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 '그 사람을 가졌는가' / 정호승 '봄길'
만 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마음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 하며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출처 : 『젊은 날에 만나야 할 시인 함석헌』 (송현 지음)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나는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이 있다
출처: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정호승 시집
삶을 살아가다 보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벽에 부딪힐 때가 많다. 그 벽이란 돈일 수도 있고, 사람일 수도 있고, 능력일 수도 있다. 특히나 아무리 열심히 수고하고 애쓰더라도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사건 사고들로 인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순간을 맞이하면 그 한계를 절감할 수밖에 없다. 그 벽에 부딪혀 힘들 때 도움을 청할 누군가가 있다면 마음으로 위로를 줄 한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축복이고 선물인가. 그 한 사람의 소중함을 절감할 때 떠올랐던 한 사람이 함석헌의 ‘그 사람을 가졌는가’에 나온 그 사람, 정호승의 ‘봄길’에 나오는 길이 되는 사람이다.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외로울 때도 믿어지는 사람, 구명대를 사양할 수 있는 사람, 세상 빛을 위해 세상에 살려 두고 싶은 사람, 세상을 떠 날 때 그 사람을 생각하며 눈을 감을 수 있는 사람, 모두가 찬성할 때 아니라고 말하며 유혹을 물리치게 해주는 사람, 나열한 그 사람 중에 하나라도 해당이 되는 그 사람을 가지고 있다면 그 어떤 보물을 가지고 있는 것보다 행복한 인생이 아닐까 싶다.
특히나 강물이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이 흩어지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 스스로 봄길이 되어 걸어가는 사람, 무엇보다 사랑이 끝나는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으로 인해 걸어가는 모든 길이 봄길이 되고, 사랑의 길이 될 것이다. 봄길이 되어 주는 사람이 나의 가족, 나의 친구, 나의 동료가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있으면서도 때로는 우리의 연약함으로, 힘든 상황 때문에 온전하게 바라보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 외롭고 더 힘들고 더 절망적일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절망의 시대요, 모든 것이 멈추어 버리는 사막의 시간이기는 하지만 그 끝에 길이 있고 길이 되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 한 사람이 있음에 감사하며, 그 한 사람이 만약 없다고 느낀다면 그 한 사람이 바로 ‘나'가 되었으면 좋겠다. 내가 존재하는 공동체 안에서 누군가의 마음을 위로하며, 스스로 길이 되어 주는 그런 봄길 같은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삶의 순간순간 희망으로 살아간다면, 진심으로 타인을 존중하며 누군가를 배려하며 살아간다면, 올곧은 마음으로 정직하게 살아간다면, 사랑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선한 영향력을 끼친다면 어떨까? 따스한 봄날! 스스로 봄길이 되어가는 사람을 만나기를, 봄길 같은 사람이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