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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노이 민언냐 Oct 01. 2021

나의 다섯 번째 혀-대낮에 19금 토크

5번째 외국어, 베트남어 정복기       일러스트 by 하노이 민언냐

 “엠 틱 부어이(Em thíc buồi.).”


이스라엘 친구 리브의 내니가 박장대소를 하기 시작했다. 난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하고 있었다. 작 본인한낮에 19금 토크를 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나는 다섯 개의 혀를 갖고 있다.
 
무슨 남극에서 파파야 따먹는 소리냐고? 영어로 multilingual 그리고 불어로 polyglotte이기 때문이다. multi와 poly는 모두 ‘여럿’, lingual과 glotte는 어원이 ‘혀’다. 그러니 한국어, 영어, 일어, 불어 그리고 베트남어를 하는 나는 문자 그대로 다섯 개의 혀를 가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한 번 들으면 다 외우는 줄 안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언어 천재인 줄 안다. 사실 언어 천재까지는 모르겠지만 언어 영재쯤은 되는 줄 알았다. 나도 거의 40년을 그렇게 착각하고 살았다. 베트남어라는 강적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언 19년 전이다. 듣기만 해도 상큼 터지는 22살에 동경에서 9개월 그리고 상상도 안될 만큼 까마득한 25살에 런던에서 1년간 어학연수를 했다. 어학연수를 하기 전, 나의 언어력을 부등호로 나타낸다면 일어>>영어>>>>>>>>베트남어가 되겠다. 특히 일본어는 출국하기 1년 전부터 주 5일 새벽 6시 수업을 들어가며 공부했다. 그 결과 다니던 어학원에서 초고속 레벨 업이 가능했고 수강생 중 최단기로 원어민 회화반에 들어갔다. 훗, 학원의 역사를 새로 썼다고나 할까. 잘난 척을 조금만 더 해볼까. 일본으로 가기 전부터 이미 자막 없이 일본 드라마를 볼 수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당연히 JLPT N2(그 당시만 해도 ‘일본어 능력 시험 2급’으로 불렸다.)도 합격했다. N1이 가장 높은 레벨이니 N2면 꽤 괜찮은 수준이었지. 사실 일어를 박 터지게 한 이유는 순수한 나의 의지라면 좋겠지만, 연수 가려면 ‘비전’을 제시하고 증명하라는 아부지의 엄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아부지로 말하자면, 한 번 입 밖에 꺼낸 말은 하늘이 두 쪽 나도 지켜야 하는 알아주는 단호박! 그때 시험에 합격하지 않았다면 동경의 ‘동’자 아니 ‘ㄷ자’도 꺼내지 못할게 뻔했다.
 
일본에서 9개월의 연수를 마치고 김해 국제공항에서 일을 할 수 있었다. 당시만 해도 일본인 관광객이 많아, 일어 전공자가 직원이 8할이었다. 점점 중국인 관광객이 점점 늘어나면서 중문학과 전공자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대세는 일어 전공자였다. 영국 어학연수는 공항에서 일하던 중 결심하게 되었다. 애초에 대학원을 목적으로 떠난 연수였다. 지금처럼 유창하진 않아도 생존 영어는 가능했다. 남편은 나를 하노이의 김영철이라 부른다지. 원어민보다도 더 혀를 굴린다나. 하지만 발음 고자인 남편의 평가 따윈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영국에서도 최단기간에 최상급반으로 레벨 업을 했다는 것이다. 누가? 당시 토익 600점이던 바로 내가 말이다. 남편도 같은 목표를 갖고 런던에서 연수를 시작했다. 랭귀지 스쿨 입학 당시, 한국인 최초로 상급반에 배정되었다. 하지만 그 영광도 잠시! 1년 내내 같은 레벨에 머물러, 상급반에 키큰 정승이 되었다는 슬픈 전설이 있다. 역시 대쪽 같은 남자다. 연수를 마무리할 때는 대학원에서 요구하는 IELTS 아이엘츠 점수도 땄다. 대학원 진학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다했다. 교수님의 추천서, 아이엘츠 점수, 원서 등 모든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하지만 우리 인생이 계획대로 되는 게 아니지. 원서를 넣기 1주일 전 개인적인 이유로 급하게 귀국해야만 했다. 그리고 식충이처럼 가만히 있기에는 등짝에 내리 꽂히는 아부지의 눈빛이 너무나도 강렬했다. 영어 강사로 잠시 일한다는 게 그냥 부산에 눌러앉아버렸다. 유학은 무산되었다.
 
프랑스어는 둘째를 낳고 1년이 지나서 한 재취업과 동시에 시작했다. 당시 다시 한번 어학으로 스스로를 증명해 보고 싶은 의욕에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내 혀는 아직 녹슬지 않았다며 혼자만의 고독한 레이싱을 하고 있었더랬지. 혹자는 중국어를 해야지, 무슨 봉쥬르냐며 허영에 찌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B1(중급)의 레벨까지 열심히 달렸다. 자, 여기까지가 나의 어학 영재로 살던 때다. 그때까지도 어학에 남다른 재능이 있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환상 속에 산다는 건 나름 행복한 일이다.

 베트남어는 시작점부터 달랐다. 나의 베트남어의 수준은 10점 만점의 0.2점이었다. 제로와도 같지만 곧 죽어도 제로는 아닌 0.2점!
 
나름 부산에서 2달 동안 4인의 소그룹으로 진행되는 수업을 들었다. 2 달이지만 돈 계산이나 날씨 정도는 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강도 높은 경상도 사투리를 구사하던 평균 연령 45.5세의 주부님들 사이에서 보기 좋게 착각하고 있었다. 성조를 달팽이의 한 발자국만큼 빠르게 그리고 안약 한 방울 정도의 차이로 그럴싸~~ 하게 발음한다고 으스대고 있었다. 스스로 과대평가했다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노이 땅에 발을 붙이는 순간 바로 알았으니까.
 
발음을 따라 하는 것에는 그 누구보다도 자신이 있었는데 베트남어의 성조는 달랐다. 성조가 분명히 6개라고 배웠는데, 66개는 되는 것 같았다. 한국어는 발음 또는 억양이 이상해도 통하지만 베트남어는 성조 없이는 아예 통하지 않는다. 어설픈 발음과 억양은 오히려 더 많은 혼란을 야기할 뿐이었다. 택시 기사들에게 행선지를 말하고 싶어도 돌아오는 건 냉대뿐이었다. 기다려달라는 “쪄 또이.(Chờ tôi.)” 대신에 자꾸 뭘 달라는 “쬬 또이.(Cho tôi.)”를 하니, 누군들 답답해하지 않겠는가. 이런 경험이 매일 반복되자 어학에 재능이 있다는 굳은 신념도 와장창 무너졌다. 베트남어를 배우면서 깨달았다. 세상에 언어 천재란 없다. 혹은 그 천재가 나는 아니구나 했다.
 
나의 베트남어는 Hello의 ‘신짜오.(Xin chào.)’와 Thanks의 ‘깜언.(Cảm ơn.)’ 빼고는 모두 무용지물이었다. 그마저도 ‘아녕하세효’와 ‘캄사홥니다’로 들렸겠지.
 
베트남어 배울 때, 선생님이 분명 제일 잘한다고 했는데...... (이래서 칭찬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 자기소개는커녕 로컬 시장에서 간단한 숫자도 통하지 않았다. 하긴 after의 싸우(sau)와 six의 싸우(sáu)도 제대로 발음을 못했다. 한 번은 요가원에서 만난 베트남 친구에게 다음 달(tháng sau)에 만나자고 한다는 게 실수로 6월(tháng sáu)로 말한 적이 있었다. 그 친구는 당황하며 몇 번이나 되물었다. 당시 9월 말이었으니 다음 주에 만날 친구가 6월에 보자니, 내년 6월도 아니고...... 지금 생각해도 창피한 순간이다.
 
매번 실수가 반복되었다. 좌절했다. 나름 4.6개 국어(한국어, 영어, 일어, 프랑스어는 중급이니 0.6개 국어라고 하자.)를 하는 사람인데 말이다. 인생에서 어학으로 처음 맛보는 패배감이었다. 내가 어학에서 실패자가 되다니. 이건 마치 주머니 없는 도라에몽이요, 흰둥이 없는 짱구였다.
 
하우스키퍼들에게 창문 열지 말라( 11월의 하노이는 공기 오염도가 살인적이다.)는 한마디인 "콩 머어 끄어."(Không mở cửa.)를 전달하는데 10번은 더 말하고 손짓 발짓을 해야 겨우 통했다. 이건 베트남어를 한다고 볼 수 없었다. 점점 더 보디랭귀지의 천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베트남어는 하노이에서 1시간 거리의 지역도 서로 억양이 다르다. 호찌민(사이공) 사람들의 말은 하노이 현지인들도 이해하지 못할 정도다. 여느 대도시와 마찬가지로 하노이는 베트남의 각 지역에서 다 모여들기 때문에 방언을 쓰는 이들을 만날 확률도 높다. 이 사실을 그때도 알았다면 패배감이 좀 덜 했을까. 그저 나약한 나의 베트남어에 좋은 변명만 하나 더 생길 뿐이다. 방언을 쓰는 그들도 외국인에게는 클린 하게 발음을 하기 마련이다.
 

작년 베트남어 숙제를 하다 괴로워하던 나, 이런 나를 놀리며 사진 찍던 쩡이와 남편

나는 줄곧 틀린 성조를 썼다. 하지만 한국인들과의 수업에 익숙한 베트남어 선생님들은 내가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그들은 진정한 프로 강사들이었지만 이는 오히려 독이 되기도 했다. 일상생활에서 나의 베트남어는 무용지물이었기 때문이다. 매일 베트남어를 엎어버릴까, 때려치울까 하며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그걸 모아 가발로 만들었다면 최소 10개는 나왔을 것이다. 체면 따위는 이미 잊은 지 오래였다. 베트남어를 향한 나만의 외로운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건 내 명예와 인생이 걸린 문제였다. 직접 발로 뛰고 실전에 부딪혀야 했다.
 
사실 호떠이나 호안끼엠 등의 호텔, 레스토랑은 외국인들이 많이 간다. 그래서 직원들 대부분이 영어가 매우 유창하다. 내가 더듬더듬 말을 하려고 하면 0.1초 만에 바로 영어로 전환되는 게 현실이다. 하여 베트남어를 하기 위해 로컬 시장에 가기 시작했다. 난데없는 날씨 드립과 나이 등의 신상정보를 줄줄 말하고 갑분 자기소개를 하고 다녔다. 시장이라고 모두 호락호락하지 않다. 외국인 어설픈 말 상대를 해주기에는 그들은 매우 바쁘다. 그나마 물건을 사면 몇 마디 더 붙일 수 있었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겠는가. 지갑 말고 또 필요한 게 뭐다? 눈치다. 가게의 직원이나 주인을 빠르게 스캔해야 한다. 분위기를 보고 말동무를 잘해준다 싶으면 두 번 그리고 세 번을 갔다. 그렇게 단골손님이 됐다가, 서로의 근황을 묻는 친구가 되었다. 택시 안에서는 박항서 감독으로 백전백승이었다. 그래서 데이비드 베컴 이후로 1도 관심 없던 축구 경기의 기사를 챙겼다. 삼 남매 중 막내로 장착한 생존 눈치는 이럴 때 쓰는 거다.
 
그렇게 고뇌의 6개월이 지나자 성조가 조금씩 아~주 조금씩 혀에 붙기 시작했다. 한창 베트남의 진전에 속도가 붙을 때, 다시 성조의 중요성을 실감한 경험이 있다.
 

루는 이스라엘인 친구 리브 가족의 집에 놀러 갔다. 리브는 하노이에서 사귄 첫 외국인 친구로 두 살배기 막내가 있었다. 막내를 봐주는 나이 지긋한 내니도 함께 집에 있었다. 내니는 이해는 하지만 영어를 능숙하게 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베트남어로 대화를 했다. 그날은 한창 과일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자몽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엠 틱 부어이(Em thíc buồi.).” 대한 비밀은 역시 발음과 성조! 얼핏 같은 단어로 들리지만 확연히 다른 두 단어가 나를 변태로 만들고 있었다.
 브어이(bưởi 자몽)와 부오이(buồi 남자의 ##)의 차이를 상세히 알려주는 것이 아닌가. 아마도 내가 자몽을 좋아한다는 게 “나는 남자의 ##이 좋아요.”로 들렸겠지. 난데없는 19금 토크를 하고 있었다.
 


친구의 내니가 아니라 평소 자주 가는 식당의 주인아저씨나 택시 기사였다면 어땠을까 상상해 보았다. 생각만 해도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하마터면 변태 한국 아줌마가 될 뻔했다.
 
여전히 베트남어를 공부 중이지만 일상생활에 전혀 문제가 없다. 오늘은 네일숍에서 오직 베트남어로만 1시간 30분을 수다 떨고 왔다. 그리고 내가 가장 환호하는 말도 듣고 왔다.


“하노이에 몇 년 살았어요?(Chị sống ở Hà Nọi bao lâu rồi ạ?)"
“거의 2년.(Hầu hết 2 năm rồi.)”
“우와~ 진짜 베트남어 잘해요.(Chị nói tiếng việt rất giỏi)”
“에이~아니야. 베트남어 너무 어려워(Không. Tiếng việt khó lắm mà.)”
 
나는 씨익 웃는다. 승리자의 미소란 이런 거다. 나의 다섯 번째 혀는 칭찬받아 마땅하다.
 

오늘 다녀온 네일숍. 네일 말고 헤드 마사지만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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