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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범기 Oct 22. 2023

모든 순간이 변한다는 사실을 이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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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어오는 숨과 나가는 숨이 매 순간 변한다는 사실을 감각하면서, 모든 순간들이 매 순간 변한다는 사실을 이해합니다. 마찬가지로 차를 마시면서, 매 순간 내가 마시는 차의 맛이 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차의 맛 또한 매 순간 변하는 것이지요. 같은 차를, 같은 물로, 같은 다기로 우려도 매 순간의 차의 맛은 달라집니다. 차가 변하고, 차를 마시는 제가 변하기 때문입니다. 매 순간이 끊임없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이해하면서, 차를 마시고는 했습니다.  

  모든 차는 잔에 담긴 그 순간에, 그 순간의 모습으로만 존재합니다. 그렇게 차의 맛은 매번 다른 모습으로 변합니다. 아무리 자주 마시고 익숙한 차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 입니다. 내 손 안에 들린 찻잔, 찻잔 안에서 나는 향, 입 안으로 들어오는 차의 맛은 매 순간 변합니다.      

 

                                                                                        2


  차통에 담긴 찻잎은 변하지 않는 물질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육안으로 보기에 형태의 변화는 거의 없지만, 그 안에서 끊임없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찻잎은 산화되고, 그러면서 맛과 향이 달라집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계절이 지나고, 해가 지나면 차 맛의 변화가 좀 더 크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변화는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순간순간, 하루하루의 변화가 조금씩 쌓입니다. 다만 그 미세한 변화를 제가 알아채지 못할 뿐이지요. 제가 변화를 느끼는 순간은 시간이 쌓이면서 변화가 크게 드러났을 때입니다. 차통에서 꺼내진 차는 지금 이 순간의 공기, 기압, 날씨와 만나고 그 순간의 상황들이 조합되어 차의 맛이 나옵니다. 매 순간이 변화하면서 모든 것들이 조금씩 달라집니다. 

  그러니 이전의 순간을 비추어 지금의 순간을 예상해봤자 의미가 없습니다. 그 순간에는 그 순간의 차의 맛이 나올 뿐이기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차를 마시다보면, 무언가를 예상하거나 바라게 되기 쉽습니다. ‘오늘은 날씨가 좋으니 차의 맛이 좋을거야’ 라고 쉽게 예상하거나 ‘오늘은 기분이 별로니까 차의 맛이 좋았으면 좋겠다“고 쉽게 바랍니다. 그런 예상이나 바람은 자주 어긋납니다. 

  차의 맛은 수많은 조건들의 조합에 의해 결정됩니다. 차의 맛을 맛보기 전까지는 차의 맛이 어떻게 나올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차 맛이 좋게 나오리라고 아무리 바란다고 하더라도 차 맛이 좋게 나오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비가 내렸으면 좋겠다고 아무리 바란다고 하더라도 비가 내릴 것이라는 보장이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는 이 순간의 차의 맛을 만날 뿐입니다. 오늘은 어제와 다르고, 내일과도 다릅니다. 어제를 바탕으로 오늘을 예상하거나, 오늘을 바탕으로 내일을 기대하는 일 따위는 그래서 의미가 없습니다. 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오늘이며, 내일은 내일입니다. 매번 변하는 차의 맛은 그 점을 상기시킵니다. 오직 지금 이 순간의 차의 맛에 집중하는 것 말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어떤 날에는 차가 유달리 맛이 없게 느껴집니다. 그것은 단지 그 순간의 맛입니다. 어떤 날에는 차가 유달리 맛있게 느껴집니다. 그것도 다만 그 순간의 맛일 뿐입니다. 차의 맛은 매 순간 변하며, 지금 이 순간에 만나는 차의 맛은 오로지 지금 이 순간의 것일 뿐입니다. 순간에 만나는 순간의 것.  지금 이 순간에 발현되는 차의 맛을 제가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이 어떤 맛이든 내게 오는 그 순간의 맛을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삶을 살아가는 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단지 지금일 뿐입니다. 지금의 상황이 이전보다 나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지금 이 순간의 상황일 뿐입니다. 지금의 상황이 이전보다 좋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지금 이 순간의 상황일 뿐입니다. 단지 그 순간들을 받아들이면 그뿐입니다. 상황이 더 좋아지기를 바라는 것도, 상황이 더 좋아지거나 나빠질 것이라고 섣불리 예상하는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지금 이 순간의 모습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3


  언젠가 차 모임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4-5명 정도가 모였고, 각자 자신이 마실 차를 가지고 와서 함께 마시는 모임이었습니다. 한 번은 그 모임에서 누군가 철관음을 가지고 왔었습니다. 특별히 인상적인 차는 아니었습니다. 그 차를 가지고 온 사람은 자기가 가져 온 철관음을 모임에 온 모든 사람들에게 한 봉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저는 집에 돌아와서 그 차를 구석에 처박아 두었습니다. 마실 차가 많았고, 그 자리에서 인상적인 느낌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당장 마시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때 당시 저는 철관음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철관음 한 봉지는 몇 년 동안 기억에서 잊혔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우연찮게 그 차가 보였습니다. 돼지고기를 삶고 있던 중의 일이었습니다. 돼지고기 수육의 비린내와 기름기를 잡기 위해서 고기를 삶을 때 차를 넣고는 하는데, 무슨 차를 넣을까 살펴보다가 그 차가 보였습니다. 봉지를 열고 냄비에 넣기 직전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차를 우려 맛을 보았습니다. 뜻밖에 맛이 좋았습니다.  

  철관음은 중국 복건성 안계현에서 주로 만들어지는 중국 우롱차의 대표 격의 차입니다. 시중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우롱차 중 하나입니다. 가격도 비교적 저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받은 철관음 역시 저렴하고, 흔한 철관음이라고 지레짐작했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차를 우려 보니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우연히 눈에 들어온 철관음 한 봉지는 내게 뜻밖의 행운으로서 다가온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뿐이었습니다. 두 번 정도 마실 양이 전부였으므로, 금방 다 마셔버렸습니다. 철관음이라는 것밖에 다른 것은 일체 알 수 없으니, 동일한 차를 다시 구할 수는 없습니다. 차 모임은 몇 년전의 일이었고, 그때 왔던 사람과 연락처를 교환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차를 어디에서 구했는지 저로서는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철관음 한 봉지는 제게 한 순간의 행운으로서 찾아왔지만 곧 지나가버렸습니다.

  뜻밖의 행운이 찾아온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한 순간에 지나치는 것처럼, 뜻밖의 불운이 찾아오는 때 역시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행운의 순간이든 불행의 순간이든 한 순간에 왔다가 한 순간에 사라지는 것뿐입니다. 그 모든 것들이 순간의 일입니다.      

  모든 순간이 변한다는 사실을 이해합니다. 모든 순간들이 결국에는 지나가고 변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면서 모든 순간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순간순간 마주치는 모든 순간들을 감사히 받아들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그것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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