으로 캔 크기를 그리며 똑같은 말을 천천히 여러 번 반복했다.

청년 커다란 유리컵을 들어 보이며 가득 담아 주겠다고 했다.

이쯤 되면 포기해야겠다.

  "아임 쏘리, 땡큐 쏘마치. 바이!"

그때 갑자기 알아들었다는 듯 청년이 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켰다.

  "와이?"

청년은 의아해하는 나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하며 계단을 올라갔다.

층고가 높아 3층 창고까지 가는데 숨이 턱턱 막혔다.

청년이 자랑스럽게 캔 맥주를 꺼내더니 몇 개 원하느냐고 물었다

원하는 그림은  아니지만 사기로 했다.

  "식스!"

두 손 가득했다.

얼른 내려놓고 손짓으로 봉지에 담아주지 않느냐니까 그렇다고 했다.

  "쓰리!"

청년이 활짝 웃으며 세 개는 편하게 가져갈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겉옷 주머니 맥주를 나눠 넣고 펍을 나섰다.

카드를 써봤다는 성취감에 기분이 들떠 호숫가로 갔다.

서민은 꿈도 못 꾸는 부자들만 사는 집.

딱 보기에도 고급지다.

지붕 재질이 무엇이기에 저토록 기품 있을까?

놀랍게도 억새란다.

네덜란드 전통 기법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초가집.

억새가 쉽게 썩어서 자주 갈아줘야 되기 때문에 돈이 아주 많이 든다고.

뭔가 근사한 이름이 있을 것 같아 검색해 봤지만 초가집이라고 밖에 나오지 않았다.

네덜란드는 쑥도 귀하고 아카시아 나무가 없다.

호숫가를 돌다 보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다.

집 근처에서 강아지를 산책시키고 돌아오는 작은 손녀를 만났다.

여린 척 애교 떠는 귀여운 아로.

집에서는 저런 모습이지만 밖에서는 다르다.

며칠 전 작은 손녀와 산책 나갔을 때였다.

커다란 개가 짖으며 쫓아오니까 맹렬한 기세로 달려들었다.


  "저녁 먹어요!"

주방에서 딸이 부르는 소리에 두 손녀와 함께 환.

신이 난 사위도 2층에서 우당탕탕 뛰어내려왔다.

딸표 잔치 국수는 정말 맛있었다.

집안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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