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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노이 민언냐 Nov 23. 2021

날 동하게 만드는 베트남 '동'

그래서 몇 동이라고?            일러스트 by 하노이 민언냐


비 오는 날 향한 꽝안 꽃 시장, 꽃 시장은 비 오는 날 가야 제맛이다. 이유는 좋은 가격에 꽃을 득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냉철한 판단력을 자랑하는 소비 요정이라고 해도 한 사람의 인간이다.


하루는 비에 쫄딱 맞은 나이 지긋한 분이 서있었다. 그녀는 논(베트남의 삿갓 모자)과 파란색 일회용 비옷을 입고 있었지만 얼굴도 손도 꾀나 젖었다. 오랜 시간 글라디올러스를 손에 들고 서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나를 보자마자 꽃을 권하는 할머니! 하지만 이미 꽃을 한 아름 안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잠시 걸음을 주춤하며 고민하게 되었다. 그녀는 말없이 미소를 띠며 나를 보고 있었다. 결국 한 다발을 더 사기로 했다. 하노이에서 이렇게 꽃 잔치를 해보지 언제 해보겠나 하는 생각을 했다. 가격은 다른 가게들과 같았다. 8만 동, 한화로 4천 원이었다. 지갑 안의 20만 동짜리 지폐를 꺼냈다. 거스름돈 12만 동을 받으려고 기다렸다. 그녀는 천천히 거스름돈을 챙기더니 만 동과 2만 동짜리 지폐를 주는 게 아닌가. 그럼 나머지 9만 동은 그녀가 꿀꺽하겠다는 심산이다. 이거 나를 빙다리 핫바지로 본 게 틀림없는 거지. 눈에서 강렬한 레이저와 함께 큰 소리로 말했다. 다른 상인들도 들을 수 있게 하는 게 나의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Ơi trời ơi. Bà ơi, một trăm hai mưoi mà! 

"아이고야. 할머니, 120(000 동)이지요.


Không phải là ba mười mà.

30(000 동)이 아니라고요.


Làm gì mà trả tiền oan như thế!!”

어찌 그래 바가지 씌워요!!"



할머니는 내가 쏘는 분노의 시선을 애써 피하며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잔뜩 찌푸린 미간을 하고서 계속 따지듯 버티고 서있었더니, 다시 10만 동과 2만 동의 지폐를 아까와는 다른 재빠른 스피드로 내주었다. 그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웃었다. 돈을 받아 드는 순간까지도 나의 두 눈은 쉬지 않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다시는 이 가게는 오지 않으리라 하고 결심을 하며 돌아왔다.

눈이 침침한 할머니가 실수한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1초쯤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 전혀 없다. 5만 동과 20만 동의 지폐는 둘 다 비슷한 붉은 색상을 띠고 있어 헷갈릴 가능성이 매우 크다. 하지만 10만 동은 녹색, 2만 동은 파란색, 만 동은 노르스름한 색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헷갈릴 가능성 제로다.


돈에 얽힌 미스터리는 하나 더 있다. 2년 전 하노이로 오자마자, 그것도 가장 정확해야 할 은행에서 말이다. 아직도 이게 직원의 단순 실수인지 어눌한 외국인을 상대로 한 범죄행위인지 구분이 가질 않는다. 사실 나는 후자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 물증은 없지만 심증은 있는 사건이다.


처음 하노이에 왔을 때, 가장 먼저 한 일들 중 하나가 은행 검색이었다. 베트남의 최대 규모의 은행인 비엣콤뱅크'Vietcombank'는 직장이 없는 외국인에게는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여 내 이름의 은행 계좌와 체크카드를 열기 위해 한국은행을 검색했다. 하노이에는 S은행과 W은행이 있다. 하지만 S은행으로 마음을 정했다. 호안끼엠에 큰 W은행이 있지만 ATM이나 지점은 S은행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신한은행 ATM이 우리 집 근처에 있다는 게 결정적인 이유다. 지점들 중 가장 가까운 곳은 바로 롯데 센터에 있는 은행이다. 하노이에 온 지 2주 정도 되었을 때 처음으로 가보았다. 롯데 마트에서 롯데리아를 지나니 익숙한 로고와 간판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S은행의 모델인 박항서 감독이 환하게 웃으며 맞이해 주었다. 왠지 안심이 되었다.

한국과 별다를 게 없어 보이는 은행이었다. 번호표를 뽑고 대기석에 앉는 것도 같았다. 손님도 별로 없고 직원들도 한가해 보였지만 일단 기다려야 했다. 그들은 나란히 앉은 옆 동료들과 웃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대기 번호를 바꾸는 버튼을 누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성질 급한 부산 사람인 나는 그런 그들의 손가락만 보고 있었다.

'암 왓칭 유.'의 메시지를 눈빛으로 전달하고 있었다. 직원과 눈이 두세 번 마주치고서야, 대기 번호가 바뀌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된 것이다. 안경을 쓴 남자 직원이 영어로 용무를 물었다.


"How may I help you?"


교과서적인 문장을 교과서적으로 건네는 그에게 은행 계좌와 체크카드 개설을 물었다. 여권과 거주증을 내고 필요한 서류를 작성했다. 그리고 USD를 베트남 동으로 환전하는 업무도 부탁했다. 부산에서 올 때, 비상금으로 베트남 동이 아니라 달러를 들고 왔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500 USD를 환전 요청했다. 그리고 지폐를 기계에 드르륵 세더니, 베트남 동으로 환전이 완료되었다. 나는 은행 직원을 의심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지폐를 제대로 세지 않고 누가 볼까 잽싸게 지갑에 넣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300 USD를 더 갖고 있었다. 환전을 한 번 더 요청을 했다. 처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 환전을 받았다.


그때 갑자기 뒤통수가 쎄한 게 돈을 세어 보고 싶은 강한 욕구를 느꼈다. 왜였을까.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돈을 세라는 계시가 울리는 것만 같았다. 평소답지 않게 돈을 한 장씩 세기 시작한다. 이런... 베트남 동 중 가장 큰 단위인 50만 동(한화로 2만 5천 원) 짜리 지폐 한 장이 비었다. 잘못 세었을까 싶어 다시 한번 더 세어 봤다. 여전히 한 장이 비었다.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한 장이 없다고 했다. 그때 분명히 보았다. 그의 안경 너머 미세한 눈동자의 흔들림을 말이다. 그리고 안경을 만지며 들었다 놓았다를 두 번 정도 반복하더니 50만 동을 다시 돌려주었다. 옆에 있는 여자 직원의 눈치를 살피는 건지 그는 동료를 지긋이 바라보기도 했다. 나도 따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물론 그녀는 자신의 일을 할 뿐 우리 쪽으로 돌아보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의 밑장 빼기가 점점 확신으로 바뀌고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는 사과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의도한 것이 아니라 실수였다고 해도 사과를 하는 게 당연하게 아닌가 싶었지만,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의 입에서 “쏴리.”라는 한 마디만 나왔어도, 의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결국 나는 불쾌한 표정과 아우라를 풍기며 거친 손길로 돈을 쥐고 나왔다. 분노와 경멸의 눈빛도 함께 선사하며 말이다.


다음날, 남편에게 소개받은 베트남어 학원으로 향했다. 베트남어를 했다면 더 정확히 컴플레인을 걸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억울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일이 나쁘기만 한 건 아니다. 그 분노와 억울함이 동력이 되어 베트남어를 시작했으니, 뭐 조금은 고마워해야 할까.

우측으로 갈수록 돈의 단위는 작아진다.

P.S. 베트남 동은 0이 많다. 그래서 마지막 '000'는 생략하고 앞의 숫자만 말하고 표기할 때도 마찬가지로 '000'을 K로 쓴다. 예를 들어 가장 큰 단위의 화폐인 500000동은 500으로 부르고 500K로 쓴다. 0이 너무 많아 처음에는 1000동도 크게 느껴졌다. 하노이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마트에서 1000동 대신 사탕을 주는 게 아닌가. 이게 뭐지 싶었다. 택시 기사들도 1000동은 거슬러 주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었다. 100동도 아니고 무려 0이 세 개나 붙은 1000동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1000동은 베트남 사람들도 잘 안 받는 적은 돈이란다. 한화로는 나누기 20을 하면 되니, 50원인 셈이다. (환율의 변동은 있지만, 동에서 0 하나를 빼고 반으로 나누는 계산법은 거의 들어맞는다.) 여기에 익숙해지다 보면 한국의 쇼핑 사이트에서도 모든 가격을 20으로 나누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정말 싸다고 혼자 착각하다가 한화라는 사실을 깨닫는 웃픈 경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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