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공동체가 코로나로 많은 희생을 치렀다. 나 또한 희생이 작지 않았다. 진료하던 환자를 잃기도 했고 가까이 몇몇 동네 의료진들을 영원히 떠나보냈다. 그중에 장청순 내과의사는 나와 말을 섞고 지내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녀가 코로나로 사망 후 그녀의 처방전을 들고 나를 찾는 분들이 많았다. 그들의 말은 한결같았다. “똑같이 처방해 주세요!” 그녀의 처방전을 건네받을 때마다 살아남은 자가 죽은 자의 엄숙한 편지를 받는 느낌이었다.
난 그녀를 처방전으로 이해했다. 처방은 그녀의 몸만큼 가볍다. 비밀이 없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다. 단정하게 경청하는 모습 그대로 처방에 스며 있다. 오랫동안 단련된 처방, 그건 자신이 복용하는 것처럼 과하지 않다. 과신하지도 않고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자작나무의 숨결이다. 환자들은 안다. 그녀의 처방을 삶의 책갈피처럼 간직해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고인의 원본 그대로 처방해 달라는 주문을 고수한다. 의사들은 안다. 조금만 고집이 있어도 안다. 낯선 처방전을 옮겨 적는 일이 곤혹스럽다는 것을. 그러나 그녀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갑다.
뒤늦게 그녀에게 말을 건다.
-졸시, 「처방을 베끼다」일부
난 그녀가 자작나무처럼 느껴졌다. 그녀의 처방은 나뭇가지에 돋는 푸른 잎과 같았다. 그녀는 하얀 가운이 수의가 되는지도 모르고 수도사처럼 처방을 내리던 나무, 죽어서도 하얗게 서있는 나무 같았다. 이제는 잎을 내지 않는 나무처럼 처방은 멈추었지만 그녀가 남긴 처방은 지속되고 있다.
코로나를 겪으며 누구는 죽었고 누구는 살아남았다. 떠난 사람의 나머지인 남은 자에게 떠난 자의 메시지는 가볍지 않다. 공동체를 떠난 이유가 사회적 책임이 있는 사고에 의한 죽음이었다면 더욱 그렇다. 코로나는 물론 세월호 사건이나 이태원 사건처럼 사회의 큰 아픔이 있은 후 남은 자들에 대한 메시지는 깊고 아프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 란 질문이 지금까지 내게 있다. 나 또한 영원히 살아남는 존재는 아니기 때문이다.
한겨레 신문에 나의「여백의 몫」이란 시가 실린 적 있다. 그 시는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사건이 있은 후 프란시스코 교황의 방한이 있었는데 그때 만들어진 것이다. 손석희 뉴스로도 소개되어 화자 되었던 그 시는 다음과 같다.
프란시스코 교황의 방한 첫날,
가능한 큰 글씨의 친필 서명을 받기 위해
주교단은 큰 종이를 고황에게 내밀었다
교황은 돋보기로 봐야 할 정도의 작은 글씨로
francisco라고 썼다
모두 함께 웃었다
주교들은 깨알 같은 이름 때문에 웃었고
교황은 여백이 커서 웃었다
손석희 뉴스에서는 이 시를 낭송하기에 앞서 '부끄러움'이란 꼭지를 달았다. 세월호 사건 후 남은 자들의 부끄러움을 말한 것이다. 죽은 자들이 남긴 몫은 남은 자들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여백은 살아남은 자들이 마음대로 누리는 공간이 아니라 책임의 공간이며 교황처럼 자신을 겸손히 내려놓는 공간이고 타인을 배려하는 공간, 공동체를 의식하는 공간이다.
인간의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
최근 서거하신 프란시스코 교황이 남은 자에게 남긴 말이다. '남은 자'란 말을 사용할 때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선택받은 자들의 의미가 있어 조심스럽다. 여기서 남은 자란 신의 은총을 받은 혹은 신의 은총을 누릴 그런 사람의 의미가 아니라 말 그대로 살아남은 자를 말할 뿐이다. 영원히 살아남은 자는 존재하지도 않다. 속한 공동체에서 관계적으로 혹은 경제적으로 무너지거나 이탈하지 않고 (살아) 남았다는 것은 존중받아야지만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는 논리에는 동의하고 싶지 않다. 결국 남는 것은 사라지게 되고 새로 오는 것으로 대체되기 마련이다. 세상은 오롯이 내 능력으로만 살아남을 수는 없다. 자신의 힘으로 살아남은 자임을 자랑하는 자에게 히틀러 폭정으로 타국을 떠돌던 브레이트의 시「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들려주고 싶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살아남은 자로서 우리는 역사의 희생을 당한 친구들에게 빚이 있을 것이다. 타인의 어떤 도움도 없이 스스로당연한 듯 살아있는 사람은 없다. 살아남은 자들의 부끄러움이 수치스러운 부끄러움이 되지 않으려면 죽은 자들이 남긴 숙제를 잘 살펴봐야 할 것이다. 거대한 일을 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일상의 자리를 잘 지키는 일, 그 자리가 썩지 않도록 소금의 역할을 하는 일이 아닐까.
남은 자로서 살아간다는 것, 내게 주어진 여백에 감사하며 잘 자고 잘 놀고 잘 먹으며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