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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마시는 것을 좋아합니다.
일을 하지 않는 시간에 차를 많이 마셨습니다. 일을 하지 않는 만큼 통장의 잔고는 적었지만, 대신 시간은 많았기 때문입니다.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많은 시간 중 일부를 차를 마시는 데 썼습니다.
차를 마시는 일은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간편하게 티백을 우린다면, 그렇게 시간이 많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잎차를 우리기 위해서는 다소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만 합니다. 물을 끓이고, 다기들을 꺼내고, 정성껏 우려야 합니다. 한 잔의 차는 찻잎과 물을 준비하고, 그것을 정성껏 우려내는 과정 안에서 만들어집니다. 이 중 하나라도 어긋난다면 차의 맛은 제대로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정성껏 우린 차를 충분히 음미하는 일입니다. 차를 충분하기 위해서는 차에 집중을 해야 합니다. 그런 식으로, 차를 마시는 일은 그 순간에 집중하는 일이 됩니다. 이 점은 명상과 닮은 점이 있습니다. 특정한 대상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짧으면 1시간, 길게는 2-3시간 정도의 시간 동안 차를 마시는 일에만 몰입하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 시간 동안 온전히 차에만 집중합니다. 차의 맛에, 차가 주는 감각 경험에 집중하면서, 한 잔 두 잔 차를 마시다보면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가고는 합니다. 그렇게 깊이 있게 차에 집중하다보면, 어느 순간 차에 대한 집중이 자신에 대한 집중으로 바뀌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존재’에 대한 집중. 이렇듯 차에 집중하고, 자신의 존재에 대해 집중하는 순간들은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긍정할 수 있도록 이끕니다. 그 순간에 머무름으로써 부정적인 생각들을 떨칠 수 있게 도와주기도 합니다. 그런 식으로 되는 일 없는 나날들 속에서 끊임없이 떠오르던 수많은 걱정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차를 좀 더 좋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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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마시기 전에는 항상 공간을 정돈합니다. 다탁 위에 다기들을 올려두고, 음악을 틉니다. 차를 마시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니나 시몬의 <Fleeing Good> 이나 프랭크 시나트라의 <One for My Baby> 같은 잔잔한 재즈 보컬을 틀거나, 클래식 연주곡을 틀 때도 있습니다. 가끔은 향을 피기도 합니다. 잔잔한 음악과 은은한 향냄새가 방 안을 가득 채우면, 작은 방의 분위기가 바뀝니다. 온전히 차를 마시는 것만이 목적인 공간이 됩니다. 그렇게 뒤바뀐 공간의 분위기는 차의 맛을 보다 섬세하게 감각할 수 있게끔 돕습니다.
홀로 방에 앉아서, 바람 소리를 듣습니다. 날씨가 맑은 날이면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찻주전자에서 차를 따르며 나는 물소리가 방 안에 울립니다. 이런 시간에는 마음 안에 평화가 가득히 퍼집니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한적한 시간이 주는 평온함과 행복감이 나를 평화롭게 합니다. 나 자신에게 스스로 행복을 선사하는 순간. 작은 행복들을 가득히 모으는 일상의 시간들 안에서 충분히 행복해집니다. 언젠가 책을 읽다가 한 문장 앞에서 한참을 서성거렸던 적이 있습니다. 그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존경했던 이들의 생몰 기록을 들추어본다. 그들이 거의 모두 지금 나만큼 살고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내 생각이 맞았다. 나는 살만큼 생을 누린 것이다.
김진영 지음, 『아침의 피아노』, 한겨레출판, 2018, 17.
이 문장을 쓴 이는 철학자 김진영입니다. 김진영은 암에 걸려 시한부를 선고 받습니다. 하루하루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감각하는 때에, 그는 자신은 “살만큼 생을 누린 것이다” 라고 씁니다. 저도 죽기 직전에 제 삶을 돌아보면서, 삶을 잘 누렸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지금으로서는 이 질문에 흔쾌하게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아직은 저에게 삶이 많이 남은 것만 같이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다만, 제게 주어진 하루하루의 일상을 최대한 ‘누리며’ 살고 싶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누리다의 사전적 정의는 “생활 속에서 마음껏 즐기거나 맛보다”입니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단어는 ‘마음껏’이라는 부사입니다. ‘마음껏’이라는 부사는 삶을 누리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스스로가 느끼는 만족감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누구에게나 삶은 1인칭이입니다. 그리고 1인칭의 삶에서 행복은 자신의 삶을 어떻게 받아 들이냐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스스로의 삶에 충분히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반면에 적은 것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의 삶이 행복하다고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스스로 행복하기 때문이지요.
물질적인 풍요가 삶의 중요한 가치로서 여겨지는 한국 사회에서는 특히나 많은 것을 가지는 것만이 행복을 보장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그런 것일까요?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지 보다 자신이 가진 것에 얼마나 만족하는지가 삶의 행복에서 보다 더 중요한 건 아닐까요? 결국 행복은 마음 작용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행복하다고 믿는다면, 지금의 저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단지 그뿐입니다. 차를 마시면서, 가만히 읊조려봅니다.
지금 이 순간 행복합니다. 그거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