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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노이 민언냐 Dec 16. 2021

어느 어학 덕후의 위험한 얼평

사심 가득 공부 노트 애도기            일러스트 by 하노이 민

오~ 잘 빠졌네, 이 녀석이 좋을까. 아님 저 녀석? 얘는 괜찮은데 너무 뚱뚱해서 같이 다니기 불편하겠어. 쟤는 예쁜데  작은데.. 손에 착 감기는 볼륨이 좀 아쉽단 말이야..


이 무슨 위험한 얼평이냐고? 이 소리는 나의 마음의 소리다. 성공적인 어학 공부를 위한 파트너를 고르는 중이다.


어학 공부의 성공의 키는 '삼三빨'이다. 선생 빨, 친구 빨, 문구 빨이다. 운동에서도 장비가 중요하듯 공부도 마찬가지다. 사실 고등학생 때도 필통에 형형색색의 펜으로 빵빵하게 넣고 다니는 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간편한 구성을 좋아한다. 심플하지만 쓰임새 있는 나만의 컬렉션이 나름 존재한다. 그리고 이게 틀어지면 그날의 공부는 모두 none! rien! không! 無し! 헛수고로 돌아가고야 만다. 특히 처음 새 노트를 꺼내 쓸 때 가장 생각이 많아진다. 고민의 고민을 거듭한다. 3 - 4개월가량의 긴 어학 공부의 승패는 바로 이 노트에서 판가름 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혼 상대를 고르는 것만큼 신중의 신중을 기하는 나를 비웃을 텐가! 당신의 노트 선택이 학업의 능률에 얼마나 크게 기여하는지 잘 모르는군.


사실 아이 패드를 사고 종이 없는 생활을 시도한 적도 있었다. 열심히 인터넷을 검색해, 대학생들의 필기를 전담한다는 '국민 앱'이나 단어장을 다운로드했다. 종이를 줄여보자는 지구 환경 지킴이의 마음 때문… 이란 것은 대외적인 이유다. 쭈글스럽지만 요즘 MZ 세대들은 강의도 이 패드 하나로 모든 걸 해결한다고 하지 않나. 젊은 척 MZ 세대에 발가락 하나라도 슬쩍 걸쳐보고 싶어 도전해 봤다. 나도 쿠울~하게 패드 하나 촤악 펴서 모든 걸 해보련다 하고 선언했다. 그리고 종이의 시대는 끝났노라고 이제 구식이라며 종이를 모두 치우고 베트남어 교재도 파일로 받아 수업에 임했다. 하지만 한 달은커녕 일주일도 채 안 되어 종이로 돌아왔다.  모든 것을 대체해 준다는 아이패드는.. 역시 침대에서 넷플릭스를 볼 때가 가장 이상적이다. 공부는 사각거리는 연필로 노트에 꾹꾹 눌러쓰고 채워나가는 맛이 있어야지. 이것이야말로 불변의 아날로그 감성이다. 크으~ 태세 전환이 아주 빠른 편.. 쿨럭..


좌 신노트, 우 구노트

노트의 기준은 엄격하다. 어학공부 경력 20년인 ‘민언냐’의 승은을 받는 노트는 시중에 파는 아무개일 수가 없지. 우선 가장 중요한 덕목은 바로 두께다. 너무 얇은 노트는 금방 다 써버려 연습장과 다를 바가 없다. 꺼진 불도 다시 보고 배운 단어도 계속 봐야 하는 게 어학 공부의 핵심이다. 몇 달 전의 단어와 문장이라도 계속해서 복습해야 망각의 블랙홀에 휩쓸리지 않는다. 특히 나의 뇌는 예전 같지 않다. 방금 주문한 게 카페 라테인지 카푸치노 인지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뇌는 점점 관성의 법칙에 순응하며 유에서 무가 되는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그렇다고 6개월, 1년 치의 단어를 한 권에 담을 수는 없다. 너무 두꺼우면 들고 다니기도 어렵지만 오래 쓰다 보면, 너덜너덜 비루해지기 때문이다. 비주얼에 약한 나는 결국 손 대기가 싫어져 녀석과의 관계 회복을 하지 못한 채 점점 멀어진다. 결국 새 노트를 열 테고, 헌 노트를 다 쓰지 못하고 새 노트를 꺼냈다는 죄책감에 몸서리칠 것이다. 이건 비극이다. 쓰읍~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난다. 때가 되면 슬슬 운동복이나 기구도 업그레이드해 줘야 운동할 맛이 나듯 노트 또한 그렇다. 철 따라 바꿔줘야 새로 채우고 공부할 맛이 나는 법이다. 하여 개인적으로 100장 내외를 고른다. 물론 이건 재활용 종이의 얇은 두께를 기준이다.

둘째는 노트의 척추, 스프링이다. 스프링은 종이를 과격하게 넘기다 보면 찢어진다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역으로 찢어야 할 때는 흔적 없이 깔끔하게 뜯기는 것도 장점이다. 사실 악필 중의 악필인 나는 아무리 엉망진창의 개발새발 필기라도 폐기는 거의 하지 않는다. 다시 쓰기 싫은 귀차니즘도 있지만 다시 쓴다한들 돌아오는 건 또 다른 지렁이 체다. 그리고 밀려오는 좌절감이란.. 또박또박 반듯한 글씨를 쓰는 사람들은 모른다. 하지만 한창 엄마가 뭘 좀 한다 싶으면 방해 본능이 솟는 초딩 3학년의 따님이 종이를 달라고 할 때가 있다. 다른 종이가 없다면 어쩔 수 없다. 한 장 찢을 때, 엄마도 맴찢~ 왜 아이들은 꼭 엄마가 공부하면 옆에 착 따라붙는 걸까. 평소 때는 혼자 잘만 놀더니 말입니다. 또한 최 선단의 양쪽 모서리에서부터 100프로 지면을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은 무시할 수 없다. 각 단어나 숙어 사이에 한 줄씩 띄워가며 쓰지만 대신 모서리만큼은 성실하게 채운다. 뒤늦게 생각난 연관 단어들을 앞이나 옆에 추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특히 베트남어는 같은 성조를 묶어서 외우는 편이라 계속 덧붙여 쓰게 된다.) 이건 팁이지만 스프링도 스프링 나름이다. 너무 촘촘하고 탄성이 강한 꼬불이 스프링이 종이가 가장 잘 뜯어지며, 얇다 보니 지들끼리 신나서 뱅뱅 꼬이는 경우도 많다. 그러다 이탈한 스프링의 끝에 손가락이 찔려 피라도 나면 그날로 이 녀석은 사요나라, 아디오스다. 난 내 몸을 아끼는 아주 냉정한 주인이다. 다소 얼기성기한 중간 굵기가 탄성력이 고정력이 좋고 찢김이 훨씬 덜하다. 이 또한 너무 간격이 커 새끼손가락이 들어갈 정도로 헐거우면 며칠 안 가서 종이가 장미 꽃잎처럼 후드득 떨어지기도 하지만 말이다. 스프링은 한 줄로 죽 연결된 것보다는 칸칸이 따로따로 연결되어 있는 '링'식 배열이 고정력이 더 좋다는 것을 잊지 말자. 그리고 링은 상철(위로 넘기는 식)보다 좌철(옆으로 넘기는 식) 이 페이지를 넘기기가 더 편하다는 것도 말이다.

셋째는 줄의 간격이다. 내가 쓴 삐뚤빼뚤한 악필을 하루 종일 보고 있자면... 오! 마이 아이즈! 나조차도 피로가 쌓인다. 하여 늘 줄 노트를 찾는다. 그나마 정렬이 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연습장도 백지 놉! 그리드 노트(모눈종이)나 점이 찍힌 닷 그리드를 쓴다. 줄 사이의 간격은 정말 중요한 포인트다. 제아무리 친환경 종이에 손 넘김이 좋은 녀석이라고 할지라도, 줄 사이 간격이 좁으면 탈락! 너얼찍한 게 최고다. 0.9m에서 1cm가 딱 맞다. 필기한 면을 다 채우지는 않는다. 너무 꽉 채우면 시각적으로 피로감이 느껴진다. 한꺼번에 단어들이 달려들며 나를 공격하는 느낌마저 든다. 또한 상단에 Date란이 있으면 그야말로 완벽하다. 매일 어떤 단어와 문장을 공부했는지 체크하기 쉽기 때문이다. 머라이어 캐리의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를 들으면 크리스마스의 기억이 떠오르지 않나. 트리로 가득한 길에서 찍은 인생 샷, 달콤한 생크림 케이크, 친구들과 꽐라 되게 마시... 쿨럭 이건 빼자. 날짜를 기입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날 이런 표현에 대해 얘기했지 하고 그날의 분위기, 냄새가 연상되어 학습에 도움이 된다. 자신의 어휘 레벨이 점점 올라가는 것도 확인할 수 있고 말이다.


안녕, 널 잊지 않을게. R.I.P


오늘은 8월부터 쓴 나의 노트를 빽빽하게 모두 채운 날이다. 이렇게 또 한 권을 뽀개고야 말았다. 쉼 없이 열심히 고생한 나의 노트여, Rest In Peach 아니 Peace! 때론 너를 놓지 못해 밤을 지새우기도 하고 너를 세차게 쳐내며 밀어내기도 했지. 너와 함께 지낸 시간, 그 모든 시간이 행복했다. 물론 너의 모든 걸 내 머릿속에 넣지는 못했지만... 널 오래도록 기억할게. 함께 수고한 나의 라운드 숄더에도 치어스~


오늘은 자축하는 의미로 혼자 축배를 들어야겠다. 신랑 녀석은 귀가가 늦으시니 말입니다.

문구 덕후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좀 좋아하는 편.


P.S. 하노이에서 좋은 문구를 찾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하동에 있는 에온 몰(Aeon Mall)에서 찾은 TYPO는 문구, 인테리어 소품, 에코 백 등 다양한 제품들이 판매되고 있다. 패셔너블하고 통통 튀는 표지와 다양한 사이즈의 노트들이 있다. 최애 공부 노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코비드 때문에 그간 쟁여 놓은 노트들이 하나둘씩 동이 나고 있다. 이제 내게 남은 건 단 한 권! 30매마다 포켓이 장착된 컬러풀한 칸막이가 있어 좋다. 물론 포켓은 끽해봐야 종이 몇 장이 들어갈 뿐 거의 장식품 수준이지만 말이다. 각 섹션마다 베트남어와 프랑스어 등을 분류해서 사용할 수 있어 편하다. 공부용이지만 멋도 내고 싶다면 Typo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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