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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노이 민언냐 Nov 30. 2021

하노이의 돈 먹는 하마

남편 가라사대                 일러스트 by 하노이 민언냐

뭐? 돈 드는 거가?


컴맹인 와이프는 메일을 잘 확인하지 않는다.

이건 컴맹인 것도 있지만 귀차니즘도 있다. 작은 글자의 이메일을 보고 있자면 눈이 팽팽 도는 것 같다.


어느 날, 학교에서 연락이 온다. 시간도 애매한 오후 5시 50분이었다. 칼퇴를 진리로 하는 국제 학교의 사무실에서 웬일이지. 덜컥 겁이 난다.

"Hello. Is this Jjun's mom? This is secondary office from BIS."


세컨더리 오피스의 선생님은 왜 메일을 확인하지 않았냐는 말을 먼저 한다. 알고 보니, 학교에서 첫 랜선 학부모 상담 신청을 알리는 메일이 일괄 전송되었다고 한다. 9월 17일에 메일이 왔었다니 벌써 한 달이 훨씬 넘었다. 10월 25일이 마감이었다. 세컨더리가 되면 첫 텀의 중간쯤에 선생님들과 학부모님 사이의 면담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올해는 이마저도 랜선으로 한다고 했다.


"이메일..인증... 비밀번호... 재설정... 활성화를 시키고...과목별..상담...접속...지정 예약.... "


점점 호기롭게 대답하던 나의 목소리는 기어들어가기 시작했다. 설명이 영어가 아니라 외계어 같이 들렸다. 이건 뭐, 국제 학교에 보낸 게 아니라 NASA에 보내 놓은 건가. 우리나라 말로 설명을 듣는다고 해도 못 알아 들었을 꺼라는데, 꽉 찬 한 표를 던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세컨더리가 되고 잡힌 첫 학부모 상담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제아무리 붙복 수준의 말들이 오간다고 해도 말이다.


그리고 마감 날짜가 바로 당일로 다가왔다.


“기뿌웅~ 어디고?”

"응? 회사지."

"언제 오노? 퇴근 안 하나?"

"민뽕, 지금 5시다."


이럴 때 필요한 건 컴퓨터와 친한 남편이다. 그에게 어디냐고 묻는 톡을 5시부터 보내기 시작했다. 평소 저녁시간에 톡을 잘하지 않는 나를 수상하게 여긴 남편은 왜 자꾸 묻냐고 했다. 물론 “빨리 집에 오라고..”로 답장은 대충 얼버무렸다. 괜히 미리 말하고 도움을 요청하다가는 으스대는 남편을 국빈 대접해야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내 무식한 컴퓨터 지식을 탓하는 구박은 따놓은 당상이지. 다행히 그는 정시 퇴근을 한다고 했다. 브라보! 하늘이 나의 절박한 마음을 들어준 것일까. 역시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


띠리링!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실 이미 2시간 전부터 컴퓨터의 홈페이지를 요리조리 들어가 보고 이것저것 창을 열었다 닫기를 수십 번 반복했다. 머리를 쥐어뜯고 발을 동동 구르며 헐크로 변하기 일보직전에 남편이 등장했다. 이 난세에서 나를 구원해 줄 구세주가 나타난 것이다. 그는 늘 그렇듯 양손에 케이마켓(한국 슈퍼마켓이다.)의 커다란 봉지를 들고 집으로 왔다. 분명 사갈 게 있냐고 묻던 남편의 톡에 "Nope."이라는 강한 거절의 단어를 보냈는데도 또 과자를 한가득 사 오고야 말았다. 봉지 안에는 건강한 식품이라고는 눈을 씻고 볼래도 없고 칼로리 폭탄 인스턴트식품과 과자만 한 가득이었다. 이건 뭐 비만이 안 되는 우리 새끼들이 용할 지경이다. 과자를 왜 또 이렇게 많이 사 왔냐고 과일을 사 오라고 타박하는 말이 나올 뻔했다. 초인적인 힘으로 간신히 말을 삼켰다. 그래, 지금 기분을 잘못 건드리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된다. 섣불리 신경을 긁어서 좋을게 하나도 없다. 최대한 남편을 기분 좋게 하자. 그녀의 남편은 컴퓨터와는 떼려야 뗄 수가 없는 엔지니어가 아니더냐.

선생님들과의 약속을 잡으라는 이메일이다.

누구든 맛있는 걸 먹고 배가 부르면 행복해지고 마음이 열리는 법이다. 퇴근하고 와서 가족과 함께 먹는 저녁식사, '캬아~'. 이거야 말로 진정한 하루의 마무리지. 우선 저녁밥부터 그가 좋아하는 반찬으로 채워 보자. 마늘 송송 버섯 담뿍 미소 된장국에 꼬들한 잡곡밥, 꾸밈없는 대형 계란말이, 고소한 버터에 잘 구운 연어, 고소한 챔~기름 넣은 시금치와 깨소금 솔솔 숙주나물로 한 상을 차렸다. 배불리 먹고 기분이 좋은 남편! 저녁 식사를 마치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부푼 배를 두드리며 '꺼억'! 신호가 왔다. 작전을 개시할 타이밍이 온 것이다.


지금이다!고!고!


내일 쭌이의 학교 선생님들과 온라인 상담을 하려면 학교 사이트에 들어가 계정을 입력하고 활성화시켜야 한다. 그리고 비밀번호도 재설정한다. 아직 끝이 아니다. 스쿨 클라우드에서 각 과목의 선생님들 스케줄에 따라 상담을 잡아야 한다. 빠르게 벽에 걸린 시계로 시선이 간다.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마감은 저녁 9시라고 했으니, 아직 한 시간이 남았다. 포기하기엔 이르다. 승산이 있다. 때마침 남편이 숟가락을 ‘탁’ 하고 식탁에 놓았을 때, 와이프는 슬쩍 말한다.


“자기뿡, 나 부탁이 하나 있다.”

“뭐? 돈 드는 거가?”

“뭐? 아니. 쭌이 학교 이메일 좀 보고 상담 신청 좀 해달라고..”


둘 사이에 적정이 흘렀다. 내내 저자세였던 내가 고개를 쓰윽 들었다. 귀를 의심했다. 남편은 스스로 한 말에 머쓱해하며 웃기 시작했다. 그런 남편을 보며 되물었다.


“돈 드는 거냐니? 니는 내를 대체 뭐로 보는 거고?”

“하하하, 말이 그렇다는 거지.”

“내가 이 집에 돈 먹는 하마가.”


남편의 말을 듣고 나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와이프의 뭉개 뭉개 피어오르는 분노를 모르는 척하며 컴퓨터 화면에만 시선을 고정하는 남편! 그리고 10분 만에 모든 과정을 끝냈다. 역시나 우리 집의 테크놀로지 브레인이다. 순간 멋있고 고마워서 우러러볼 뻔했다. 하지만 그러기엔 아직 해명되지 못한 찝찝한 기분이 남아 있었다. 이 기분, 뭐지?


남편은 갑자기 일어나 식탁 위의 빈 접시들을 싱크대로 가져다 놓기 시작했다. 음, 역시 나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부산으로 가면 다시 경제 활동을 해주겠다는 분한 맘이 생겼다. 이러다가는 하노이의 돈 먹는 '가오나시'(센과 치히로에 나오는 顔なし) 취급을 받는 건 시간문제다. 그리고 남편 녀석이 퇴직을 하면 지금 받은 이 수모를 그대로 되돌려 주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했다. 조금만 기다려라. 모두 되갚아주겠다.


두고 보자, 남편 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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