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란 놈 그놈 앞에서
언제나 난 늘 빈털털일 뿐
'사랑... 그놈'이란 노래 일부이다. 늘, 혼자 사랑하고 혼자 이별하고 혼자 추억하고 혼자 무너지게 하는 그놈이 사랑이란다. 노랫말처럼 우리는 사랑이란 제 멋대로 왔다가 자기 마음대로 떠나가는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랑, 정말 쉽지 않다. 우린 각자의 방식대로 사랑이라고 믿는 것을 주고받으니까. 사랑이라고 믿었는데 결국은 사랑을 지속하지 못하고 무너지기 시작하는 건 표현의 문제가 아닐까.
부부가 나이 들며 종종 느끼는 것이 "우린 참 서로 다르다"일 것이다. 서로 다른 것을 그제야 알게 된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부부란 시작부터 달랐다. 잠시 하나인 것처럼 행동하고 그렇게 보였을 뿐이다. 결국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이해하면서 갈등이 깊어진다. 세월이 가며 나만의 방식으로 건조하게 표현하는 것에 익숙해지면서 더욱 그럴 것이다.
- 왜, 당신은 늘 차를 반만 마실까?
- 나도 궁금해, 난 뭔가가 끝나는 게 싫은가 봐
이 대화는 결혼 29주년을 앞둔 부부의 대화이다. 더 이상 대화의 진전은 없다. 거기서 끝. 부부가 함께 찻잔을 맞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시선을 서로 다른 곳에 두고 그냥 툭 던지는 건조한 대화, 조금 더 진행되면 심한 갈등으로 이어질까 두려워하는 대화이다. "우린 서로 달라도 많이 다르네"를 암시하는 것만 같다. 그것으로 소통은 끝, 화제를 돌려도 표면적인 대화일 뿐이다.
위의 대화는 영화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원제, Hope Gap)에서 가져온 것이다. 영화는 역사를 가르치는 남편과 시를 편집하는 일을 하는 부인과의 갈등으로 시작되는데 남편이 이별을 결심하고 집을 나가면서 절정에 이른다. 원제 Hope Gap은 그들이 사는 바닷가 동네의 이름이며 영화 전체의 모티브가 되는 은유를 제공하는 말이다. '희망의 틈'이란 말처럼 갈등으로 가정이 무너지지만 화재 후에 숲에서 회복이 일어나는 것같이 치유가 있는 영화다.
이런 영화의 경험은 처음인 것 같다. 계속 돌려 보게 하는 유일한 영화. 그뿐 아니다. 영화가 끝나고 하루가 지나서야 눈물이 나기 시작한다. 왜 그러지? 주책없이 쏟아지는 눈물. 명대사가 많아 뇌가 행복하다. 영화는 뇌를 춤추게 한다.
Hope Gap은 Heart Gap.
심장의 온도가 식어지고 사랑은 증발해 버린다. "그래, 우리는 달라"란 말만 확인하고 모두에게 상처를 남기고 무너지는 가정, 그러나 삶을 정리하려고 절망하는 어머니를 설득하는 아들의 말이 가슴을 때린다. 내 아들이 내게 이야기하는 것만 같다.
정말 삶을 끝내실 거면 미리 말해 주세요. 뒤처리는 제 몫이잖아요. 제가 이해한다는 걸 알아주세요. 만약 엄마가 암에 걸려서 극도의 고통 속에서 천천히 죽어가고 있다면 전 이만 끝내라고 말할 거예요. 엄마를 사랑하니까... 절 위해 살아달라고 할 수 없잖아요. 각자 삶의 짐을 지고 살아가지만 엄마는 탐험가예요. 아주 먼 길을 가셨죠. 훨씬 앞서 가셨다고요. 만일 엄마가 멈춘다면 전 깨닫게 될 거예요. 그 길이 너무 힘들고 길다는 걸요. 전 결국 불행이 이긴다고 생각하겠죠. 하지만 엄마가 멈추지 않고 버티면서 끔찍한 길을 간다면 그럼 전 아무리 고되고 힘이 들어도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할 거예요. 엄마가 해냈으니까.
이렇게 말해주는 가족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영화 마지막 대사는 더욱 압권이다. 이별했지만 부모가 서로 행복한 길을 갈 수 있게 해주는 말이 아닌가. 생각할수록 웃음과 눈물이 동시에 번지게 하는 말이다. 이게 진짜 사랑이 아닐까.
나이가 드셔도 항상 저보다 앞서 가시죠
저 길 멀리 앞에서요
당신들이 영원히 강인하기를 바라는 절 용서하세요
당신들의 고통은 제 고통입니다
당신들이 견뎌내면 저도 견딜 겁니다
제 손을 잡고 마지막으로 함께 길을 걸어요
그리고 절 놓아주세요
서로를 잘 알게 되었을 때 그리고 위기가 있을 때 '진짜 사랑'이 드러난다. 가족 간의 관계가 특히 그렇다. 겉으로 평안하게 보이지만 불안정한 평형을 유지하는 가족이 많다. 가족 구성원의 부재 시 위기에 대처하는 역할 변경(role shift)이 잘되야 한다. 아내가 집을 비웠다고 아이들에게 배달음식만 먹일 수는 없다. 누구든 부엌을 지켜낼 수 있어야 한다. 평소에 최소한 한 달 살기가 가능하도록 계획되고 훈련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화에서는 아빠가 없음으로 인해 찾아온 절대 위기에서 아들이 무너지는 엄마를 지탱해주고 있다. 위기에서 도망치거나 회피하지 않는 아들이 정말 대견하다. 노랫말처럼 "사랑이란 놈 그놈 앞에서 웃음거리"가 되지 않으려면 오래된 관계일수록 그리고 모든 것이 노출된 관계일수록 대화 한 마디에 생각과 존중을 담아야 한다. 잘못된 표현이 관계를 망치기 쉽다. 옛날처럼 습관대로 표현하려 하지 말고 진심을 전할 새로운 말을 찾아 노력해야 한다. 마음과 마음이 닿는 따뜻한 은유가 섞인 말을 할 줄 알아야 한다.
오래된 관계가 사랑을 보증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사랑이라고 믿는 것이 진짜 사랑이 아닐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