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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노이 민언냐 Jan 05. 2022

하노이 필수템, 필터기! 걱정 필터기는 어디 없나요?

불면증 남편의 걱정                 일러스트 by하노이민언냐

“남편 불면증인 거 모르나?”


일찍 퇴근하는 날에는 아이들을 재우는 건 남편의 몫이다. 의도는 좋은데 아이도 자고 본인도 반쯤 자다가 온다는 게 함정이다. 그리곤 남편은 침대에 눕는다. 머리가 베개에 닿기 직전, 나는 재빨리 낮에 부탁한 수도 필터 교체에 대해 물었다. 베트남의 수돗물에는 석회질이 많아 필터가 금방 누렇게 변한다. 오늘은 기필코 바꿔야 한다. 무엇보다 차고 넘치는 게 여분의 필터다.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진 필터를 쓸 이유가 없다.


 베트남 수질은 석회질 함유가 높고 노후된 배수관 시설로 악명이 높다. 특히 2019년 10월에는 하노이에서 검은 수돗물이 나온 사건도 있었다. 상수도 오염지역은 한국인들이 밀집해 있는 남뜨리엠(Nam Từ Liêm)과 타잉쑤언(Thanh Xuân), 꺼우저이(Cầu Giấy), 하동(Hà Đông) 등 이였다. 그리고 거주민 수십만 명으로부터 수돗물에서 악취가 난다는 신고가 접수되었다. 결국 물 공급이 끊기고 7군데의 스타벅스는 문을 닫아야 했다. 주위의 대형마트인 Big C, K-Market, Vinmart 등에서는 생수가 동이 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원인은 하노이에서 1시간 40분 거리의 호아빈(Hòa Binh) 성 정수장에서 2,5톤 트럭이 폐유를 강에 불법 투기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쏟아진  폭우로 물이 넘쳐나 수도관으로 흘러들었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 가족이 입국하기 불과 1달 전이었으며 많은 교민들이 물 부족으로 고생을 했다. 다행히 수도관, 물탱크 청소로 상황은 해결되었으나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사실 낙후된 수도관보다 더 무서운 것은 배수시설이 폐수처리 시설과 구분 없이 구축되어 있는 것이다.

2019년 10월 상수도 오염지역

이 사건 이후로 하노이 한국인 가정에서는 필터를 필수로 여긴다.


지난주부터 필터 교체의 시급함을 어필해온 나는 침대로 깊게 파고드는 남편을 보자 더 다급해졌다. 오늘은 반드시 갈아야 한다고 힘주어 말하자, 날카롭게 한 마디 내뱉었다. 불면증인 자신을 깨웠다는 것이다. 밤을 새우게 생겼다며 투덜댔다. 그리고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수전을 만지작거리며 돌려 누렇게 변한 필터를 분리해, 내게 주었다. 그 역시 비주얼에 놀랐는지 숨을 몰아쉬었다. 집게손가락으로 찝찝한 듯 아슬아슬하게 들어 올렸다. 그리고 뒤에 서있는 내게 건넸다. 수술실의 조수인 양 재빠르게 받아 쓰레기통에 버렸다. 어쩐지 요즘 들어 화병에 물방울 자국이 더 선명하게 남고 물도 더 빠르게 탁해지더라니.... 필터의 수명이 다된 것이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싱크대는 물론 각 욕실의 샤워기까지 모두 장착한 상태다. 물론 요리와 식재료 세척에 생수를 사용하는 것은 기본이지만 몸에 닿는 물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처음 하노이에 왔을 때 ㄹ사의 필터를 들고 왔다. 하지만 리필과 본체가 금세 망가졌다. 그래서 베트남에서 필터를 구매했다. 당장 눈에 띄지 않아, 성능에 의구심이 들다가도 누렇게 변색되는 필터를 보면 확실히 안심이 된다.


‘딸깍’ 드디어 새 필터가 장착되었다.

“역시 엔지니어는 다르다, 자기뿡!”


그는 말없이 시선을 수도꼭지에 고정시켰다. 수돗물이 새지 않고 잘 나오는지 강 약 중간 약으로 물의 세기를 달리하며 꼼꼼히 확인했다. 사실 아주 간단한 일인데 하늘의 별을 따주는 듯했다. 거사를 치르는 비장한 표정.. 아쉬운 소리를 하며 지켜보자니 왠지 억울했다. 손목의 통증만 아니었어도 직접 했을 것이다. 손목을 비트는 트위스트 동작만큼 치명적인 것도 없다. 특히 오늘은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자칫하면 내일 테니스 수업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 크리스마스부터 줄곧 먹어댄 결과, 2킬로가 쪄버렸다. 고로, 내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테니스로 칼로리를 소모해야 한다. 코시국에 허용된 몇 안 되는 야외활동을 포기할 순 없지 말입니다~

남편을 만난 건 대학교 1학년 봄이었다. 입학식을 한 다음 날에 만났으니 이제 인생의 반 이상을 함께 했다. 당시 M.T. 와 O.T. 를 빙자한 숱한 술판들도 함께였다. 그리고 나는 알았다. 아, 사람은 3초 만에 잠이 들 수 있구나 하고 말이다. 함께 말을 하다가 흠칫 돌아보면 이미 꿈나라로 가던 그다. 그런 그에게 요즘 큰 고민이 생겼다. 스스로가 불면증이 아닌지 의심이 된다는 것이다.


“민뽕, 아무래도 남편 불면증 같다.”

“뭐.. 뭐라고?

“예전에는 머리 대면 바로 잠이 왔거든. 근데 요즘은 몇 번씩 뒤척이고 해야 겨우 자더라고..”

“…”


3초 안에 바로 잠이 들던 그에게는 난생처음 겪는 일이겠지. 하긴 수학적으로도 3초에서 3분 다시 말해 180초로 길어졌으니, 60배나 증가한 것이다. 불면증으로 삶의 질이 낮아지고 있다며 걱정을 했다. 그의 표정은 웃음기 쏙 빠진 다큐였다. 어라, 진심인가...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이윽고 그는 유튜브에서 열심히 불면증에 좋은 음악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낯익은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 ost, ‘인생의 회전목마 (人生の メリーゴーランド)’였다. 수면에 좋은 음악으로 추천된 모양이다. 그는 비스듬하게 돌아눕더니 미쳐 이불을 덮지 못한 발가락들이 삐죽 튀어나왔다. 그리고 두세 번 꼼지락거렸다. 이어 두세 번을 앞치락 뒤치락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곡은 클라이맥스에 치닫는다. 쿵 짝짝 쿵 짝짝 현악기와 피아노의 웅장한 하모니, 그리고 더해지는 드르렁드르렁 코 고는 소리.. 한 곡이 채 끝이 나기도 전에 레드썬 깊은 잠에 빠졌다. 코를 골 때마다 함께 올라갔다 내려가는 그의 어깨를 보니 피식하는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안도감도 함께 들었다.

음.. 이런 게 바로 걱정을 사서 한다는 거지. 문득 이런 근심,걱정을 걸러주는 ‘걱정 필터기’가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도 마음도 깨끗해지도록 말이다.


P.S. 한국에서 필터를 들고 오지 못했다고 발을 동동 구르는 당신, 안심하시길! 한국에 쿠팡과 쇼핑 1번가가 있다면 베트남에는 '라자다'와 '쇼피'가 있다. 필터를 검색창에 치기만 하면 다양한 사이즈, 브랜드의 상품들이 한눈에 쫘악 펼쳐지는 신세계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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