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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죽을 권리 02화

죽을 권리

3. 1985년 5월 7일

by 글마중 김범순
고은별 사진 2.jpg

사진 : 고은별


밤 12시. K의 호흡은 점점 더 거칠어지고 숨쉬기 힘들어했다. 지켜보는 이 모두 숨이 턱에 찰 지경이었다.


의사가 산소호흡기를 큰 것으로 바꾸고 입에 막대 스틱 두 개를 어긋나게 물렸다.


입술과 잇몸 틀어짐을 방지하고 이를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말린 고추를 갈아 부은 것처럼 시뻘건 K 얼굴은 풍선처럼 부풀었다.


흡! 흡! 흡!

후-우우-욱 쉭쉭!

들숨 한 번

날숨 한 번


숨쉬기가 이토록 힘든 줄 정말 몰랐다.


너는 K에게 속으로 말했다.

여보 나 따라 해 봐.

들숨 깊이 들이마시자

더! 더! 더!

아주아주 잘했어.

자 이번에는 날숨 후---!


너는 K와 호흡을 같이 하며 만남에서 아이 셋 낳기까지의 나날을 돌아보았다. 애환 20% 환희 80%였던 10년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너는 믿었다.

K는 절대 죽지 않는다고.

아니 K는 너를 두고 절대 죽지 못한다고!


새벽 2시. 병원 안팎을 가득 채운 문병객들은 K가 언제 절명할지 몰라 발길을 떼지 못하고 초조하게 서성거렸다. 그때였다. K의 형이 와이셔츠를 벗어부치고 왔다 갔다 하며 큰소리로 반복했다.


“큰일이다 큰일. 조카자식 셋까지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려면 나는 이제 죽었다!”


내 자식 걱정을 왜 시숙인 K의 형이 하는데?

너는 어이없고 기분 나빴다.


새벽 4시. 두 시누이 부부를 비롯해 구름처럼 모여 있던 문병객들이 하나 둘 차마 안 떨어지는 발길을 돌렸다. K의 형과 K가 아끼는 후배 선생 넷이 남았다.


새벽 5시. 커다란 응급실 유리창 너머로 희붐하게 여명이 밝아왔다.


야호!

너는 환호했다.


K의 호흡은 더 거칠어지고 얼굴은 더 검붉고 커졌지만 확실하게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목숨만 건지면 된다.

식물인간이면 어떤가?

살아있으면 되는 것이었다.


아침 6시. 응급실 문이 열리고 서슬 퍼런 노파가 들어섰다.


너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저승사자보다 더 무서웠다.

노파는 시어머니였다.


“니, 니가 기어이 내 아들을 잡아먹는구나!”


시어머니가 울부짖으며 달려들어 네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그 바람에 네가 앉아 있던 의자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퉁겨나갔다.


K의 형이 억지로 시어머니를 떼어 밖으로 끌고 나갔다. 선생 넷은 말없이 의자를 집어다 너를 앉히고 물을 떠다 주었다.


놀라고 무섭긴 했지만 너는 괜찮았다.

K가 살아 있으니까!


K의 형이 질질 끌고 나갔던 시어머니가 한 시간 만에 혼자 돌아왔다. 무슨 말로 어떻게 회유했는지 180도 달라져 있었다. 집안의 큼직한 일은 남자가 해결한다더니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오전 10시 응급실에서 중환자실로 옮겼다.



4. K의 어머니



네덜란드 화가 재클린 작 고은별 사진.jpg

사진 : 고은별

작가명 : jacquelinebozon

작가 국적 : 네덜란드


서른넷에 혼자 몸이 된 시어머니는 자식 넷 중에서 K만 예뻐했다.


여름 방학 때 시골집에 가면 시어머니는 잠을 안 자고 K 곁만 맴돌았다. 전설의 고향에나 나올 것 같지만 21세기에도 여전히 건재하는 전형적인 조선 시대 홀시어머니였던 것이다.


다른 형제들이 큰맘 먹고 좋은 고기를 선물하면 그대로 너의 집으로 들고 왔다.


“우리 K는 허우대만 크고 몸이 굉장히 약하니라. 그렁께 명심하고 니가 잘 거두어야 한다. 요새 갈치가 그렇게 싸다매? 얼릉 시장 가서 싱싱한 놈으로 사다가 맛나게 구워서 이 고기랑 같이 줘라. 너는 먹지 말고 K만 멕여라 알았쟈? 요새 먹는 게 션찮은지 얼굴이 반쪽이 됐더라.”


너는 아니꼬워서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어른 대접하느라 알았다고 했다.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너

너의 부족한 점을 다 갖춘 K


K가 기타를 치며 청혼했다.


물그릇이 얼어붙는 허름한 K의 자취방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아름다운 궁전 같았다.


너는 K와 함께라면 지옥 끝까지라도 함께 할 것이었다.


K의 형수가 K 자취방에 와서 너를 보고 갔다. 그 후 K의 어머니는 너를 만나지 않겠다고 했다. 가난하고 아버지가 없어서 K가 비빌 언덕이 없어서 싫고, 직업도 없고, 작고 못생겨서 싫은 데다 창피하게 혼전 임신까지 해서 더더욱 싫다는 것이었다.


K가 계속 너를 설득했다.

우리 어머니와 형은 이상한 구석이 많아

절대 순탄하게 결혼시킬 사람들이 아니라고

우리 혼인신고 하고 그냥 살자.


너는 그럴 수 없다고 했다.


공주처럼 예쁜 웨딩드레스를 입고 화려한 결혼식 올리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빚을 얻어 대학물을 먹여준 어머니한테 식도 못 올리고 사는 진짜 못난 딸이 될 수 없어서였다.


서른여덟에 과부가 되어 전부 친척인 집성촌 친정으로 돌아온 너의 어머니는 마을을 쥐고 흔드는 여장부가 되었다. 청년들을 모아 새마을 운동에 앞장서 국회의원 표창을 줄줄이 받고 면 전체를 통솔하는 총부녀회장을 역임했다. 이웃이나 형제간에 싸움이 붙으면 너의 어머니한테 달려왔다. 솔로몬 같은 판관이 되어 명쾌하게 해결하기 때문이었다. 양반 가문의 후손이라는 자긍심까지 강했던 너의 어머니는 연애결혼을 천박하게 여겼으며 자신의 딸이 예식도 못 올리고 사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너의 배가 나날이 불러갔다.

어머니 한숨 어린 멸시가 그만큼 늘었다.


K의 어머니가 너의 어머니한테 만나자고 했다.


못난 골칫덩어리를 드디어 시집보내는구나!


너의 어머니는 기쁜 마음으로 한달음에 K의 시골집 대문을 들어섰다.


기다리고 있던 K의 어머니는 커다란 싸리비로 먼지와 함께 너의 어머니를 대문 밖으로 쓸어내며 말했다.

“나는 죽어도 못난 당신 딸 며느리로 들일 수 읎어요. 그렁께 제발 얼렁 애 긁어내고 다른 남자한테 시집보내란 말이에요!”


너의 어머니는 K의 어머니한테 받은 수모만큼 너를 능멸했다.


그래도 너는 괜찮았다.

정 안되면

K 말대로 혼인신고 하고 그냥 살면 되니까.


오래잖은 날 K의 형이 너를 불러냈다.

“우린 시골 갑부야!”

너는 그런 K의 형이 참 이상했다.

“그 말은 아가씨가 넘겨다볼 수 없는 집이라는 말이지. 아가씨. 우리 K 진심으로 사랑하나?”

너는 그렇다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K의 형은 제법 부른 너의 배를 힐끗거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 K 좋은 혼처로 장가보내게 놔줘. K와 헤어져 달라고. 대학 때부터 사귄 여선생인데 우리 어머니나 나는 K 배우자로 아주 좋아. 그러니 제발 좋은 일하는 셈 치고 소리 없이 애 긁어내고 다른 남자 만나서 시집가. 나 분명히 말했으니까 꼭 그렇게 하리라 믿어!”


못 할 말을 퍼부어도 너는 괜찮았다.

여선생은 지어낸 인물이었고

K가 온전히 네 편이니까.


9월 어느 날 K의 누나가 찾아왔다.

키가 크고 세련미가 넘쳤다.


이번에는 어떤 공격을 받을까? 어떤 일이 있어도 상처받지 말자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K의 누나는 너를 보더니 어이없다는 듯 혼잣말을 했다.


“나 참, 사람만 괜찮구먼!”


그날로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다.

일사천리로 결혼 준비가 끝났다.


예식을 앞둔 날 K의 누나가 다정하게 말했다.

“어머니와 정도 들고 살림도 배울 겸 시골에서 잠시 살면 어때?”

너는 좋다고 흔쾌히 대답했다.


그 말을 전해 들은 K가 펄쩍 뛰었다.

“안돼. 절대 안 돼. 우리 어머니 이상한 양반이야. 너 시집살이시킨단 말이야!”


너는 결혼 주선 일등 공신인 K 누나와 한 약속은 꼭 지키고 싶었다.


만삭의 신부가 되었지만 조금도 부끄럽지 않았다. 결혼식이 끝나고 신혼여행을 갔다 온 뒤 시골 잔치가 시작되었다. K의 어머니는 쌀쌀하게 입을 꼭 다물고 너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사랑하는 K와 결혼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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