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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노이 민언냐 Dec 15. 2021

크레프 요정의 가방

크레프에 진심인 프렌치        일러스트by하노이민언냐

‘철커덩’    


분명히 들었다. 둔탁한 쇠 소리를 말이다. 사라가 커다란 가방을 대리석 바닥 위에 내려놓았을 때, 철커덩하는 마찰음이 났다. 그녀는 대체 뭘 넣어 온 거지? 쇠덩이라도 들었나? 아니면 1박 2일 여행이라도 가는 걸까? 정체불명의 가방, 그 속사정이 궁금해졌다.   

      

하노이에서 보내는 3번째 크리스마스가 다가온다. 벌써부터 우리들의 심장은 마구 요동치고 있다. 크리스마스를 향한 설렘도 있지만 사실 오늘 사라가 우리 집으로 오기 때문이다. 사라는 아이들과 나의 프랑스어 선생님이다. 그녀와의 인연은 프랑스 문화원에서 시작되었다. 다른 선생님들의 수업도 들었지만 휘청대는 나의 프렌치에도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끝까지 듣고 바로 잡아 주던 그녀는 단연 최고였다. 하노이뿐만 아니라 내 프랑스어 인생(부산 프렌치, 한국인 강사 포함)에서 최애 선생님은 그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녀에게 수업을 배운지도 벌써 1년을 훌쩍 넘겼다. 하지만 올해 5월부터는 온라인 수업으로만 만날 수 있었다. 빌어먹을 코비드, 너를 저주한다. 그랬던 그녀가 특별히 시간을 내어 우리 집으로 오기로 했다. 올해 크리스마스와 연말 휴가를 프랑스에서 보낼 그녀는 떠나기 전에 직접 만나 인사를 하고 싶다고 했다. 물론 나의 답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OUI OUI. OUI.”였다. 이게 얼마만의 실물 영접인가! 우린 만나자마자 서로를 향해 함성을 지르는 것으로 수업을 시작했다. 그녀의 등장만으로도 반가운데 쭌이의 키만 한 해바라기 한 다발을 품에 안고 왔다. 해바라기를 그대 품 안에~ 하지만 이내 프랑스어로 해바라기가 뭔지 질문을 던지는 그녀, 역시 프로 강사이십니다.     


“Bien sur, Ça s’appelle la tournesol. Elles sont vraiment jolies.”    


넘길 것도 없는 짧은 머리를 넘기며 거만한 표정으로 답을 하자 크게 웃는 사라다. 이 호탕한 웃음, 얼마만이던가. 그래, 사라는 동그랗고 반짝이는 갈색 눈동자와 풍성하고 아름다운 빨간 머리를 가졌다. 정말 그리웠다, 그녀의 에너지 넘치는 웃음소리! ‘해(soleil) 주위를 돈다(tourner)‘는 의미를 담은 프랑스어 tournesol보다 더 완벽한 이름은 없다며 웃고 떠들었다.     


우리는 그간 매주 2회씩 온라인 수업을 해왔지만, 서로 한 번도 연락한 적 없는 사람들처럼 반가워했다. 그렇게 우리의 90분 수업은 눈 깜짝할 사이에 끝이 났다. 사실 수업이라기보다는  대부분이 근황 토크와 코비드 저주였지만 말이다. (요즘 2인 이상 모이면 꼭 끝은 코비드로 마무으리!) 수업을 마칠 때쯤 학교 온라인 수업을 먼저 마친 쩡이가 배시시 웃으며 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5분쯤 지나니 쭌이가 활기차게 "Bonjour!" 인사를 하며 거실로 나왔다. 쭌이와 쩡이는 사라와 눈이 마주치기만 해도 씨익하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동안 직접 만나지 못한 탓인지 그저 싱겁게 웃기만 했다. 그리고 우리가 앉아 있는 식탁 주위만 뱅뱅 돌았다.  아이들은 'Sara바라기'인가.

 

그런데 아까부터 내 눈에 띄는 건 따로 있었다. 꽃은 알겠는데 저 커다란 가방은 대체 뭘까. 교재 달랑 2권을 넣기에는 너무 크고 무거워 보인다. 게다가 오늘은 다른 수업이 없는 날이라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물어보는 것도 실례겠지. 하지만 궁금했다. 계속 시선이 가던 차에, 사라는 가방에 손을 넣어 뭔가를 꺼내기 시작했다.    

Ohlala! 울랄라! 가방에서 밀가루, 댤걀, 버터, 동그란 작은 그릇 그리고 바닐라 시럽이 연달아 나왔다. 그리고 그 묵직한 소리의 주인공이 드디어 정체를 드러냈다.     


두둥! 그건 바로 프라이 팬! 중간 크기의 팬이 등장했다. 아이들도 나도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두 눈이 휘둥그레 졌다.     


"Sara! Qu'est-ce que c'est?"   

 

하나 둘 가방에서 재료를 꺼낼 때마다 아이들은 “우와아~ 우와아~”하는 탄성과 함께 이게 뭐냐고 물었다. 이쯤 되면 도라에몽의 요술주머니가 따로 없다. 그녀도 이런 아이들이 귀여웠는지 크게 웃었다. 내일 밤 비행기를 타고 프랑스로 갔다가 2달 뒤에 돌아올 그녀! 분기별로 일주일 정도의 브레이크는 있었지만 이런 장기 휴강은 처음이다. 그래서 이런 특별한 시간을 선물해 준 걸까.    


사라는 교재에 있는 액티비티로 나온 크레프를 보고 손수 모든 재료를 준비해왔다. 사실 손쉽게 할 수 있는 크리스마스 카드나 그림 액티비티도 함께 있었는데 말이다.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준비한 그녀의 수고에 다시 한번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갑분 쿠킹 수업이 시작되었다. 식탁에서 사라가 준비해온 계란을 돌아가면 깨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울에 밀가루와 우유를 붓는다. 반죽이 완성이 되자 수업 시간을 훨씬 지나고야 말았다. 슬슬 걱정이 되어 나도 모르게 시계를 흘깃거렸다. 그러자 사라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교재 속의 요리 레시피

"Ne t'inqiete pas, pas de souci!"    


걱정할 것 없다고 말하는 그녀! 인사치레가 아닌 진심으로 말하는 게 느껴졌다. 음... 그렇다면 요리와는 가능한 멀리 떨어지고 싶은 마망(프랑스어로 엄마 maman)은 뒤로 물러나 부엌을 내어 줄 수밖에 없지.     

자, 이 부엌은 이제부터 여러분의 것입니다~ 마음껏 크레프를 구우십시오!  

  

“Ohlala, c’est quoi?(울라라, 그게 뭐야?)”    

“Wahahaha!”    


부엌을 양보하고 뒤로 물러선 나는 방으로 퇴장했다. 그리고 연이어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이 얼마나 행복해하는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고소한 버터 냄새가 집을 가득 채울 때쯤, 쩡이는 신이 난 얼굴로 내게 왔다.     


“엄마, 크레프 다 됐다! 와서 함 바!”    


쩡이의 작은 손에 이끌려 함께 부엌으로 향했다. 어느새 노란 반죽의 크레프가 노릇노릇하게 구워져 있었다. 팬 위에서 노오란 빛깔을 뽐내며 앉아있는 동그란 크레프! 쩡이는 자기도 함께 구웠다고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그리고 쭌이보다 더 예쁘게 구워졌다는 자랑을 잊지 않았다. 이에 의기소침해진 쭌이는 자신의 크레프는 못생겨 보였나 보다. 울퉁불퉁한 크레프는 자신의 얼굴을 닮아서 그렇다며 멋쩍어했다.     


“Pas du tout, 준성! Tu es très beau.”    


사라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쭌이는 너무 잘 생겼다고 한다. 크레프는 ‘달’을 닮아 너무 마음에 든다고 덧붙였다. 쭌이는 요즘 들어 송골송골 피어오르기 시작한 콧잔등의 여드름을 신경 쓰기 시작했다. 곧 초등학교 6학년이니 외모에 신경 쓸 나이다. 사라는 그런 쭌이의 마음을 알아챘는지 자신의 흑역사인 여드름 이야기를 주저 없이 오픈했다. 딱 쭌이의 나이부터 시작해 꼴레지(프랑스의 중학교)에서 피크를 찍고 여드름은 자취를 감췄다고 말이다. 쭌이는 잠자코 이야기를 다 듣더니 다시 밝은 표정으로 크레프 위에 열심히 초콜릿을 펴 바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위안이 된 모양이다.     


“Merci, Sara!”    


여드름으로 고생한 적이 없는 나는 발만 동동 구를 뿐 사실 그 어떤 이야기도 해줄 수 없었다. 그녀의 말에 나 또한 안심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인덕션 위의 팬이 어딘가 낯설다. ‘테팔’이란 브랜드는 익숙한데 한국에선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모양과 사이즈다. 유심히 보니 두께가 굉장히 얇고 팬의 높이 또한 아주 짧아 낮다. 어라, 이런 모양의 팬이 한국에 있었던가. 잠시 신기한 눈빛으로 팬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사라는 이 팬은 프랑스에서만 판매된다고 한다고 설명했다. 오로지 크레프에 의한 크레프를 위한 팬이기 때문이다. 오~역시~ 하는 감탄사가 또 한 번 쏟아진다. 프렌치는 크레프에 진심인 걸로~ 프렌치 크레프를 굽는 노하우는 물론 ‘사라’ 표 특제 크레프 말아먹는 법 등을 아이들에게 전수해 주었다. 며느리도 모른다는 레시피를 공유하다니, 사라는 진정한 스승이다. 그리고 2월 2일은 크레프 데이라는 것도 나는 처음 알게 되었다. 거의 매주 일요일은 엄마와 함께 크레프를 굽곤 했다는 그녀의 말에 나의 어린 시절도 소환되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일요일마다 엄마와 함께 간식을 만들었다. 주로 햄 샌드위치나 고로케를 만들곤 했다. 특히 고로케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던 나다. 계란 물에 햄을 품은 식빵을 담그고 고슬고슬한 빵가루를 입혀 기름에 촤악 하고 튀겨낸 고로케! 막 튀겨낸 따뜻한 고로케를 한 입 베어 물고 흰 우유를 한 모금 더하면, 캬아~ 세상 어디에도 없는 맛이다. 그렇게 크레프 하나로 옛 추억에 젖는 나, 그녀는 진정한 크레프 요정이다.    

완성된 크레프를 먹으며 행복해하는 쭌이는 그 큰 걸 잼과 초콜릿을 발라 순식간에 2장이나 먹어치웠다. 훗, 빵이라고는 입에도 대지 않던 녀석인데 말이다.     

마지막에 남은 반죽의 양은 한 장을 굽기에는 애매한 양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남은 한 방울까지 모두 굽고 싶어 하던 쩡이에게 사라는 미키마우스를 굽자고 제안한다. 쩡이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미키 마우스?”라고 몇 번을 물어보았다. 쩡이는 제법 익숙해졌는지 스스로 냅킨에 녹인 버터를 묻히고 팬에 발랐다. 그리고 중간 크기의 동그라미 하나를 팬 가운데 퍼뜨리더니 다시 양쪽으로 작은 동그라미 두 개를 만들었다. 이윽고 현란한 사라의 손목 스냅! 똿!


"Voilà!(브알라,그렇지!)"


 이윽고 완성된 미키마우스, 그 비주얼이 꾀나 그럴싸하다. 쩡이의 행복감은 최고치를 쳤고 거실과 부엌을 폴짝폴짝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사라는 모양이 잘 나왔다며 사진을 찍었다. 흐으~ 이 귀요미 미키마우스가 공포의 입큰이 몬스터로 바뀔 줄 모르고 말이다.

쩡이는 굳이 눈 , 코, 입을 붙이겠다고 냉장고에서 초콜릿 몇 개를 꺼내왔다. 결국 눈, 코, 입을 붙이다 그렇게 귀엽던 녀석이.. 흑.. 아니다. 딸내미, 니가 좋다면 나도 좋아. 사라는 이마저도 귀엽다며 다시 사진을 한 장 찰칵 찍어서 갔다.    

음… 입에서 분노를 토해내는 미키 마우스같이 보이는 건.. 내 마음이 삐뚤어져서 일까..

“Au revoir.”   


그냥 헤어지기 아쉬워 몇 번의 인사와 포옹을 나누며 그녀를 입구까지 배웅했다. 우린 사라져 가는 뒷모습을 향해 몇 번이고 인사를 외치고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집에 오자마자 쩡이는 올해 크리스마스에는 크레프를 굽자고 몇 번이고 말했다. 시종일관 모르쇠로 대응하는 엄마, 응~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 말자는 주의다. 기분에 휩쓸려 오케이를 했다가는 거짓말쟁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낙인이 찍히고야 만다. 쩡이는 결국 나를 불러 세우더니 자신이 요리법을 기억하고 있으니 또 굽자는 말을 야무지게 한다. 흔들림 없는 그 결연한 눈동자.. 크레프 요정은 그렇게 프렌치 숙제가 아닌 크레프 숙제를 내주고 홀연히 떠났다. 부디 안전하게 다녀오길~ 나는 하노이에 남아 손목 아대를 차고 열심히 팬을 흔들고 있겠소, 우리의 크레프 요정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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