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읽는 기쁨(19)

백석 '여우난골족(族)'

by 김승희

여우난골족(族) / 백석


명절날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로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신리(新里) 고무 고무의 딸 이녀(李女) 작은이녀(李女)

열여섯에 사십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토산(土山) 고무 고무의 딸 승녀(承女) 아들 승承동이

육십리(六十里)라고 해서 파랗게 뵈이는 산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옷이 정하든 말끝에 설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골 고무 고무의 딸 홍녀(洪女) 아들 홍洪동이 작은홍洪동이

배나무접을 잘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 섬에 반디젓 담그려 가기를 좋아하는 삼춘 삼춘엄매 사춘누이 사춘동생들


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 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볶은 잔대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 것들이다


저녁술을 놓은 아이들은 외양간 섶 밭마당에 달린 배나무 동산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굴막질을 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 타고 시집가는 놀음 말타고 장가가는 놀음을 하고 이렇게 밤이 어둡도록 북적하니 논다

밤이 깊어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하고 이렇게 화디의 사기방등에 심지를 몇 번이나 돋우고 홍게닭이 몇 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릇목싸움 자리 싸움을 하며 히드득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츰 시누이 동세들이 육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 틈으로 장지문 틈으로 무이징게 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출처:정본 백석 시집, 엮은이 고형진)


민족 고유의 명절 추석이다. 오랜만에 가족들과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날들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흐뭇하다. 물론 이런저런 이유들로 그렇게 나누지 못하는 분들도 있어 안타까운 마음이고 오히려 명절 때 더 쓸쓸하게 보내는 이들도 있어 마음이 아려오기도 한다. 그래도 조금은 쉴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기도 하고 명절이 있어서 친척들과 왕래도 하고 서로 소식을 전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


감사하고 기쁜 명절이 오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시가 있다. 바로 백석의 여우난골족이다.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은 이 시는 (여우가 나왔다는 골짜기) 여우난 골에 살고 있는 친족이라는 말이다. 특히 명절날 엄마 아빠 따라 그리고 우리 집 개는 나를 따라 친할머니, 친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 가는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지면서 마치 나도 큰집을 가는 것처럼 발걸음이 가볍다. 그곳에 가면 신리 고무(모), 토산 고무, 큰골 고무 그리고 삼춘(촌), 사춘누이, 사춘동생들 정말 많은 이들이 모여 있다. 어쩜 이리도 한 사람, 한 사람 정감 있고 개성 있게 묘사했는지 그들을 떠올리며 우리 가족들도 한 사람 한 사람 그려본다. 그리고 음식을 나누고 놀이도 하고 얼마나 즐거운지 시를 읽다 보면 아이들 노는 소리, 웃고 떠드는 소리, 맛있는 음식 냄새까지 모든 오감이 살아 숨 쉬는 것 같다. 무엇보다도 ‘아 이것이 바로 명절의 모습이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고향 명절날 분위기가 너무너무 잘 그려져 있다. 물론 방언들이며 모르는 어휘들, 무슨 놀이지 싶을 정도로 하나하나의 해석이 안 되는 것도 있지만 시에서 느껴지는 가족 공동체의 모습이 너무나 정겹고 평화롭게 느껴진다. 그 평화롭고 정겨운 느낌이 바로 우리가 바라고 바라는 진정한 명절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시에서처럼 가족들 모두 모여 명절의 즐거움을 누린다면 얼마나 기쁨이 넘칠까? 그런 아름답고 평화로운 공동체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 시를 읽어야 할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세상 살기 어렵고, 각박하고, 때로는 거친 세상에 혼자 서 있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이 광야 같은 세상에 어찌 살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도 우리에게 함께 할 가족이 있고, 음식을 나눌 이웃들이 있다면 조금은 손 내밀어 따스한 명절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 모두 모여 송편을 나누지 못하더라도 마음속 풍요로움을 떠올리며 사랑의 마음을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 모두모두 행복한 추석 연휴 보내시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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