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도 괜찮아요
지긋지긋한 무기력은 하루 이틀의 것이 아니었고, 갑작스럽게 생긴 것도 아니었다. 것보다는 꾸준히 누적되어 쌓였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하나씩 성취하는 걸 좋아했던 나는 취업과 동시에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한정되어 있음을 느꼈다. 내가 자의적으로 하고 있는 일은 전혀 없었고 회사의 부품으로 일했다. 나의 시간을 항상 원했고 그 결과는 퇴근 시간만을 기다리는 이원화적인 삶이었다. 그럼에도 퇴근하고는 피곤해서 바로 잠을 잤고, 잠은 새로운 시도를 항상 이기고는 했다. 그러면서 '안될 것 같다'라는 식의 부정적인 생각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결국 지독한 무기력에 빠지게 만들었다.
무기력보다도 무서운 것은 무기력과 함께 빠지는 열등감이었다. 무기력에 빠져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나와 열정 가득한 모습으로 밝게 무엇이든 해내는 타인을 보면서 열등감도 덩달아 생겨버렸다. 나는 가지고 있지 않은 것들을 가진 사람들을 부러워했고 나는 왜 저런 능력과 끈기를 가지지 못했나 한탄하기 일쑤였다. 아예 마음 놓고 '오늘은 놀자'하고 놀아버리면 차나리 마음이 편할 텐데 그것도 아니었다. 뭐라도 하고 싶어 하면서 왜 이렇게밖에 하지 못하나 의문을 품고 그 의문에 속상해하며 무기력과 열등감이 동시에 올라왔다.
2년 동안 쌓이고 쌓여 없어지지 않았던 지독한 무기력을 없애치워 버렸던 나의 방법은 사소하지만 놓치기 쉬운 것들이다. 간과하기 쉬운 아주 사소한 것들. 우리는 결국 사소한 존재고, 우리를 바꿀 수 있는 것도 아주 사소한 것들로부터 시작된다. 한 번에 아래의 모든 것들을 할 필요는 없다. 한 가지씩 차근차근하면 되고 정 안될 때는 "오늘은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아 버리자"라고 외치고 마음껏 푹 쉬는 게 더 중요하다.
1.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채우기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채우는 방법은 다양하다. 음식, 책, 옷과 신발, 사람 등이 있다. 나 같은 경우에는 스콘과 함께 휘핑크림이 가득 올려진 핫초코를 마시면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책도 잔뜩 사고, 사고 싶었던 옷도 샀다. 여기서 문제가 하나 있다면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채우려면 돈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일정한 수입이 없을 때는 내가 좋아하는 옷을 살 수가 없었다.
하지만 돈을 마음껏 쓸 수 없는 경우에도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채우는 방법은 존재한다. 버스타고 가보고 싶었던 곳 가보기, 노래 틀어놓고 춤추기, 오랜 친구들과 전화로 수다 떨기 등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채울 수 있는 방법은 많다. 좋아하는 것들을 하나씩 발견하면서 채워 나가다 보면 주위를 조금만 돌아봐도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은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2. 아무것도 안 해보기
뭐라도 하려고 하는 시도를 하다가 자꾸만 실패로 끝나면 다른 시도조차 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다. 무엇보다 해야 하는데도 하지 않는 자신을 원망하게 된다. 하지만 무엇을 할 수 있는 힘조차 없는 상황에서 뭔가를 하려고 시도하는 것 자체가 대단한 것이다. 그러니 도저히 몸과 마음이 따라주지 않을 때는 무리하지 말고 하지 말자.
"이번 주는 아무것도 안 하는 거야!"라고 소리치고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나니 오히려 개운했고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을 가지니 뭔가를 할 힘도 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안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시골에 가있거나 제3의 공간에 가있는 것이다. 이곳도 저곳도 아닌 현재를 잊을 수 있는 상황이면 충분하고 그 상황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도 없애줄 것이다.
3. 자질구레한 것들 해치우기
일단 몸을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힘이 생겼다면 방청소부터하자. 일어나서 신나는 노래를 틀어놓든, 힘들 때 듣는 노래를 틀어놓든, 청소할 때 듣는 노래를 틀어놓든, 자연의 소리를 틀어놓든 간에 일단 청소를 하자. 주변을 정리하는 것만큼 개운해지는 것도 없다.
집안을 청소했다면 다음 순서는 미뤄뒀지만 계속해서 신경 쓰였던 일들을 처리하는 것이다. 거의 다 써가는 선크림을 새로 구매하는 일, 메일을 확인하고, 새해 계획을 새로 짜는 일, 귀찮기만 하던 이부자리 정리, 손톱을 자르는 일 같은 사소하지만 신경 쓰이는 일들을 해치워버리자. 자질구레한 사소한 것들을 해치우면 머릿속은 더 맑아지고 분명해지기 마련이다.
4. 긍정적으로 세상 바라보기
하루를 살아가면서 많은 장면과 마주하게 된다. 그 장면들 중에서 어떤 장면에 집중할 것인지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몇 개 안 되는 것들 중에 하나다. 바깥으로 내뱉는 말 외에도 속마음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안 좋은 면이 있으면 좋은 면도 분명 있다.
우유를 마시려고 우유를 컵에 따라서 입에 대려고 하는 데 손이 미끄러져서 컵이 깨졌다고 생각해보자. 그럼 새 컵을 살 수 있는 기회일 수도 있다. 그게 긍정적인지 부정적인 것인지는 분명하게 나누기 어렵다. 당장은 부정적으로 보여도 긍정적인 일이 될 수도 있으니까. 혹여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고 생각이 들면 2번 '아무것도 안 해보기'로 다시 돌아가라.
5. 몸을 움직여 땀 흘리기
이게 가장 어렵기도 하다. 전혀 움직일 힘도 없는데 당장 달리라고 하니. 하지만 움직여보면 왜 달려야 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머릿속이 맑아지는 건 덤!
조금도 움직이고 싶지 않은 당신에게 1단계로 추천하는 건 걷기 운동이다. 이어폰을 끼고 하염없이 걷다 보면 어떻게든 움직이게 되어있다. 그렇게 조금이라도 걸을 의지가 생겼다면 2단계로 나아갈 준비가 된 것이다. 2단계는 뛰는 것이다.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까지 뛰고 또 뛰다 보면 머릿속이 맑아진다. 3단계는 운동 지속하기다. 움직이는 게 조금 수월해졌다면 배드민턴이나 농구 축구 요가 필라테스 등으로 운동을 지속한다. 나 같은 경우 라테스민턴을 하고 있다. 배드민턴을 좋아하지만 매일 운동 친구와 시간을 맞추는 게 어려워서 배드민턴과 테니스를 결합한 라테스민턴을 혼자 치고 있다.
6. 사랑하기
사랑은 무기력한 나를 탈바꿈하기도 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바뀌어야 한다는 걸 아니까. 사랑이라는 건 어마 무시한 힘이 있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무엇보다 강하다. 가족에게, 친구에게, 연인에게 더 좋은 사람이 되도록 만들어준다. 더 나은 사람을 만나려고 하지 말고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하다 보면 어느새 당신 옆은 좋은 사람으로 가득 찰 것이다. 힘들 때도 옆에 있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 자체로 위로가 되고 더 잘할 수 있는 힘이 나기도 한다.
7. 큰 소리로 웃어보기
미친 사람이 되면 어떤가. 많이 들어서 알겠지만 웃음에는 큰 힘이 들어있다. 행복해서 웃기도 하지만 웃어서 행복하기도 하다. 분명 웃기지 않았는데 옆에서 누군가가 깔깔 거리며 웃는다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기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웃음은 전염된다.
내가 전염된 웃음을 받았다면 나도 누군가에게 웃음을 전염시킬 수 있는 사람이 되어보자. 그리고 무엇보다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으니까 행복해진다는 것을 명심하자.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 무엇보다 무기력한 스스로를 보며 한숨짓지 말고 그냥 크게 웃어보자. 당신 또한 웃는 당신 얼굴에 전염될 것이다.
8. 아침에 10분 명상하기
내적인 성장만큼 나를 지탱해주는 것도 없다. 아침에 새벽같이 일어나는 건 힘들지만 10분 일어나는 건 1시간 일어나는 것보다는 훨씬 쉽다. 10분도 일찍 일어나기 힘들다면 아침에 10분 일찍 일어나는 건 하지 말고 점심시간이나 저녁 먹고 나서든지 언제라도 좋으니 손에 들린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가만히 앉아서 10분 동안만 머릿속을 비워보자. 언제라도 괜찮으니 일단 시도해보자.
9. 음식을 먹을 때는 고독한 미식가처럼 먹기
음식에 큰 욕심은 없었다. 또 똑같은 맛일 거고, 또 똑같은 맛이지만 조금 더 맛있으면 땡큐고, 오늘 당기는 음식을 먹으면 더 땡큐다. 요리에 소질도 없었고, 요리 후의 설거지는 더 싫기에 요리도 잘하지 않았다. 이런 나의 태도를 180도 바꾼 드라마가 있다. '고독한 미식가'라는 일본 드라마인데 음식을 대하는 태도에 요리사에 대한 존경도 같이 묻어난다. 음식점에 들어갔을 때의 분위기, 요리사가 요리를 대하는 태도, 음식을 하나하나 음미하는 것까지. 그렇게 먹으면 음식을 먹을 때만큼은 오롯이 음식에 집중해서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10. 외적인 부분을 꾸미기
꾸미기를 주저하지 말자. 이럴수록 더 꾸며야 한다. 외적인 것도 중요한 부분이다. 집에 처박혀 있는 것보다는 매무새를 매무시하고 집 밖으로 나가자. 누구라도 만나서 수다를 떨거나 어디든 가서 사진 한 장이라도 찍고 오자. 나는 혼자 강릉여행을 가서 삼각대를 놔두고 해변에서 사진과 영상을 찍곤 했다. 혼자 해변을 산책하니까 사진 찍어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온통 사진을 찍어주고 다녔는데 그것도 나중에는 추억이 되었다. 어디든 가자. 예쁘게 꾸미고. 어깨도 펴고.
11. 가보고 싶었던 곳 가보기
가보고 싶었던 곳조차 가고 싶지 않을 정도의 중증 무기력의 경우일 수도 있다. 나처럼. 하지만 이 경우에도 일단 목적지를 선택해서 떠날 것. 중요한 건 시도 그 자체다. 뭔가를 얻어오자는 생각도 버릴 것. 생각나는 대로 발길을 옮겨라. 어디서 잘 건 지. 뭘 볼 건지. 딱 이거 2개만 정하면 여행은 완성이다.
단양? 영주? 포천? 전주? 아무 곳이나 선택해서 일단 움직여야 한다. 나 같은 경우에는 '자작나무'에 꽂히면 자작나무 하나만 생각하고 인제를 간다. 대단하지 않은 여행이라도 괜찮으니 일단 시도 자체가 중요하다. 가보고 싶었지만 마음 속에만 고이 간직했던 여행지를 꺼내서 발길을 옮겨보자.
12. 나다운 것들을 찾아볼 것.
'지음이의 하루'라는 블로그를 시작하게 된 이유는 '나답게 살기 위해서'였다. 나 다운 순간들을 적으면 점점 나다워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적기 시작했다가 지금은 내가 뭘 하든 이건 '나'라는 생각에 나다운 것을 구분하지 않고 이것저것 기록하고 있다. 내가 뭘 하든 '나'라는 생각이 정립된 것도 나다운 것을 찾으면서였다.
내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를 구분하면서 그것들을 나누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았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정의 내리기 위해 나를 조각하다가 이것도 저것도 나라는 것을 배웠다. 누군가에게는 소심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대범한 사람. 누군가에게는 차갑지만 누군가에게는 따뜻한 사람. 나를 이분화할 수 없다는 걸 배웠다. 그렇게 나답게 사는 게 뭔지 찾아가다 보면 당신만의 '나다움'을 정립할 수 있지 않을까.
13. 글을 쓸 것.
글은 어지럽혀진 마음을 정리하는데 가장 좋은 수단이다. 단 조건이 있다. 긍정적인 일이 일어났을 때도 글을 쓸 것. 부정적인 감정을 해소하는데 글을 것만큼 나의 감정을 해소해주는 것도 없었지만 돌이켜서 내가 쓴 글들 모아보니 불만투성이에 우울함은 바 닥치다 못해 지구를 뚫을 기세였다. 그 글을 읽다 보면 더 우울해지곤 했다. 그러니, 우울한 감정은 달리기로 날려버리고 좋고 행복했던 일들을 우선 기록할 것. 작은 것이라도 좋다. 마음을 정리하고 하루를 기록하는데 조금의 시간을 할애하자.
14. 블로그, 인스타, 유튜브를 시작할 것.
꼭 위의 사이트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일상을 타인과 공유하는 것이 좋다. 과거의 나는 이런 것들을 멀리했던 사람이었다. 몇십 분 심지어 몇 시간이 날아가 버니까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었다. 더욱이 무기력이 심해지면서 하루에 10시간씩 핸드폰으로 웹서핑을 하곤 했다. 나의 일과는 오지도 않는 잠을 더 자고, 최대한 잠들어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먹고, 웹서핑을 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소비자의 입장에서였다. 생산자의 입장으로 바라보니 나의 이야기를 꺼내는 게 설렜고, 피드백이 기대되었다. 그러니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탈바꿈해보자. 잘하기 위해서 돈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나의 일부를 누군가 알아준다는 생각으로 말이다.
15. 현재 나이에 감사하자.
당신이 어떤 나이를 지나고 있건 간에 지금 나이는 다시 오지 않는다. 과거가 늘 그립듯이 지금 이 순간도 그리워질 것이다. 그러니 지금을 즐기자. 버킷리스트에 적어놓았던 번지점프, 항상 가보자고 했던 산티아고 순례길, 미뤄뒀던 고백도 그냥 해보자. 후회는 있어도 미련은 없도록.
2022년이 찾아왔고 나이에 대한 두려움이 앞섰다. 하지만 앞으로 내가 맞이할 인생 중에서 오늘이 제일 젊은 나이이지 않은가. 가장 젊은 나이 젊은 순간에 두려워할 필요가 뭐 있을까. 내년이면 지금 이 순간만큼 그리운 순간도 없을 것이다.
16. 방향을 재정립하기
삶의 방향이 어딘가 잘못됐다고 느꼈다. 이대로 살아가는 게 죽어가는 것과 뭐가 다르냐고 되물었다. 노예가 돼서 끌려가 꾸역꾸역 버티는 하루가 지속되었다. 이 방향이 틀렸다고 확신했다. 그럴 때는 방향을 새로 정립해야 한다. 그대로 내 몸과 마음을 맡기면 그건 정말 죽음과 다름없다.
오로지 당신만이 바꿀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그 누구도 당신에게 맞는 방향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 다시 방향을 맞춰 걸어가려는 시도 그 자체가 당신의 의지이며 당신의 노력이며 삶의 이유다. 잠시 멈춰 서서 방향을 재정립하자. 그러고 나서는 주저하지 말고 시도하자.
한 번 쉬어가면 어떠한가. 넘어져서 주저앉고 싶을 때는 조금 주저앉아있다가 다시 일어나면 된다.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버리고 자신에게 조금만 시간을 주자. 하고 싶은 만큼만 움직이고, 하고 싶은 만큼만 해도 좋으니 일단 16가지 중에서라도 하고 싶은 게 생기면 그때 움직여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