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웨일'
272킬로그램에 육박하는 찰리는 대학에서 원격으로 글쓰기 강의를 하고 있다. 결혼을 해서 딸도 있었던 찰리는 남자 제자(엘렌)와 사랑에 빠져 아내와 8살인 딸을 두고 집을 나오게 된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사랑했던 엘렌은 자살을 하고 그의 죽음으로 인해 상실한 찰리는 탐식하며 현재와 같은 몸을 갖게 된다. 혼자 걸을 수도 없는 초고도 비만인 찰리는 원격 강의에서도 카메라를 켜지 않고 강의를 한다. 현재 그의 곁에 있어서 찰리를 돌봐주는 유일한 인물인 간호사 리즈는 찰리의 연인이었던 엘렌의 동생이다. 오빠의 죽음을 목격하고 죽음을 감싸 안았던 리즈는 찰리의 심정을 공감했을까. 유일하게 찰리 옆에서 찰리를 간호해 주고 있다. 영화 초반 찰리가 가슴을 부여 안고 거의 쓰러지기 직전이었던 찰리의 혈압과 숨소리를 듣고 리즈는 찰리가 지금 울혈성심부전증으로 병원에 가지 않으면 오래 살 수 없음을 찰리에게 얘기한다. 그러나 병원에 가기를 거부한 찰리는 16살 된 딸과 연락 후 그녀가 찾아오도록 한다. 남은 기간 인생에 있어서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던 찰리는 딸의 에세이 쓰는 것을 도와주겠다고 하고, 돈을 주겠다며 딸이 정말 멋진 사람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얘기한다. 영화 초반 찰리가 위급한 상황에서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글을 읽어달라고 하는데 그 글은 딸이 어린 시절 모비딕을 읽고 쓴 글이며 그 글은 그를 지금까지 지탱해 준 하나의 처방전과 같은 것이었다. 그럼에도 딸은 찰리를 살갑게 대하지 않는다. 자신을 버린 아버지에 대해 그는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었다. 더구나 그는 아빠의 샌드위치에 수면 약을 타며 더욱 죽음을 재촉하기도 하고 자기에게 최고라고 말해주는 아빠에게 좋은 소리 역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찰리는 딸에게 최고임을 계속 얘기하며 마지막 순간 아빠를 떠나려는 딸에게 딸이 쓴 글을 읽어달라고 부탁했고, 딸이 울며 글을 읽을 때 찰리는 마치 물속에서 고래가 된 것처럼 일어나 하늘로 올라가며 삶을 마감한다.
1. 인간은 약하고 사람이 누군가를 구원할 수 있는가?
단 한 사람이라도 누군가를 구할 수 있다면,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면 그 삶은 어둠을 뚫는 빛 된 삶인가? 여기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은 어쩌면 그 한 사람을 괴롭히는 것 같지만 괴롭힌다기보다는 그 한 사람을 위한 사랑을 쏟아붓는다. 때로는 그 방법이 잔인할 수도 있고 괴롭힐 수도 있고, 전혀 다른 방법으로 흘러 들어가지만 결국 그 한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준다. 그 한 사람을 위한 절박함의 모습이 묻어 있는 영화다. 단 한 사람. 어쩌면 이 단 한 사람이 꼭 신이 아니라고 이 영화는 말하기도 하는 것 같다. 새 생명의 자녀로 헌신하여 살다가 부모에게 버림받고 사랑에 빠지지만 결국은 비참한 죽음으로 마감한 찰리의 친구이자 간호사의 오빠를 보자면 말이다. 하지만 그를 그렇게 사랑했던 찰리조차도 그의 죽음을 되돌이킬 수는 없다. 사실 인간은 누군가를 구원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의 구원은 오로지 신의 영역이지 우리의 영역은 아니다. 다만 여기서의 구원은 전적인 죄로부터의 구원이라기보다는 삶을 지탱할 수 있게 하는 한 사람. 그 한 사람이 누군가를 살게 할 수 있다는 의미로 얘기하고 싶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쓸모없는 존재는 없거니와 그 쓸모 있음의 의미는 타인을 아무런 사심 없이 돕는 것이다. 그러기에 영화 속 회원들의 돈을 훔치고 달아나 선교사 행세를 하는 그도 그 안의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해 진정 누군가를 도와주고 싶다고 한다. 아니 누군가를 진정으로 도울 때 자신 역시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인간은 죄 많은 모습일지라도 누군가를 위한 선한 행위를 하고 싶어 하는 존재가 아닐까. 인간은 약하지만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존재로 남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살아가는 존재의 이유라고 생각한다.
2. 무엇이 사랑인가?
사랑을 위해 가족을 버리고 진정한 사랑을 찾았다면 그것이 사랑인가? 8살의 자녀를 버리고 아내와 가끔 연락하며 아이를 위해 걱정하는 것은 그러면 사랑이 아닌가? 어쩌면 선한 성품을 지니고 있지만 그 험한 말과 못된 행동으로 다른 사람을 난처하게 하는 딸의 모습은 단순한 사춘기 아이의 모습인가? 사랑의 결핍된 그 모습이지만 진정한 그 내면의 소리를 들었을 때 그를 위해 적극적인 도움의 손길을 폈던 모습은 사랑은 아닐지라도 인간에 대한 연민이다. 끝까지 그의 곁에서 간호하던 그녀 역시도 사랑의 한 모습이겠지. 더 이상의 남편을 도울 수 없지만 남편의 숨소리를 들으며 화를 내고 나간 아내도 역시 사랑의 한 모습. 아니 사랑이라는 큰 것까지는 아니라도 사랑의 한 모습이겠다. 주인공이 선택한 사랑이 결국 사람을 살리는 사랑이 아니었음을 깨달았을까. 사랑은 온유하고 오래 참는 것이며 이기적인 사랑은 사랑이 아닌 것이다. 나의 사랑을 위해 가족을 버린 사랑은 참사랑일까? 나의 본능, 나의 내면에 충실한 것 그것이 사랑인가? 주인공이 그 한 남자를 택한 것도 사랑이 아니라 말할 수 없지만 결국 그가 선택한 삶과 그 이후에 벌어지는 삶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으리라. 찰리를 옆에서 끊임없이 도운 간호사, 오빠에 대한 처절한 사랑의 몸짓을 알기에 그렇게 했던 것일까? 분명한 것은 인간은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는 존재. 그 사랑만이 인간의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리라. 그 사랑만이 인간의 삶을 유지해 주는 것이라면 그 사랑이 끊어질 때 인간의 삶은 끝나는 것이다.
3. 왜 비만인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상처 난 모습 중의 하나. 정말 채울 수 없는 사랑의 결핍된 모습, 소외된 모습 더 이상 음식으로도 채울 수 없는 그의 허함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지만 왜 인간은 그토록 어리석은가? 자신의 몸을 그렇게 망가뜨려야 하는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가? 허기진 배를 채우는 피자, 샌드위치와 초콜릿 더 이상 가눌 수 없는 몸과 숨소리, 그런 모습을 보며 내가 역겹냐라고 주인공은 물어본다. 정말 인간의 역겨운 모습은 무엇인가? 손으로 아무거나 집어먹고 아무 때나 시도 없이 먹는 것이 역겨운 것인가? 인간의 역겨움은 진정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얼마나 사람과의 소통이 없다면 그렇게까지 자신의 몸을 학대하는 것인가? 자신을 학대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얼마나 역겹고 잔인한 것인가? 길버트 그레이프 이후 가장 비대한 몸을 본 것 같다. 영화 보는 내내 숨 막힐 것 같았는데, 그 모든 모습을 하고 연기한 주인공은 마땅히 오스카상을 받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그 모습을 한 걸 떠나서 그 눈빛과 슬픔과 디테일한 움직임까지.
4. 사람들은 외면만을 본다.
그의 뚱뚱함에 놀란 사람들. 피자 배달부는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한 주인공을 걱정하지만 정작 그의 모습을 보고는 놀라고 달아난다. 원격 강의를 듣던 사람들도 그의 모습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한다. 우리는 그렇게 우리의 외면을 감싸고 그 외면을 위해 살아가지만 정작 내면을 위해 우리는 얼마나 고군분투하고 있는가? 나의 내면을 살찌우지 않는 외면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추한 것이다. 외면이 아닌 내면의 아름다움이 묻어나야 하지 않을까.
5. 삶이란? 의미 있는 삶이란?
삶은 그냥 주어졌기에 그냥 살면 되는 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다양하기에 한마디로 정의될 수 없는 것이며 어떤 인생이 가장 좋은 삶인가라고 말하는 것도 너무나 다양한 답이 될 수 있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다. 분명한 것은 삶이란 아름답고 소중한 것이며 삶이란 사랑하며 사는 것이다. 나를 향한 진정한 사랑의 본질을 이해하고 타인을 향한 사랑의 마음을 가질 때 삶이란 의미 있고 빛이 나는 것이다. 그러기에 나의 삶을 지탱하고 격려하며 응원해 줄 그 사랑의 존재들이 주변에 있음을 인식하며 살아가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